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그인하자마자 VIP-301화 (301/345)

301화. < Chapter 55. 카이랄 - 2 >

영국 런던으로 출발하는 날.

강신혁은 자신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엘레노어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진짜 갈 거야?”

“응. 안 떨어질 거야.”

영국 왕실의 귀환령을 단호하게 거부했던 주제에 강신혁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함께 가겠다고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 교내 커뮤니티에서는 강신혁의 정체 발각 이후 조금씩 사그라지던 양다리 의혹이 다시 급부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신혁 입장에서는 사실 엘레노어가 같이 가주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이나희를 견제해줄 좋은 수단이 되어줄 수 있었으니까!

“엘리는 그냥 여기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괜히 엘리 때문에 더 사건이 많이 생기는 것 아닐까 모르겠네.”

“사건은 어차피 발생할 고야. 그렇다면 내가 가는 게 나아. 덤으로 신혁한테 꼬이는 날파리도 치울 수 있고.”

“옛날에 어떤 철학자가 그랬는데, 너 자신을 알라고……."

“나희가 꼭 명심해야 할 말이네.”

학교를 출발하기도 전부터 기 싸움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강신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자기, 잘 다녀와.”

“그래…… 아.”

그래도 그동안은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쓴다고 학교 안에서 눈에 띄는 스킨십을 하지 않았던 클레어가,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는 두 사람에게 보란 듯이 강신혁과 진한 입맞춤을 나눈 것이다.

“아."

“아, 아아아!”

“언니!"

두 여자는 물론이고 월드 프라이즈에 참가하는 이들을 배웅하러 나온 교직원과 학생들 전원이 일제히 얼어붙는 가운데, 클레어가 그의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가만히 가져다대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지금 입술에 자물쇠 잠갔어. 다른 여자랑은 이런 거 못하도록.”

“응, 뭐 그 부분은 믿어줘.”

강신혁은 그녀의 손을 맞잡아주며 대꾸했다.

그에 클레어는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신은아가 사라지고부터 아주 조금, 클레어는 집착이 심해졌다.

절친한 친구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으니, 그녀의 빈자리를 강신혁으로 메꾸려고 무의식중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강신혁은 주제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원래가 지나치게 여유로웠고 지금 이 정도로 까다롭게 구는 건 귀여운 수준이라고 생각했기에, 강신혁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에 꺼내 연인을 상처 입히지 않기로 했다.

그러는 옆에서 당사자도 아닌 이나희가 뺨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클레어한테 따졌다.

“다들 보는 앞에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욧, 언니!”

“누가 보면 이상한 짓이라도 한 줄 알겠네. 여기가 초등학교니? 잘 다녀오라는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강신혁만이 알아볼 수 있던 희미한 불안감은 깨끗이 날아간 새침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클레어. 이나희는 그녀의 여유작작한 모습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게 그냥 인사에요? 그럼 나도 하면 안 되나? 후배랑 아침저녁으로다가……."

“그냥 인사는 아니지, 사귀니까 할 수 있는 인사지. 넌 아니잖니, 나희야.”

“그리고 나희, 작년에 파리에서 사귀지도 않으면서 축복이랍시고 신혁한테……."

“깍! 까아아악! 안 들려!”

“……뭐냐 저거, 소설인가 만화인가 그런 거냐?”

“폭발해라……! 제발 폭발해주세요!”

일행은 아침부터 한창 요란을 떨고서야 간신히 출발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학교에 새로이 마련된 비행장에서 직접 경비행기를 타고 히스로 공항으로 직행하게 되었다.

“오, 제법 큰데?”

“괜찮구만.”

“학교에 비행장이 있다는 것도 웃기네요.”

“시대의 흐름인 거지. 아마 네 영향이 크겠지만 말이다.”

“할아버지, 들어가자. 나 피곤해.”

“오냐.”

신영에 비행장이 생긴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 요르문간드 습격사건으로 각국의 초인 인력이 줄어든 탓에 항로 정비 작업이 곤란해져, 항공기 운항이 종전의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항공권을 구하는 것도 시간대를 조절하는 것도 까다로워져, 신영과 같은 거대기관의 경우 차라리 독자적으로 항공기와 호위대를 운용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 것이다.

