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 Chapter 55. 카이랄 - 4 >
기사에게서 추가로 정보를 얻어내지 못한 엘레노어는 급한 대로 영국의 뉴스나 인터넷 신문 따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강신혁은 일단 영력으로 방을 꼼꼼히 훑어, 도청기나 카메라를 비롯해 방에 걸려있는 마법을 탐사했다.
“와, 이게 넘치도록 나오네.”
“벼, 변태새끼들. 그렇게나 후배의 불륜 스캔들을 확보하고 싶었던 거야?”
"응?"
카메라며 도청기, 은밀히 설치된 마법진 따위를 보며 이나희가 기겁하여 중얼거렸다.
"?"
"?"
그 말에 모종의 의도를 느낀 강신혁이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녀는 능청스레 그와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추궁할 수도 있었지만 괜히 더 귀찮아질 것 같아 포기한 강신혁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올렸다. 오색찬란한 파천기가 거기 깃들어, 순식간에 그의 손을 신기에 가까운 수준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럼 부숴둘까.”
“아, 잠깐만.”
“왜?”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나희의 손이 푸르게 빛났다. 그녀의 특성 , 발아의 룬을 발동할 때의 특징이었다.
원래는 그것으로 자신과 파티원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상승시키거나, 아이템에 일시/영구적인 효과를 부여할 수 있는데…….
그녀는 그것으로 어째선지 마법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카메라를 붙잡고 있었다.
“뭐하려는 건데?”
“언니한테 배운 마력코딩을 좀 시험해볼까 해서.”
“마력 기반 프로그래밍 말하는 건가?”
“응응, 그거.”
하긴 이나희의 룬 능력은 사물에 간섭, 조작하는 데 클레어의 연금술만큼이나(어쩌면 그 이상으로) 탁월하고, 그것은 아티팩트와 일반 사물, 기계를 가리지 않는다.
애초에 마력 기반 프로그래밍이 시작된 것도 인챈터들의 착상에 의해서였으니, 클레어가 작정하고 이나희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강신혁이 이나희에게 나노봇을 나눠주려고 생각한 것도 그래서가 아니었던가.
신영에 들어온 이래 클레어는 일반 수업에 참가하는 일은 당연히 없지만, 꾸준히 시간을 내어 이나희를 가르치고 있었다.
“자, 그러면 이렇게……."
클레어에게 듣기론 일반적인 프로그래밍과 다른 점이라곤 컴퓨터를 통하지 않고 코딩하는 점뿐이라고 했었는데, 이나희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카메라에 복잡하게 마나의 실을 흘려 넣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저게 대체 무슨 프로그래밍이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예전 클레어가 작업하는 광경을 보고도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으니, 과연 이나희는 스승의 기술을 아주 잘 배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때, 좀 클레어 언니 같애?”
"응."
그런 그의 생각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작업 중에 이나희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조오아.”
그의 긍정에 어째선지 한층 기운이 난 모습으로 작업에 돌아가는 이나희.
대충 그녀가 하는 생각은 알겠지만 착안점은 한참 어긋난 것 같은데, 지적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아, 올리비아 언니가……."
“중병으로 앓아눕기라도 했대?”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괜찮은데.”
“그런 거였으면 괜찮은 거구나.”
당황하며 달려온 엘레노어가 스틱을 조작해 허공에 작은 홀로그램을 띄웠다.
그것은 무려 세 달 가까이 전에, 황태자의 큰딸 올리비아 시어도라 알렉시스가 사고를 당해 입원했다는 내용이었다.
“응? 으으응?"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언니가 후계 경쟁에서 밀렸지? 설령 경쟁에서 밀렸다고 해도 왕족을 이렇게 난폭하게 취급한 역사는 없어......."
엘레노어의 동공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기사를 본문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은 명백해 보여, 강신혁은 일단 그녀에게 태클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사고라잖아.”
“사고일 리가 없어. 언니 본인이 상당한 수준의 초인인데다 호위대도 항상 대동하는데……. 더구나 이 뉴스가 크게 퍼지지 않았다는 점이 뭣보다 수상해.”
