307화. < Chapter 56. 도마뱀 꼬리 - 2 >
“다음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팀 판타지아가 제작한 아티팩트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
“이런, 벌써……."
경연은 순조로이 개막했다.
월드 프라이즈는 그 이름에 맞게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아티팩트를 선정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사실 경연의 취지는 각국의 아티팩트 장인들이 지닌 능력을 선보이고 서로의 아티팩트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견문을 넓히는 것도 포함하고 있었다.
경연 본선에 올라 이 자리에서 소개되는 시점에서 사실 순위는 확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발표 순서였다.
즉 발표순서가 늦으면 늦을수록 순위가 높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래선지 한 작품 한 작품 발표가 이루어질 때마다 어떤 팀은 안도의 한숨을, 어떤 팀은 실망스런 탄식을 내뱉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회장이 하도 눈부셔서 어느새 점잔을 빼는 행사가 되었나 했는데, 저런 모습은 그대로구나.”
과거라도 기억해낸 걸까, 이만우가 킬킬 웃으며 하는 말에 강신혁이 실소와 함께 대꾸했다.
“인간 본성이 어디 가나요.”
“후배, 지금 나온 거 랭크 어떻게 돼?”
“A-. 슬슬 작년의 경연 수준은 뛰어넘은 거 아냐?”
본래는 B급만 넘어도 명품의 수준에 속하는데, 세계 각국의 난다 긴다 하는 아티팩트 장인들이 모인 것도 있고 요즘 들어 고랭크의 게이트가 많이 나타남에 따라 자연스레 아티팩트 재료의 수준도 높아진 것도 있고 해서 이번 월드 프라이즈에 출품한 아티팩트들은 이전 까지에 비해 한층 수준이 높았다.
다만 장인들 가운데에는 자신들만 랭크가 높은 아티팩트를 만들어낸 줄 아는지, 순위에 납득을 하지 못하고 울분을 토하는 이들도 몇몇 보였다.
“정신수양이 아직이네.”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정신수양이 뭔 소용이야.”
“선배도 아직이네.”
“그 태도 좀 열 받는데.”
강신혁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나희를 가볍게 받아내며 이런이런, 고개를 흔들었다.
아티팩트 제작에 있어서 정신수양이 중요한 건 전생의 모루의 경험으로 확실히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걸 벌써 이나희에게 말해줄 수도 없고.
“선배도 언젠간 알게 될 거야.”
“그게 열 받아……! 경력은 내가 더 긴데!”
“아서라, 신혁이 놈은 처음 망치를 잡은 순간부터 너보다 고수였다.”
“끙…… 각오해, 내 작품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줄 테니까.”
이나희는 강신혁에게 자신이 만든 작품의 마지막 공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가 홀로 그의 수준을 뛰어넘었을 리는 없지만 저렇게 큰 소리를 치는 걸 보면 조금은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하나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면, 벌써 참가팀의 절반 이상이 호명된 지금 시점까지 에비거 해머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그 팀이 작년 경연에서 금상을 차지하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신인들의 경쟁이었고 특히나 그 팀은 고작 C랭크의 아티팩트를 만들어냈었다.
그런데 A랭크에 근접하는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는 지금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고 있다는 건, 최소한 그 정도 수준은 뛰어넘었다는 얘긴데…….
‘잠재력이 대단했나보네. 고작 1년 만에 그렇게 성장한 걸 보면…….'
강신혁은 저 건너편 좌석에 앉은 채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금발의 미녀의 시선을 느끼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잠재력이라니, 방금 강신혁의 생각을 옆에 앉은 이나희가 알아차린다면 네가 그런 말을 하냐며 잔뜩 욕을 퍼부어줬을 것이다.
“아."
그때, 강신혁의 왼쪽 옆에 앉아있던 엘레노어가 외마디 감탄사를 냈다.
그 이유는 그녀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극장 안으로 무려 윌포드와 윌리엄 황태자가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윌포드의 입장과 동시에 그 뒤를 수호하듯 따라 들어오는 은색 갑옷의 왕실기사들과, 극장 내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운 또한 함께 느껴졌다.
그들은 은밀하게 움직이는 능력을 갖춘 초인들.
더욱이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은 바로 얼마 전 윌포드에게서 느꼈던 그것과도, 아프리카에서 마주했던 제우스 소속의 초인들에게서 느꼈던 그것과도 닮아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강신혁은 윌리엄의 안색을 살폈다. 침착성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파리한 낯빛을 미처 다 감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윌포드에게 오늘의 계획을 들켰던가, 적어도 수상한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렷다.
그는 가만히 극장 내 비밀공간, 즉 올리비아가 숨어있는 곳을 주시했다.
그녀 역시 윌포드가 데려온 병력이 수색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긴장감에 낯빛이 굳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극장의 비밀공간을 탐지하는 방법까지는 털리지 않았는지 수색에 애를 먹는 모습이었으나, 그것도 시간문제.