물론 신영에 신설된 비행장과 비행기에도 정부와 여러 기업의 지원이 있었다.

개중에는 해외 기업도 다수 포진되어 있었고, 당연히 대부분이 신영에 소속되어 있는 강신혁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었다.

강신혁은 점점 더 자신의 존재가 신영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을 느끼며, 이러다 자신이 신영에서 뼈를 묻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다소 불안해졌지만 이젠 되돌릴 수도 없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이대로 갈 뿐이다.

“엘리, 진짜 안 탈 거야?”

“응, 난 호위대니까.”

이만우와 이나희는 벌써 안으로 들어간 반면, 엘레노어는 강신혁의 경호에 철저하겠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호위대를 자칭하며 헬의 등에 올라탔다.

헬은 이전 아프리카에서의 전투 이후로 강신혁뿐 아니라 엘레노어에게도 그럭저럭 따르고 있었는데, 특히 지금은 강신혁이 탄 비행기를 호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엘레노어에게 더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하긴 엘리만 있으면 다른 호위 인원은 필요도 없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방법은 있을 텐데.

예를 들어 오닉스를 비행기 동체와 동화시켜 방어력을 극도로 끌어올린다거나 하는 방법도 있고, 클레어에게서 드론을 몇 개 빌려 일시적으로 강화시켜 호위대를 대신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자신이 헬을 타고 직접 비행기를 지키는 게 확실하다며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이래서야 누가 공주가 된 건지 모르겠네.”

“헬, 잘 부탁해.”

- 크루루루루루

헬 스파이크 와이번인 녀석이 비행기보다 속도가 느릴 리도 없고, 확실히 안전한 비행이 될 듯했다.

애초에 경비행기가 아니라 전원이 와이번을 타고 날아간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영국 입장에서 영 좋지 않은 입국방식이었으므로 자제하기로 했다.

“그럼 부탁해, 엘리.”

“응. 맡겨둬. 안에서 나희가 무슨 짓 하려고 하면 소리 질러.”

“아니, 괜찮거든?”

이 두 사람의 우정이 자신 탓에 깨지는 일이 없기를.

강신혁은 한숨을 쉬며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러자 시트에 몸을 깊숙이 눕히고 있는 이나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으, 아침부터 힘썼더니 지친다……."

“누구 탓이냐, 누구.”

“내 탓……."

“아니 다행이다.”

“아……."

강신혁은 한숨을 푹 쉬면서도 이나희의 어깨에 이불을 둘러주었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이나희를 더 욕심쟁이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일부러 무례하게 대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나, 나도 굿나잇 키스 같은 거,”

“안 해.”

“치. 언니 미워.”

“그냥 내 탓 해라.”

“아냐, 언니가 나빠.”

그야 다들 보는 앞에서 과도한 스킨십을 한 클레어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원인제공을 한 이나희는 더 나쁜 게 아닐까.

어차피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이나희에게 말해봤자 무의미하겠지. 강신혁은 키스 대신 이나희의 이마를 살포시 쓰다듬어주었다.

“아마 가면 귀찮은 일들 많이 생길 거야. 지금은 편히 쉬어둬."

“씨, 이게 누굴 애 취급을 해…… 더 쓰다듬어줘어.”

“와, 진짜 돌겠네.”

비행기가 곧 이륙했다. 이미 진즉 날아오른 헬이 상공을 휘휘 돌며 안전함을 알렸다.

강신혁은 부디 영국 왕실이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기를 기도하며 자신도 시트에 몸을 눕혔다.

이나희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누우며 속삭였다.

“야, 이러니까 우리 같은 침대에 누운 것 같지 않아?”

“그냥 자라, 좀.”

@@@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 비행기는 무사히 히스로 공항에 착륙했다.

주위에선 비행기를 홀로 호위하고 있는 용맹한 와이번의 모습에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와이번에 타고 있는 소녀의 정체일 것이다.

“공주잖아?”

“공주가 왜 와이번을……?”

“아, 신은혁이다!”

“인형사!”

익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세상엔 비밀도 프라이버시도 없었다.

