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 Chapter 55. 카이랄 - 3 >
강신혁과 엘레노어가 영국에 입국하는 시점에서, 왕실이 그들을 무시하는 선택지는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여태까지 한껏 둘을 가지고 언론에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것도 그렇고, 이제 와서 그들의 존재를 모른 척 하면 오히려 대중이 의심하지 않겠는가.
설령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생겼다고 해도, 겉으로는 여전히 영국 왕실이 강신혁, 엘레노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아무리 무례하게 나가도, 그 상황에서 칼을 뽑아들거나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대담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특히 아까 그거, 체크인이니 뭐니 하는 거.”
템즈 강을 따라 걷는 길, 문득 이나희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왕실 상대로, 안 쫄렸어?”
“걱정 마. 무슨 일이 생기든 지켜줄 테니까.”
더러운 강이나 저 멀리 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탑 따위를 일별하며 강신혁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든 이나희가 자신의 스틱을 조작하며 말했다.
“……녹음, 녹음할 테니까 방금 그거 다시 한 번만.”
“셔럽."
“그런데 말이다. 정말 괜찮은 거냐? 너희한테 들은 대로라면 아무래도 호랑이 입 안에 들어가는 꼴인데.”
까놓고 말해 이번 건에 관해선 무관계나 다름없는 이만우가, 말하는 내용과는 달리 굉장히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본인도 그 호랑이 입 속에 같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분명히 이해하고 있겠지. 전투계 초인은 아니지만 이 양반도 짬이 만만하지는 않다.
“우리가 영국으로 날아온 시점에서 이미 주목을 피할 방법은 없어요. 더구나 왕실 쪽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는 것도 확신할 수 있고. 그렇다면 저쪽에서 덮쳐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관찰하는 게 낫겠죠. 적당히 연기해가면서.”
그런 의미에서 아까 강신혁의 왕실기사(아마도 기사가 맞을 것이다.)에 대한 대응은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인은 어떻든 왕실은 강신혁과 엘레노어가 왕실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그들을 속이려거든 이제 와서 왕실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보다, ‘싫어하지만 그래도 거부하지는 않는’ 수준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연기하면서 저들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염탐하는 거죠.”
“꼭 007이라도 찍고 있는 것 같구나. 마티니, 젓지 않고 흔들-”
“그거 저번에 바에 찾아온 손님한테 들었어요.”
바라는 말이 강신혁의 입에서 나오자, 이만우의 눈빛이 조금 예리해졌다. 강신혁은 그 순간 직감했다. 이 할아버지, 애주가다.
"호오, 혹시 오늘밤에 부탁해도 되나?”
“할아버지, 지금 고딩한테 무슨 부탁을 하는 거야?”
“뭐 어떠냐, 손녀야. 술을 권한 것도 아니고 칵테일을 만들어달라는 건데.”
“그게 더 나빠!”
하지만 이만우가 기대하는 것처럼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강신혁의 능력이나 그가 갖고 있는 아티팩트들은 007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아마도 클레어나 신은아, 그것을 만드는 데 협력한 이나희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도 모를 만큼 뛰어나니까.
강신혁은 이번에 만들어둔 스파이 장치들을 재차 점검하며 고개를 들었다.
건물의 일부가 불타고 재건공사 중인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웨스트민스터 궁, 절반도 안 남았네.”
“빅벤이 무사한 게 기적이라고 봐.”
웨스트민스터 궁은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에 손꼽히는 만큼 요르문간드와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털리는 곳이기도 했다.
처음엔 영국 초인협회를 빅벤 내부에 공간확장마법을 걸어 설치했었는데, 수십 년 전 대역류로 무지막지한 양의 몬스터가 출몰해 모조리 웨스트민스터 궁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놈들을 가까스로 물리친 이후 초인협회를 독립시켰다는 비사가 있다.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비밀부대가 안에 이쏘."
엘레노어가 언제나처럼 혀를 깨물며 말했다.
강신혁은 최근 깨달은 것이 있는데 바로 그녀와 자신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가 혀를 깨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아, 그런 설정 로망 넘치지.”
“진짜로 이쏘.”
