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 Chapter 56. 도마뱀 꼬리 - 1 >
월드 프라이즈는 초인사회에서는 첫손에 꼽히는 대규모 행사였다.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강력한 초인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아티팩트는 국력에 영향을 끼쳤고, 죽어버리면 끝인 초인과는 달리 아티팩트의 경우 대를 이어 전승되며 꾸준히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보니 각 국가에서는 질 좋은 아티팩트의 확보를 무엇보다 중요시했다.
이전 이만우가 대야장씩이나 되는 거창한 이름으로 추앙을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고, 본인의 이름보다도 보유하고 있는 아티팩트로 위명을 날리는 초인도 있었다.
“분위기 한 번 살벌하네.”
“그럴 만도 하지, 여기서까지 습격을 허용하면 인류의 자존심은 바닥까지 털리는 셈이니까.”
월드 프라이즈가 열리는 곳은 런던 사우스켄싱턴에 위치한 극장 로얄 윌리엄 홀.
본래는 하이드 파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탁 트인 곳은 습격의 위험성이 높다고 갑작스레 장소가 변경되었다.
각국의 초인들이 월드 프라이즈를 지켜보기 위해, 그리고 인류의 자존심을 수호하기 위해 경연장을 찾았다.
당연히 출입인원도 엄격히 통제되어, 경연에 참가하는 이들을 제외하고선 소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험난한 선별을 통과한 쟁쟁한 초인들만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감히 인류 최정예 병력이 모여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상황.
경연이 시작되기까지 고작 30분 남은 지금, 극장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계세요?”
“이놈이…… 내가 이래봬도 왕년의 대야장이다, 대야장.”
본인 입으로 그 말을 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강신혁은 감탄했다.
다만 이나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만든 아티팩트 중에 제일 랭크가 높은 게 뭐라고?”
“후배 등에 업혀가는 놈이 말이 길구나.”
이나희는 이번 경연 본선에 자기 혼자 힘으로 만든 악세서리도 통과했다고 당당히 주장하려다, 결국 그것도 베이스는 강신혁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얌전해졌다.
강신혁은 조손간에 벌이는 무의미한 기 싸움을 방관하고, 자기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엘레노어에게로 돌아섰다.
그녀는 정말로 강신혁의 호위에 충실하겠다는 듯, 작게 축소한 창을 한 손에 들고 고요히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헬이 그나마 그녀의 심각한 분위기를 덜어내주었다.
“엘리, 이곳도 마도건축물이겠지?”
“그렇다고는 들었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흠, 그 정도면 됐어. 지난 며칠간 영국의 마도건축양식도 제법 눈에 익었으니까.”
그가 그동안 머물렀던 곳이 다름 아닌 영국의 왕이 머무르는 궁전이지 않은가.
아무리 복잡한 구조라고 해도, 강신혁의 특성과 영력이 있는 한 며칠씩이나 시간이 주어지면 파악을 하지 못할 수가 없다.
물론 구조를 알아냈을 뿐, 왕성에서는 카이랄과 관련된 실험시설 따위를 제외하면 건진 것이 없었다.
“비밀공간에 숨어있는 병력이 있네."
“아, 진짜? 빅벤처럼?”
"응."
강신혁은 극장의 비밀공간에 숨어있는 병력의 존재를 감지하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버킹엄 궁 내에선 아무리 찾아도 ‘그녀가’ 보이지 않기에 혹시나 했었는데, 아무래도 역시나가 들어맞은 모양이다.
그는 기감을 강화한 탓에 자신의 귓가 바로 옆에서 내는 것처럼 들려오는 긴장한 숨소리에 쓴웃음을 지으며 엘레노어에게 물었다.
“경연 장소를 바꾼 건 누구라고 했지?”
“큰아버지…… 그러니까, 윌리엄 황태자.”
제아무리 윌포드가 입김이 세다고 해도 여전히 이런 공식행사를 주관하는 것은 여왕이나 황태자의 몫인 모양이었다.
더구나 윌포드는 어디까지나 강신혁을 끌어낼 미끼로 썼을 뿐 월드 프라이즈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으니, 이 건에 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을 터.
윌리엄에게 자의식과 판단력이라는 것이 남아있었다면, 판을 짜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보내면 뒤는 어떻게 하려고? 아, 흐음, 그런가.’
결론은 금방 나왔다.
즉 일을 벌려놓고 뒤는 강신혁에게 전부 맡기겠다는 것이다.