터미널을 나오기도 전에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에 강신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영국 사람들은 비단 왕실뿐만 아니라 미디어 매체도 일반인들도 강신혁과 엘레노어를 연인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인터뷰 한 번만 해주세요!”

“이쪽, 이쪽 한 번만 봐주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카메라 구도에 강신혁과 엘레노어를 함께 담아내려고 애들을 쓰는데, 그것이 이나희의 경쟁심을 자극했는지 괜히 그에게 달라붙었다.

출발하기 전에 클레어에게 한 소리 듣지 않았으면 팔짱도 꼈을 것이다.

“봐봐 이거, 나보다 엘리가 더 위험하지?”

“그 핑계로 달라붙으려는 거 아냐?”

“어떻게 알았지, 히.”

헬을 어깨에 얹은 엘레노어가 사방으로 살기를 뿌려 기자들을 모기 쫓듯 간단하게 흩어버린 후, 그에게로 다가와 이나희를 제재했다.

“나희, 떨어져. 사진 찍힐 만한 건 특히 조심해야 돼.”

“그거 경험자 발언 아냐?”

- 뀨르르

헬이 코웃음을 치더니, 파르르 날개짓을 해 강신혁의 어깨로 건너왔다.

......응?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땅에 착륙하고 나서 갑자기 작아졌어.”

“작아졌다는 건 보면 알아.”

강신혁은 미니 사이즈가 된 헬을 쓰다듬어주며 녀석의 변화를 영력으로 살폈다.

그러자 과연, 작아졌어도 녀석의 능력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강신혁의 능력에 영향을 받아 이런 극적인 변화가 가능해진 모양이었다.

“귀여워졌네.”

- 뀨루루

작아져서 그런지 울음소리도 귀여워졌다. 뺨에 얼굴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녀석을 쓰다듬어주고 있자니 옆에서 엘레노어와 이나희가 엄한 시선으로 헬을 째리고 있었다.

설마 헬을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강신혁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녀들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만우가 큰 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거기서 놀고 있지 말고 빨리 가자. 그래도 관광은 해야 할 거 아니냐.”

“몬스터 폭주 탓에 관광지가 텅텅 비었다는데 무슨.”

“그러니까 더 놀기 좋은 것 아니겠냐.”

“오, 역시 오래 산 사람은 뭐가 달라.”

“손녀야, 들뜬 건 알겠다만 적당히 해라.”

드물게도 이만우가 앞장서서 걷고, 강신혁이 그 뒤를 따르고, 엘레노어와 이나희가 서로를 견제하며 앞 다투어 강신혁의 옆을 걸었다.

그렇게 공항을 빠져나오려는데, 그 전에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무리가 나타나 그들 앞에 도열했다.

“아, 대충 짐작하던 타이밍에 튀어나왔네.”

강신혁이 중얼거리는데, 그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갑옷을 입은 남자가 앞으로 나와 강신혁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강신혁 초인의 영국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왕실에서 강신혁 초인을 모시고자 하는데, 함께해주시겠습니까?”

“제 일행도?”

“물론입니다.”

표정관리가 좀 되는 사람인지, 대놓고 엘레노어를 앞으로 내세워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엘레노어를 살피자 이쪽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예 그들을 신경 쓰지도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충분히 예상되었던 일이고, ‘예정되었던’ 일이기도 했다.

강신혁은 괜히 떠보듯이 중얼거렸다.

“흠, 어떡할까. 우리가 예약한 호텔보다 좋으려나?”

“다, 당연합니다.”

강신혁의 태도가 예상외였던 걸까, 대답하는 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잠깐 생각해보는 척 하더니 이윽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관광 좀 하고 저녁에 갈게요.”

“예?”

“설마 지금 체크인 안 하면 안 되나?”

강신혁의 짓궂은 질문에 남자는 할 말을 잃고 굳었다.

그 대신 이나희가 그들에게 물었다.

“볼 거 다 보고 저희가 알아서 갈 테니까 주소만 알려주세요."

"음......."

“그러면 저녁에 봅시다.”

마치 관광지의 호텔을 예약한 것처럼 편한 태도에 갑옷을 입고 있던 이들의 몸이 벌벌 떨렸지만, 일행은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그들을 지나졌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조금 후련해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