저들은 평소 왕궁의 비밀시설에 익숙해져 있는 자들이니 대회가 끝나기 전까지 올리비아를 찾아내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리라.
‘내가 방해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강신혁은 조용히 외부로 기운을 내보냈다.
영력이 아닌 파천기, 삼라만상과 교류하며 그에 간섭하는 만능(萬能)의 기였다.
그의 눈이 오색으로 물드는 것을 감지한 엘레노어가 안도한 기색이 되어 살며시 그에게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부탁해.”
“걱정 마.”
“지금 그, 너희들끼리만 통하는 듯한 교류, 굉장히 질투 나는데…… 나도 끼워주면 안 돼?”
“무대에나 집중해.”
강신혁이 그간 영국의 마도건축기술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괜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기운을 다루는 방식에도 그것을 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 기운만을 움직여 사물을 움직이고, 뭔가를 감추거나 드러내는 것.
그것은 파천룡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능력이었고, 강신혁은 고작 며칠 만에 그 능력을 응용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했다.
- 스아아아
그 결과, 사방으로 퍼진 파천기가 극장 안으로 스며들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왜곡을 만들어냈다.
극장에 존재하는 비밀공간 위로, 최소한 안에 있는 이들이 나오고자 하기 전까지는 야누스 정도의 능력자가 아니고서야 쉬이 찾아낼 수 없는 결계가 덮어씌워진 것이다.
그와 더불어 약간의 함정도 설치해뒀는데, 비밀공간을 수색하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포획해 이중결계 안에 가두는 술수였다.
강신혁은 그것을 자신이 해놓고도 놀라웠다.
‘이거 완전 마법 아니야?’
영국의 마도건축 정말 대단하다…… 아니, 이건 파천기가 대단한 건가.
강신혁은 그저 웃고 말았다.
이전의 황룡투기도 자기자신을 강화시키는 의미에서는 비할 데 없이 강했지만, 파천기는 문자 그대로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자기자신을 완벽히 파악하고 진화를 이룬 끝에, 삼라만상에 간섭할 권한을 얻은 힘…… 그것은 자기자신의 중심점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타자(他者)를 변화시켜, 궁극에 이르러 세상 모든 것을 뒤바꾸는 힘이다.
지금 이대로도 대단하지만 그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경악스러운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되리라.
언제까지고 황룡투기를 다루는 기분으로 파천기를 다루고 있었더라면 보물을 썩히는 꼴이 되었으리라.
‘만약 야누스와 싸웠을 때, 내가 이 정도로 파천기를 다룰 수 있었더라면.......'
그 폭발 자체를 막지는 못했더라도, 폭발의 방향성을 왜곡시키는 정도는 가능했겠지.
신은아와 게이트의 마나 동조를 끊어내, 그녀가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런 것들을 생각해봤자 그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언젠가는 그녀와 재회할 수 있으리라 믿고, 지금 자신에게 가능한 일들을 최대한 해내는 수밖에.
“음!?”
자리를 찾아 앉던 윌포드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이유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바로 방금, 윌포드가 내보낸 수색대원들이 모두 강신혁의 결계에 붙들려 갇혔기 때문이다.
그 일은 아주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어 윌포드가 감히 근원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부하들의 신호가 모두 끊겼다는 것 정도는 어떻게 알아낸 모양이었다.
“왕자 전하, 왜 그러십니까?”
월드 프라이즈의 진행 스탭 가운데 한 명이 굉장히 어려워하며 윌포드에게 말을 걸었다.
한창 열기가 오르고 있던 발표 도중 갑작스럽게 황태자와 함께 들어온 것도 모자라 크게 소리를 지르기까지.
왕자만 아니었으면 뭇매를 맞아도 시원치 않을 지경일 터, 윌포드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곤 애매한 미소와 함께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 퍼펫 마스터, 듣고 있나?
그리곤 애써 침착한 척 자리에 앉으며 강신혁에게 통신을 했다.
강신혁이 카이랄을 받아들이고 곧장 넘겨받은 통신기로, 당연히 강신혁에 의해 적절한 조치가 취해진 물건이었다.
“듣고 있습니다.”
강신혁은 여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눈치 채지 못한 듯이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 극장 안에 마족이 숨어있어. 아무래도 이 극장을 급습할 생각인 것 같아. 자네가 나서줘야겠어.
“그렇군요.”
강신혁은 애초에 세뇌에 걸리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역시나 이 세뇌 능력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만약 세뇌가 완전했다면 굳이 귀찮게 마족이라는 변명을 하지 않고 그냥 올리비아를 찾아서 죽이라고 했으면 됐을 것이다.
굳이 이렇게 돌아가는 방식을 취한 것은 세뇌에 빈틈이 있다는, 윌리엄이 올리비아를 구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증거였다.
“하지만 지금 경연이 진행 중이라 움직이기가 힘드네요.”