순간 강신혁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산책로를 걸을수록 점점 가까이 보이는 빅벤을 째려보며 영력을 운용했다.
그러자 정말로 숨겨진 공간이 존재하고, 그 안에 살아있는 인간이 수백 명이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 안에 사람이 숨어있다는 것보다도, 영력을 운용하는 자신 정도가 아니면 쉽게 깨달을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감춰진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사실 영국 초인을 만만하게 봤었는데, 영국의 마도는 더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거 기밀 아냐?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구나.”
“신혁한테는 다 말해줄 수 있어, 다.”
“오케이, 거기까지.”
엘레노어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이나희가 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떼어냈다.
그대로 노려보기 한판승부에 들어가는 둘. 솔직히 강신혁은 자신이 귀찮아지지 않는다면 어찌되든 좋았다.
“자, 그러면 피쉬앤칩스라도 먹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해볼까요.”
“영국요리, 얕보고 있지.”
“어떻게 알았지……!?”
하지만 엘레노어가 안내한 카페의 홍차와 케이크가 맛있었기에 솔직히 사과해두기로 했다. 저녁은 아마 궁에서 대접을 받게 될 것 같았기에 그들은 그쯤에서 적당히 관광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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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어 일행은 엘레노어의 안내를 받아 버킹엄 궁으로 향했다.
영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주소를 달라고 했으니 얼마나 그 기사가 황당해했을까. 물론 놀리려고 일부러 했던 것이지만.
“흠, 확실히 여기도.”
버킹엄 궁이라고 해도, 대역류 이전과 이후로 그 모습은 크게 바뀌었다.
일단 대정원이 크게 줄어들었고, 대신 로열 가디언이라는 이름의 궁이 새로 생겼다. 당연하지만 왕실 호위 병력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왜 레드레이크 궁이라고 개명을 안 한 거지?”
아까 만났던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남자와 재회해, 그의 안내를 받아 궁의 북쪽에 있는 거대한 건물 안으로 진입했을 때 문득 이나희가 그런 말을 했다.
남자는 한순간만 흰 눈으로 그녀를 돌아봤지만 이나희의 미모 탓인지 큼, 헛기침만 한 번 내뱉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서 그런 질문 하지 마, 무식해 보이니까.”
“사실, 이름을 바꿔버려도 괜찮을지도 몰라.”
이나희의 말에 강신혁이 핀잔을 주고 있는데(사실 강신혁도 잘은 몰랐다.), 엘레노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웨스트민스터 궁도 그렇지만 여기도 많이 무너졌으니까……. 지금은 멀쩡해 보이지만, 대부분 새로 지은 거나 마찬가지.”
"맞아맞아, 별로 실용적이지도 않은데 옛날 모습 그대로 복구한 거지?”
"원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럴듯한 형태에 집착하는 법이라고.”
한숨을 내쉬며 이나희에게 대꾸한 강신혁이 엘레노어를 돌아보며 물었다.
“엘리도 원래 여기 살았어?”
“아니. 왕족이라고 전부 여기에 머무르는 건 아냐. 특히 나는…… 그랬다간 숨 막혀서 죽었을 거야.”
“방은 있지만.”
“방은 있구나.”
얘기를 듣자하니, 초인시대의 개막 이래 영국 왕실도 이래저래 많이 바뀌었다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 최정예 병력이 가디언이라는 이름으로 궁내에 머무르고 있으니, 안전을 위해서라면 대부분 모여 있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물론 엘레노어처럼 왕실에 미운털이 박힌 경우는 가디언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해도 자유로운 바깥을 택하겠지만, 런던의 2차 대역류가 아무래도 지독했던 모양으로, 그 이후로 궁전 바깥으로 나오지 않게 된 사람도 있다는 모양이었다.
뭣보다 크게 바뀐 점은 궁전 외부는 몰라도 궁전 내부는 민간인을 아예 받지 않게 된 것.
그나마 신분이 높거나 랭크가 높은 초인 따위를 접대할 때 손님용 궁전으로 받는 수준이고, 평소 왕족이 머무르는 건물에는 어지간한 신분이 아니면 발도 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히키코모리잖아……."