그렇구나, 그 말에 강신혁은 절로 납득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야 물론 영국의 국왕도 아닌 왕족이 무슨 일을 당하건 일반인이 알 바는 아니나, 올리비아는 유력한 차기 여왕 후보였고 당연히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사고를 당했다면 최소한 영국 왕실에 적을 두고 있는 엘레노어는, 하다못해 그녀의 호위이면서 영국 귀족 신분이기도 한 카렌 정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꽁꽁 숨겨졌어. 이 뉴스도 간신히 찾아낸 거야. 이 날을 기점으로 영국 모든 미디어가 올리비아 언니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면서……
“자제하면서?”
“윌포드 오빠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이 늘어나기 시작했어.”
“참고로 윌포드란?”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던, 큰 오빠.”
강신혁도 그 말에 떠올려냈다.
분명 몬스터 웨이브와 조우하자마자 올리비아와 그녀를 따르는 초인들을 내버려두고 냅다 줄행랑을 쳤다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엘레노어 역시 그 일을 두고 ‘이제 저 사람은 끝났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프리카에서 보인 추태로 그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올리비아의 권위가 굳건해질 것이라고…….
“그런데 그게 이렇게 됐다고.”
“이상한 점밖에 없어. 아프리카에서의 그 일, 전혀 알려져 있지도 않고……."
전형적인 언론 플레이가 아닌가.
엘레노어의 예상으로는 그 윌포드라는 사람의 약점을 확실하게 잡은 올리비아가 후계 구도를 확실히 했어야 하는데, 어째선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윌포드가 아프리카에서 저질렀던 만행은 묻혀, 오히려 권력구도가 완전히 그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음…… 이런 말은 조심스럽지만. 올리비아라는 사람, 어쩌면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그럴 가능성도 이쏘.”
엘레노어가 이를 빠득 갈았다.
원수처럼 싫어했던 언니지만 혈족에게 비겁한 수를 당해 이 꼴이 나기를 바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녀 역시 이런 꼴이 나는 것을 두려워해 일찍이 왕위계승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한국으로 도망치다시피 한 것이지만…….
“더러운 짓, 용서할 수 없어.”
사람이란 간사한 법이다. 자신에게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힘이 생기고 나니, 이상하게도 시야가 쓸데없이 넓어져 이전엔 보고도 무시했던 것들을 가만히 보아 넘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꼰대라고도 하고 오지랖이라고도 하지만 지금 엘레노어에게 그 말을 할 용기는 없었던 강신혁은 얌전히 있었다.
그가 얌전히 있었던 이유는 그 외에도 있었는데, 어쩌면 그 윌포드라는 작자가 다른 일과도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작년의 아티팩트 경연 당시의 요르문간드 습격이라든가.
“야, 근데 그거 이상하지 않아?”
그 사이 작업을 마치고 온 이나희가 어깨를 맞대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강신혁이 힐끗 돌아보니 모든 도청장치며 마법진 따위가 활발하게…… 아니 지나치게 마력을 뿜어내며 미친 듯이 작동하는 모습. 대충 시험이 끝난 날 학교에서 뛰쳐나가는 고딩들 같았다.
“저거 괜찮아?”
“응? 아, 대충 더미 데이터가 흘러가도록 해놨어. 그러니까 밤에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괜찮아♥"
“그런 것보다.”
“그런 것보다!?”
요염한 표정을 짓고 일부러 자극적인 언사를 하는 이나희에게 강신혁이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무시……."
“나희, 말해. 빨리.”
“아, 아야, 아야야.”
엘레노어가 자신과 강신혁의 사이로 억지로 끼어드는 이나희의 뺨을 쿡쿡 찌르며 말을 재촉했다. 게 볼그의 힘이 담긴 찌르기에 이나희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사고가 난 게 세 달 전이라며.”
“이 뉴스를 믿는다면, 웅.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전일 수도 이쏘. 아프리카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러면 3월 달에 대대적으로 났던 네 정체 까발리는 기사, 그것도 윌포드라는 양반 짓인가?”
“아……."
실로 예리한 지적이었다. 강신혁은 그저 올리비아가 강신혁의 경고를 무시하고 개수작을 부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 그래.”
엘레노어가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고, 날 영국에서 완전히 쫓아내려고 한 건지도 몰라.”
“자세히 말해줄래?”
“그 시점에서 윌포드가 나랑 신혁의 정체를 몰랐다는 전제로 얘기할게.”
이젠 오빠라는 말도 빠지고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입수한 건 나랑 신혁이 사이좋게 지내는 사진뿐이야. 우리 다 학교에서는 유명한 사람이지만, 솔직히 영국 입장에서 언론을 이용해서까지 데려올 가치는 없어.”