- 화장실이라도 다녀온다고 변명하면 되지 않겠나. 세계랭킹 1위라는 자네의 능력을 보여줬으면 해.
“흠, 그럼 그렇게 하죠.”
강신혁은 통신을 마친 후 아주 잠깐 지금부터 어떻게 행동할지를 고민했다.
윌포드의 옆에 붙어 정보를 더 얻어내는 것을 포기한 지금, 까놓고 말하면 언제 윌포드의 정체를 드러내 죽이냐는 것만이 문제인데.......
"클레어?"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응?
“지금 와줘. 모습은 감추고.”
- 바텐더 님의 귓속말 : 오케이.
직후, 강신혁의 무릎 위로 기분 좋은 중량감이 얹어졌다.
나노봇을 조종해 자신의 몸을 투명하게 보이게 만든 클레어였다.
“나 뭐하면 돼?”
“잠깐만 기다려줘, 치료 준비해주고. 내가 신호 보내면 일단 저기 있는 윌리엄 황태자부터.”
“그 옆에 있는 병신은?”
“갠 오늘 죽을 거야.”
“히, 으으응.”
중2병의 따뜻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클레어는 방금 강신혁이 한 말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뽀뽀가 하고 싶어졌다는 신호를 보냈으나 지금 투명한 상태의 그녀와 스킨십을 했다간 강신혁이 또라이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집음기를 쓰고는 있다지만 그에게 기대듯이 앉아있던 이나희와 엘레노어마저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헉 , 언니?”
“온니……."
“큰 소리 내지 마. 난 잠깐 움직일게.”
“야, 근데 슬슬 후반분데.”
확실히 앞으로 남은 팀은 고작해야 열 팀 정도였다.
하지만 강신혁은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어차피 선배 이름이 먼저 불릴 텐데 뭐. 먼저 나가서 시간 좀 끌어줘.”
“진짜 콱 덮쳐버리고 싶다.”
“뭐라고?”
“힉, 언니, 그게 아니라.”
그새 클레어의 존재를 까먹은 어리석은 존재에게 안타까운 애도를 표하며, 강신혁은 아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트 마스터리와 다크 마스터리를 조금씩 운용하면 모습을 감추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이제 [여명]도 다룰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신살검은 제 원래 주인을 더 좋아하려나.’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놀리는데, 귓가로 윌포드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그 마족은 올리비아의 행세를 하고 있어. 한마디도 들어주지 말고 확실하게 죽여 버려.
“그렇군요.”
응, 이런 식이니까 윌리엄이 세뇌를 약간이나마 벗어났던 거겠지.
정말이지 이 바보 녀석은 구제불능이구나, 강신혁은 한숨을 내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결계에 가두었던 이들을, 파천기를 조작해 한데로 끌어 모아 무력화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비밀공간 안에 숨어있던 이들을, 올리비아를 중심으로 강제로 한데 뭉쳐버렸다.
"꺅!?"
“이게 무슨,”
“전하!?”
극장의 빈 공간을 베이스로 삼아 공간확장마법으로 마련된 비밀공간.
건축 당시부터 설계된 마도결계에 의해 방음설비는 완벽했다.
강신혁은 다소 강압적인 방식 탓에 바닥을 구르고 있는 올리비아의 친위대와, 그들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려다보고 있는 올리비아 앞에 순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신은혁!”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놀라는 척은. 오늘 여기에 온 시점에서 나한테 목숨을 맡긴 셈 아녔어?”
“벌써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다면 제가 더 할 말은 없네요.”
“수색대 놈들은 일단 다 잡아놨으니까 긴장하고 있지 말고 몸이나 풀어.”
“하하, 정말 대단하네요.”
올리비아는 이전 만났을 때에 비해 한결 초췌해진 안색으로(그럼에도 품위가 남아있다는 점은 과연 왕족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를 보며 웃었다.
“어떻게, 일단 감사의 키스라도 한 번 해드려야 하나요? 솔직히 지금 마음 같아선 더한 거라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구하러 온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이래서 왕족은 안 된다니까.”
클레어에게 들켰다간 농담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강신혁은 한숨을 내쉬며 무대를 살폈다. 3등을 수상한 에비거 해머의 금발 미녀가 무척 분한 표정을 지으며 무대에서 내려오고, 이어서 2등인 이나희의 이름이 단독으로 불리는 것이 보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곧 저쪽은 알아서 정체를 드러낼 거거든.”
“그게 무슨 뜻이죠?”
“1등. 내가 만든 아티팩트.”
그제야 월드 프라이즈의 경연 무대에 시선을 돌린 올리비아가 경악하며 외쳤다.
“설마 한국에 있을 때부터 영국의 상황을 알고!?”
“아니, 앞으로를 대비해서 만든 거였는데,”
강신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원래 모든 게임은 후반부 스테이지로 가면 성속성이 짱먹잖아. 뭐 그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