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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화. < Chapter 55. 카이랄 - 5 >

만찬장에 들어선 강신혁이 가장 놀란 것은 그곳에 영국 여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족히 열 명은 되어 보이는 왕족들이 (정확히는 왕족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재위 기간은 45년 정도에, 올해로 벌써 72세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영국 여왕의 외모가 고작 50대 초반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가장 놀랐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초인시대 개막 이래 영국 왕가는 핏줄에 초인을 끌어들였다고 카렌이 설명해줬었더랬지. 여왕이 초인의 피를 이었다면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반가워요, 퍼펫 마스터. 캐서린이에요. 캐시라고 불러줘요.”

그래도 그건 무리입니다, 강신혁은 속으로만 답했다.

그리고 퍼펫 마스터라고 부르지 마라.

“강신혁입니다. 그러니까…… 여왕님?”

“캐시.”

“아, 음……."

강신혁은 자신의 옆에 앉은 엘레노어에게 정말 여왕을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건지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엘레노어는 다분히 긴장한 모습으로 시선은 눈앞의 접시에 고정한 채, 테이블 밑에서 왼손을 뻗어와 그의 오른팔을 꽉 붙잡을 따름이었다.

이제 와서 무서운 건 아닐 테고, 이 만찬장에 모인 왕족들을 보며 끝없이 솟아나오는 다양한 감정들을 억누르느라 그런 것이겠지.

“후후……."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고개를 되돌리니 여왕이 강신혁과 엘레노어의 모습을 보며 작게 웃고 있었다.

대충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여왕 본인은 강신혁과 그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야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혔으면 그래야지. 여태까지 왕실에서 엘레노어를 상대로 해온 짓거리들이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가 엉뚱한 생각을 이어나가던 그때 다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쪽은 황태자 빌.”

“윌리엄입니다.”

황태자 역시 태도가 매우 정중했다.

강신혁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했다.

솔직히 히어로 유니버스의 온갖 기인들에게조차 정중한 대접을 받던 그였기에 이제 와서 지구의, 그것도 코딱지만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의 정상에게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딱히 특별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신기한 기분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아, 역시 별로 대단하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드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우리 가디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아, 네. 그 사람들도 열심히 했죠.”

이쪽은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엘레노어에게 미리 들은 바대로라면 실제 나이는 50살 언저리.

그와도 적당히 인사를 하고 그 옆을 보는데, 어째선지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올리비아는 지금 병석에 있어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올리비아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발언권이 강했던 이유는, 그녀가 젊은 나이에 강한 힘을 얻은 하이랭커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황태자의 큰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과연, 그래서 황태자의 바로 옆자리를 일부러 공석으로 놔둔 것인가, 강신혁은 납득했다.

“만약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그녀를 면회……."

“잘 부탁합니다. 윌포드입니다.”

강신혁의 모습을 본 윌리엄 황태자가 그에게 제안을 해오는 순간, 그의 말을 끊으며 테이블 너머로 자신의 손을 덥석 내미는 이가 있었으니 잿빛의 눈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그 정체는 물어볼 것도 없이 요즘 영국에서 가장 핫한 왕족인 윌포드 어쩌구저쩌구 레드레이크(이 왕가 사람들은 모두 중간에 덕지덕지 미들네임을 달고 있었지만 강신혁은 귀찮았기에 성과 이름만 기억하기로 했다.).

강신혁이 굳이 왕실의 초대를 받은 자아 큰 이유, 오늘의 타깃이었다.

"아, 그때 초인들을 남겨두고 도망쳤다던?”

강신혁은 그를 살짝 시험해보기로 했다. 악수에 응하지 않고 일부러 도발적인 언사를 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껄껄, 호쾌한 척 웃는 것이 아닌가.

“도망치다뇨, 이거 오해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올리비아와는 다른 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거든요. 올리비아 휘하에서 전투를 벌였던 이들도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설마 이 말 한 마디로 그걸 넘어간다고? 강신혁이 아프리카에서 그렇게 활약했던 걸 알면서?

강신혁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누구도 모르게 주위를 훑었다. 다른 왕족들은 물론이고 여왕과 황태자도 거기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특히 황태자가 이상하다. 다른 이는 몰라도 황태자는 올리비아의 친아버지인 것이다.

“호, 그랬어요? 듣던 것과는 다르네요.”

“하하, 오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당시 상황이 워낙 급하지 않았습니까.”

“그도 그렇죠. 하하.”

당시 올리비아 공주의 휘하에서 전투를 벌이던 이들은 하나같이 이 자식을 씹어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대담하게 뻥카를 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을 다 매수했거나 죽였다는 얘긴데 죽였으면 이미 들켰을 테니 아마 매수가 맞겠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그 많은 인원의 요구사항을 전부 충족시켜주어 입을 막았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외의 다른 수단은, 지금으로선 망상에 불과하지만…… 예를 들어 세뇌라든가.’

세뇌계열 능력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다.

단, 몬스터 중에는 드물게 그런 개체가 있다. 고등급이 되면 그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초인의 등급이 높아질수록 정신내성 방어구가 필수로 꼽히는데,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직은 억측에 불과하니 당장 결론을 내는 건 무리지만…….

‘여왕과 황태자의 상황을 보면 더 수상해진단 말이지…….'

황태자의 말을 끊고 억지로 난입한 셈인데도 불구하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

올리비아(그리고 엘레노어)를 제외한 왕족 가운데 가장 강해 하이랭커로까지 성장한 왕위 계승 후보라고는 해도, 지나치게 발언권이 높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강신혁이 그의 악수 요청을 무시했음에도 그가 손을 내민 채 그대로라는 점.

‘이 정도면…… 거의 백프로네.’