“음…… 그럴 수도 있지.”
엘레노어가 영국 왕실의 직계임을 감안한다면, 그녀와 왕위를 두고 경쟁하는 입장에서 그녀의 능력 하나만 보고 영국으로 데려온다는 선택은 사실 있을 수 없다.
탑 랭커쯤이나 된다면 왕실 입장에서도 국민의 눈치가 보일 테니 그녀를 데려오지 않을 수 없겠지만, 아무튼 그 시점에서 엘레노어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올리비아는 둘에게 권력과 명예를 약속하며 끌어들이려 했지만, 만약 그녀의 진짜 능력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그 수작을 부린 것이었다면…….
“그건 나랑 신혁을 영국으로 데려오려는 수작이 아니라, 내가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하려 한다고 선전한 거여쏘……."
말을 하다 말고 급격히 부끄러워졌는지 언제나처럼 혀를 씹는 엘레노어.
강신혁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몇 달 전 보도를 떠올렸다.
분명 영국 왕실은 그녀와 일반인의 결합을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했지.
강신혁은 그것이 영락없이 올리비아의 수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엘레노어를 일반인의 입지로 떨어트리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이 가네.”
“확실히, 후배가 이렇게 개쩌는 능력자인 걸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이 높네.”
“그러면 이번에 있었던 소환령은? 엘레노어가 탑 랭커인 게 밝혀져 데려오려고 한 건가? 하지만 잠깐만, 소환령 자체는 마스크드 바커스 멤버를 밝히기 전에 떨어지지 않았나?”
“의도가 반대야.”
엘레노어는 드물게도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하더니 또다시 화상을 띄웠다.
몇 번인가 검색하더니 정식 신문사도 아닌 삼류 사이트의 기사 화면이 나타났다.
“한국 유학 중인 엘레노어 로잘린 레드레이크, 소환령 거부…… 한국인으로 남을 의사를 밝혀. 아하.”
“응. 일부러 내가 소환령을 거부하도록 유도해서, 그 사실을 과장되게 홍보해서…… 다시는 나를 영국에 들이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실제로 엘레노어가 소환령을 거부한 직후, 영국 언론은 그와 관련된 기사로 도배되었다.
다만, 다만 우습게도 영국의 의도를 읽지 못한 엘레노어는 곧장 강신혁에게 도움 요청을 했고, 그는 그것이 좋은 기회라 여겨 자신과 엘레노어를 포함한 마스크드 바커스 전원의 신분을 밝혔다.
수수께끼의 탑 랭커 6위 R의 정체가 엘레노어 로잘린 레드레이크임이 밝혀졌으니, 영국 왕실 입장에서 그녀를 내쳤다는 사실이 크게 홍보되면 이 얼마나 큰 수치이겠는가?
당연히 왕실은 방방곡곡으로 뿌려댔던 기사들을 허겁지겁 수거했고…… 엘레노어가 튼 화면은 미처 수거하지 못한 쓰레기 기사의 파편에 불과했다.
“그러면, 왕실은 원래 철저하게 엘리를 거절할 셈이었던 거네.”
“응. ……내 쪽에서도 그래주는 쪽이 고마운 일이야.”
더욱이 왕실에서 강신혁을 궁으로 초대한 이유도 조금 납득이 갔다.
왕실 입장에서는 몇 달 전 강신혁의 사생활을 까발리며 그의 초상권을 인정사정없이 짓밟았다.
당시엔 그저 학교에서 뛰어난 존재일 뿐 일반인에 불과한 강신혁을 무시하고 행한 처사였으나, 강신혁이 사실 국제초인랭킹 1위임이 드러난 지금은 그 사실이 지레 찔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그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왕궁으로의 초대인 셈이다.
그 과정에서 함께 따라온 엘레노어에 대한 취급은 역시나 이상하지만, 그것도 이 몇 달간 영국 안에서 널뛰기했던 엘레노어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병신들이네.”
“응, 병신들이네……."
- 똑똑
비로소 입장이 정리된 바로 그 타이밍에, 귀신 같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만찬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까 그 남자 기사의 목소리였다.
강신혁은 일행과 미묘한 시선을 교환하고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별 생각 없이 온 왕궁에서 벌써부터 재밌는 일들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