‘하. 썩어도 왕족이라 이거지. 사람을 부리는 게 아주 수준급이야.’
윌포드 앞에선 새색시처럼 얌전했던 윌리엄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강신혁은 그저 기가 차 웃었다.
그에게 직접 따지는 건 나중에 한다 치고…… 이렇게 되면 판을 조금 다시 짜야 하는데.
강신혁은 스틱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대상은 바로 지금도 한국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 연인, 클레어였다.
[응, 왜?]
“조금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아서. 분석은 끝났어?”
그는 지난 며칠간 윌포드의 협력을 받아 확보한 카이랄 결정을, 히어로 유니버스의 선물 기능을 활용해 클레어에게 보냈다.
분석이란 그것에 대한 분석을 말하는 것이다.
[으응…… 근원은 아직 잘 모르겠어. 감염작용에 한해서라면, 대충은. 이거 근데 지금 인류의 능력으론 되돌리기 힘들겠는데. 신혁이 너처럼 처음부터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면 몰라도…….]
“그럼 클레어 능력으론?”
[당연히 가능하징.]
“역시 우리 클레어가 최고야.”
[더 칭찬해줘봐, 내 콧대 어디까지 높아지나 보게.]
강신혁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구 칭찬해주고 있자니 옆에서 새하얀 시선이 날아들었다.
엘레노어의 무기질적인 눈빛에 살짝 쫄아버린 그는 지랄을 그만두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러면 클레어, 잠시 후에 이쪽으로 와줄 수 있어? 내 쪽으로.”
[갈래!]
“오케이, 그럼 조금 있다 봐.”
[응, 빨리 보고 싶다. 자기 사랑해♥]
“나도 사랑해.”
전화를 끊자 할아버지와 배틀을 마치고 돌아온 이나희가 엘레노어 못지않게 차가운 눈으로 그를 째리며 물었다.
“꼭 다들 듣는 데서 그렇게 염병을 떨어야 해?”
“염병이라니, 작전회의지. 게다가 클레어가 요즘 힘들어해서 많이 다독여줘야 돼.”
“애처가……."
개인적으로는 클레어가 자신에게 의존해오는 것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사귀던 초기에는 자신이 너무 일방적으로 클레어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으니, 지금은 균형을 찾는 기간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나희가 입술을 삐죽이며 소리쳤다.
“아, 나도 남친 갖고 싶다! 강신혁이나 신은혁이나 인형사 같은 남친!”
“큰소리로 말하지 마, 등신아!”
“그래소?”
강신혁이 이나희와 모르는 사이인 척 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엘레노어가 마찬가지 모습으로 이나희를 모르는 척 하며 강신혁에게 물었다.
“그 비밀병력 가운데 누가 있는 고야?”
“네 언니.”
“..진짜?”
“응. 무사한 모양이네.”
“다행이다…… 고마워.”
“아니, 뭐가.”
엘레노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강신혁을 끌어안았다.
이나희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엘레노어를 밀쳐냈다.
강신혁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조금씩 거리를 두며 말했다.
“아무래도 윌리엄 황태자의 도움을 받아 여기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인 것 같아. 그리고 윌포드의 부정을 폭로하겠다…… 뭐 그런 생각이겠지.”
“큰아버지, 사실은 세뇌에 당하지 않았었구나.”
“음, 사실 사람을 완전히 뜻대로 움직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 자유의지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함정을 파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더구나 윌포드는 처음부터 행동이 띨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놈이 설령 세뇌에 성공한다 한들 제대로 대상을 컨트롤할 수야 있겠는가?
처음엔 윌포드가 일부러 이런 상황을 유도한 것인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놈에게 그럴 머리가 있었으면 강신혁에게 이렇게 어설프게 접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네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야? 당분간 협력하는 척하면서 내막을 팔 거라고 했었잖아.”
확실히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다. 다만 요 며칠간 경험한 바를 토대로 냉정히 따져보면…….
“글쎄. 이미 윌포드 개인에게서 알아낼 건 다 알아냈고, 어쩌면 이 이상 붙어있어 봤자 그놈 이상의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지도 않고......."
정확히 말하면, 뭐랄까…… 윌포드에게선 끈 떨어진 연 같은 분위기가 솔솔 풍겨왔다.
그는 카이랄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근원으로 하는지는 명확히 알지 못했고, 애초에 왜 카이랄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강신혁의 영력으로 꼼꼼히 살펴본 실험시설에서도 딱히 뭔가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윌포드는 카이랄을 확보한다느니 흡수효율을 늘린다느니 바쁘게 움직이고는 있었는데, 강신혁을 끌어들인(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뾰족한 성과를 내지도 못했다.