죽었다 깨어나도 그와 악수를 해야만 하겠다는 듯한 굳건한 의지에, 강신혁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자신을 되레 꽉 붙잡는 엘레노어의 손을 떼어내고 그와 악수를 나눴다.

“잘 부탁합니다. 아마 앞으로 볼 일이 많을 것 같군요.”

“네, 뭐, 잘 부탁해요.”

목소리와 함께 윌포드에게서 뻗어 나오는 은밀하고 더러운 기운을 강신혁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렇게나 악수에 집착할 정도면 악수를 통해 상대방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한다는 것 정도 알아내지 못하는 쪽이 이상하다.

‘물론 이 정도 기운은 영력까지 갈 것도 없이 라이트 마스터리 선에서 컷이긴 한데.’

최초에 지니고 있던 기운이 영력이어서일까, 강신혁은 신체를 강화시키는 능력보다도 정신에 관계되는 능력을 많이 가지고 있다.

영력도 물론 그렇고, 그의 신체를 수호하고 강화하는 파천기도 빠지지 않는다.

그 외에 윈드 마스터리에서 다른 영역의 힘으로 진화해버린 호풍환우 역시 외부의 에너지에 대한 간섭 능력이 뛰어나고, 라이트 마스터리에 이르러선 부정적인 기운 그 자체를 거부하거나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다.

야누스 정도의 역량이 있는 적이라해도 정신능력으로 강신혁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몬스터의 능력을 따라할 뿐인 병신이 그의 정신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바로 기운을 지우는 건 재미없지. 일단 추이를 볼까.’

우스운 건 강신혁의 손을 맞잡은 순간 윌포드의 얼굴에 번져나가는 ‘계획대로다!’라는 듯한 표정.

아니 바본가, 이 새끼는? 세계랭킹 1위를 상대로 이런 수작을 거는 것도 웃긴데 그걸 얼굴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다니, 다른 이에게 낌새를 채일 우려는 하지도 않는 건가?

“형님, 저도 인형사와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아, 그래. 이쪽은 제 동생입니다.”

“흐음, 네에. 잘 부탁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른 왕족들은 물론이고 시중을 드는 사람들 중 아무도 그의 표정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전원 세뇌 완료라는 얘기다.

당연히 강신혁 측 인사에게는 손을 대지 못했겠지만, 애초에 이들은 강신혁을 걱정하지를 않는다. 너무하지 않은가.

‘그럼 어쩔까.’

왕족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며 은밀히 영력으로 탐사해, 그들의 체내에 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마기’가 깃들어있는 것을 확인한 강신혁은 가만히 생각했다.

‘죽일까?’

- 참으세요, 마스터.

‘여태 잠잠하다가 이럴 때만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개그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거 반대.’

- 관리자는 언제나 회원님의 기분을 배려하고 싶을 뿐입니다. 1,000,000HP 보너스!

강신혁은 노골적으로 아양을 떠는 관리자를 일단 무시하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보통 세뇌는 시전자를 죽이면 자동으로 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저 새끼를 죽여 버려도 괜찮겠지만, 문제는 이 우스운 인형극의 주동자가 눈앞의 바보가 아닐 경우.

그러면 세뇌는 풀리지 않을 것이고, 여왕이고 황태자고 강신혁을 왕족시해범으로 몰아 난처하게 만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강신혁도 부득이 영국 왕실을 여기서 끝장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엘레노어가 슬퍼할 테니 이 방법은 별로 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역시 아닐 거야. 이렇게 노골적인 방법으로 나를 세뇌하려 들 리가 없지. 뭣보다 요르문간드가 연결되어 있을 경우…… 이 마기를 보아하니 이미 확실하지만, 지금 요르문간드에 속해있는 야누스로부터 내 능력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이런 짓으로 날 세뇌할 수 있으리라 믿지는 않을 거야.’

즉 윌포드라는 작자는 우습게도 강신혁을 ‘시험’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게? 라는 생각도 들지만, 아마 본인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진짜는 이놈이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니었으면 좋겠다…….

강신혁은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윌포드가 그에게 재차 말을 걸어왔다.

“만찬이 끝나고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주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만.”

“월드 프라이즈에 대한 얘기인가요?”

“하하, 물론 아닙니다. 월드 프라이즈라고 해봤자 던전에서 출토되는 유물에 비하면 고작 장난감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하찮은 것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세계랭킹 1위의 초인을 초대했을 리가 없지요.”

이 말인즉슨, 강신혁이 월드 프라이즈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영국 왕실은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우습다. 이것을 미끼로 사용해 강신혁을 영국으로 불러들인 주제에, 잘도 그렇게 능청을 부리다니.

강신혁과 윌포드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기분 탓인지 엘레노어가 그의 손을 잡는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본격적으로 음식들이 날라져 왔다. 다행히 정어리 파이는 없었다.

“아야.”

엘레노어가 그의 손을 꼬집었다.

“방금 또 무시해쏘.”

“어떻게 알았대.”

“다 알아!”

부득이 강신혁의 옆에 앉지 못한 이나희는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것을 보며 이를 부득 가는 반면, 여왕을 비롯한 왕족들은 그 광경을 보고 그저 재밌다는 듯이 조금씩 웃을 뿐이었다.

엄연히 왕족인 엘레노어를 아예 인지하지도 못했다는 듯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너무 소름끼쳤다.

어쩌면 사태는 강신혁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 만찬장에 감도는 기이하고 불편한 안정감 속에서, 고작 세뇌 따위가 아닌 훨씬 무시무시한 뭔가의 편린을 맛보았다.

‘응, 완전히 맛이 갔네.’

하지만 눈앞에 차례차례 놓이는 요리는 결코 맛이 가지 않았다.

대체 누가 영국요리가 맛없다고 했는가! 분명 그는 왕실에서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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