“한심해라. 그만큼 가디언을 믿고 있다는 건가?”
“영국 왕실은 강한 초인을 모집하는 데 혈안이 되어이쏘. 그리고 그중에서도 정예가 로열 가디언이고……."
“보이드 테일러도?”
"응."
이전 올리비아라는 공주가 강신혁을 대했던 태도만 봐도 명확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 여러 가지로 수작을 부려온 것도 그렇고, 영국 왕실의 초인에 대한 태도는 집착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일그러져 있구만.”
“지킬 게 많으면 그렇게 되는 거지.”
“여전히 애늙은이 같구나.”
강신혁은 이만우의 말에 그저 머쓱하니 웃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걷던 엘레노어가 어라? 하더니 갑자기 발을 멈추었다.
“익숙해서 잊어먹고 있었어……. 여기, 손님용 궁전 아닌데. 왕족용.”
“……맞습니다.”
앞서 걷던 남자가 엘레노어의 목소리를 듣고는 뒤돌아보며 대꾸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영국 공주 취급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상했다. 그녀의 강함을 알고 있는 이상 영국은 어떻게 알랑방귀를 뀌어서라도 그녀를 왕실인사로 되돌리고 싶어할 텐데.
그런데 어째서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척 하는 거지?
“강신혁 초인은 영국 왕실에 무척 중요한 손님이시기에, 평소 왕족이 머무르는 곳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음...... 음?"
“그래요? 그거 고마운 일이네.”
어쩌면 벌써 뭔가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강신혁은 전혀 이상한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척 대꾸했다.
“왕족이 머무르는 곳.”
“그렇습니다. 단언컨대 이 영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숙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직하네요. 예약했던 호텔을 취소하길 잘했네.”
"......."
좌우지간 건물은 더럽게 컸고 복도도 넓었다.
강신혁은 이 건물 전체에 공간확장마법이 걸려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건 신영도 마찬가지였기에 굳이 촌티를 내며 아는 척하지 않았다.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아까 강변에서 보았던 빅벤의 내부 구조도.
영국의 마도건축양식은 정말로 이계의 그것이 부럽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초인전력은 솔직히 강대국치고는 많이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곳입니다.”
남자가 멈추었다. 아무리 그래도 왕족들과 같은 공간을 쓰게 하지는 않겠지 싶었는데, 기우였다.
각 구간에 보호마법이 걸려있어, 일단 공용 복도로 나오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못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강신혁과 이만우, 이나희와 엘레노어가 각각 다른 방을 배정받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다시 무지막지하게 넓은 공간이 나오고, 심지어 침실도 각 방에 세 개씩이나 딸려 있었다.
“부디 편안한 휴식 되시길. 저녁 만찬 시간이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폐하께서도 무척 기대하고 계십니다.”
한 나라의 군주를 기대하게 할 만큼 우리가 대단했던가, 생각하다가 강신혁은 문득 자신이 세계랭킹 1위가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씁쓸하게 웃었다.
그야 확실히, 각국의 군주들을 대기시킬 만한 위치가 맞기는 맞았다.
“야, 이거 우리 같은 방 써도 되는 거 아냐?”
“남녀가 유별한데.”
“……후배, 우리 방으로 올래?”
이나희가 (제 딴에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할아버지 보는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 생각하며 이만우에게도 뭐라 말해달라고 고개를 돌리는데, 놀랍게도 이만우가 혼자 옆방 문을 닫고 들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엘리, 너도 괜찮지?”
“잠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러나 엘레노어는 그들이 아닌 남자 기사를 불러 세우고 있었다.
그들을 안내한 후 그대로 돌아가려던 남자는 정중히 돌아서며 그녀에게 용건을 물었다.
“말씀하시죠.”
“만찬 전에, 잠시 올리비아 언니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질문에 그는 아주 잠깐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이윽고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올리비아 공주님과는 현재 면회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면회?”
“그러면 이만.”
그는 답을 주지 않고 그곳에서 사라졌다. 엘레노어는 그를 붙잡으려다가 포기하고 돌아섰다.
강신혁 역시 그 모습을 보며 눈을 치켜떴다.
“……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