‘아니지, 오히려 그 새끼가 왕성하게 활동하면 할수록 허술함이 드러나는 느낌이란 말이야…….'
대표적으로는 카이랄을 공급하기 위해 유지하고 있다는 게이트.
이 게이트가 무려 SSS랭크인데다 내부의 마나밀도가 너무 높아져 있어, 만약 강신혁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언제 폭주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게이트 하나 관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 리가 없다.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
바로 기존에 요르문간드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카이랄을 만들어내고 있던 윌포드가, 어떤 일로 인해 그들과의 연결이 끊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일이 뭔지는…… 안 물어봐도 알 수 있지.’
얼마 전 있었던 요르문간드, 야누스의 습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쩌면 야누스는 이 이상 요르문간드가 지구를 유린하게 놔두면 균형이 기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인간들과 손을 잡고 시행하던 프로젝트마저 중간에 내팽개치고…… 아!
“은아의 부모.”
“응?”
“제우스 길드의 주인 말이야. 그들이 초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잖아.”
“설마…… 카이랄이라는 그게?”
“그래, 그들이 손을 잡고 있었을 확률이 높아. 더구나 그 마기, 분명히 카이랄을 흡수한 결과였을 거야.”
그들 또한 요르문간드와의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그들은 이전 있었던 습격 당시 대폭발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맞이했는데…… 만약 그것이 그들의 뜻이 아니었다면 어떻겠는가.
요르문간드가 ‘쓸모를 다한’ 인간들을 폐기한 것뿐이라면?
그렇다면 그들과 동업을 하고 있던 윌포드는 문자 그대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지 않았겠는가.
처음 그와 만나 뱀의 꼬리를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미 잘려나가 버려진 도마뱀의 꼬리였던 셈이다.
“아니, 하지만……."
강신혁은 야누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요르문간드는, 아니 야누스는 그때 한꺼번에 윌포드까지 정리하지 않았던 걸까.
아예 왕성에서 윌포드를 터트려버렸으면, 윌포드와 함께 귀찮은 왕가의 인물들까지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었을 텐데.
만약, 만약 그녀가 윌포드를 남겨놓은 데에 다른 의미가 있다면…….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차올라, 강신혁은 더는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기분 나빠졌어……? 가슴 만질래?”
“아니.”
그를 배려하는 척 정신 나간 발언을 하는 이나희를 한쪽으로 밀어낸 강신혁은 엘레노어가 센스있게 건넨 물병을 받아 내용물을 마셨다.
울렁거리던 속이 아주 약간 가라앉았다.
“고마워, 엘리.”
“응, 이 정도야.”
“아, 아아아아!"
그런데 강신혁으로부터 다시 물병을 받아들어 자신도 한 입 머금으며 배시시 웃는 엘레노어의 모습에, 별안간 이나희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엘리 너, 그거 간접키스!”
“초딩이냐!?”
“아주 여유롭네요.”
두 여자와 대화하며 긴장감이 완전히 빠져버린 그때,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신혁이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늘씬한 금발의 미녀가 서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그녀의 모습에 강신혁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나희가 오, 탄성을 내지르며 말했다.
“에비거 해머.”
“그게 뭐야?”
“있잖아, 작년에 우리랑 천지차이로 금상 탄 독일 애들. 그 작은 남자애는 안 보이네, 파트너 바꿨나봐.”
“아."
“이, 이이익……!”
그제야 납득해 고개를 끄덕이는 강신혁의 모습에, 혹시 그를 유혹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몸을 부르르 떨던 그녀가 이를 갈며 외쳤다.
“당신이 세계 랭킹 1위이건 말건, 이번엔 우리가 만든 작품이 더 대단할 겁니다!”
“아…… 응, 뭐 기대할게요.”
“그렇게 건방진 태도로 굴 수 있는 것도 지금뿐입니다!”
“아, 네.”
여자는 그 후로도 몇 마디를 더 내뱉으며 강신혁을 도발했으나 강신혁은 놀라우리만치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요르문간드니 카이랄이니 하는 문제가 산적한 지금 괜히 미녀를 상대로 플래그를 세울 여유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작년 이맘쯤이었으면 제법 불타오를 만한 격돌 이벤트였는데 말이지.
너무 관심이 없었던 나머지, 강신혁은 그녀가 독특한 악센트의 한국어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깨닫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