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 Chapter 55. 카이랄 - 1 >
방과 후, 모든 수업을 마친 강신혁은 복도에서 마주치는 학생들마다 자신을 ‘인형사’ 혹은 ‘교관님’ 혹은 ‘오빠’ 혹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질려 무척 기민하고 은밀한 움직임으로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부실로 향했다.
예전엔 좁은 부실 안에서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호의를 표하는 이나희와 함께 몇 시간이고 같이 있는 것이 살짝 불편했는데, 요즘은 (클레어한테 정말로 찔릴까봐 무서워서) 이나희가 자제하고 있을 뿐더러 오히려 바깥에서 학생들과 부딪치는 쪽이 더 스트레스가 심할 정도여서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더구나 사건 발생 이후로 쭉 다른 일들로 바빴기에, 이나희와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기도 했다.
“후배후배, 이것 봐봐. SNS 계정 팔로워 100만 돌파!”
그런데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부실 안에서 그를 기다리며 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나희가 뜻밖의 소리를 하며 그에게 자신의 폰을 내밀어보였다.
“SNS…… 선배는 그런 거 하면 즐거워?”
"응!"
자신에게 폰 화면을 들이밀며 해맑게 웃는 이나희의 모습에, 더 대꾸해주기도 귀찮아진 강신혁은 엄지를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그래, 힘내라 나희 선배. 선배가 넘버원이야.”
“그렇게 대충 넘기지 마. 엘리는 아직 97만이라니까? 내가 압도적으로 리드하고 있다는 말씀……!”
“엘리도 SNS를 하고 있다고!? 아니, 듣고 보면 그렇게 압도적인 차이도 아닌데?”
“하지만 내가 넘버원은 아니야.”
오늘 이나희의 얼굴은 정말 볼만했다.
밝았다 어두워졌다 하는 게 꼭 리모콘으로 밝기 조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게 다 오랜만에 강신혁과 둘만의 시간이 생겨 들뜨고 신이 나 그런 것이었으나 강신혁은 그녀의 그런 소녀심을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았다.
“경쟁대상이 누군데. 설마 할리우드 배우였던 브리짓이랑 경쟁하려는 건 아니지?”
“내가 미쳤어? 브리짓 언니는 팔로워만 2억이 넘는데.”
“2억......."
세계적인 셀러브리티라는 것을 알긴 했지만 본래 연예계에는 관심이 적은 터라, 강신혁은 브리짓을 항상 섹드립만 쳐대는 귀찮은 누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팔로워 수가 억 단위라는 말을 들으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러니까 그녀가 비단 초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신영의 이름값이 확 높아진 것이겠지.
분하지만 브리짓의 존재가 자신과 신영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응? 그럼 누군데? 엘리는 이겼다고 했고…… 혹시 클레어?”
“클레어 언니는 지금 SNS 안 해. 예전엔 했었는데…… 아무래도 너랑 만나기 시작하면서 접은 것 같아, 어.”
분위기가 조금 묘해졌다. 강신혁이 그녀를 신경 써서 화제를 전환할 만한 단어를 찾는데, 이나희가 먼저 답을 말했다.
“비타 언니.”
“비타!?”
비타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모르는 마스크드 바커스 단원들은 그녀를 언니라고 불렀다.
비타는 언니라고 불릴 때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냥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하고 있지만, 그녀의 성숙한 분위기를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단원들은 계속 그녀를 연상으로 취급하고 있는 실정.
강신혁은 이나희에게서 폰을 받아들어 비타의 SNS 계정을 확인했다.
그러자 정말로 프로필이 비타 본인이었다!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모습이 실로 미려했다. 팔로워 숫자는 벌써 500만을 초과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납득이 갔다.
신영은 원래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던 기관이기도 했고, 비타는 강신혁과 클레어의 지인이며 동시에 마스크드 바커스에 갑자기 등장한 신입 단원이라는 굉장히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으니까.
“카페가 인기 폭발이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 정도가 아냐. 카페 영업할 때 가보면 무슨 아이돌 콘서트가 따로 없다니까.”
비타는 운유관 1층에 있는 카페를 운영하게 되었다. 강신혁과 클레어가 신영에서 일하게 되면서 제시한 조건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이 다 신영에 머무르게 되면서 비타를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어 적당히 생각한 일자리였을 뿐이지만, 본래 다른 세상에서 바텐더 노릇을 했던 비타에게는 딱 맞는 일이었기에 그녀는 무척 기뻐하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SNS에 올리는 사진이란…….
“……그냥 라떼 아트잖아.”
“칵테일 음료들도 많아.”
“아, 그렇네.”
비타가 매니저로 취임하면서 리뉴얼하여 내외부로 크게 확장한 운유관 노상카페에서는 커피와 차 뿐만 아니라 칵테일을 판매한다.
물론 칵테일이라고 해도 철저한 논알콜이다. 학생들한테 술을 팔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클레어가 만든 논알콜 칵테일을 치어팩(비닐주머니에 돌림 마개가 달려 휴대하기 간편한 용기)에 담아 대량으로 들여놓고 파는 것인데, 이름만 칵테일일 뿐 다양한 효과를 지닌 포션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가격은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앞으로 실전을 수행할 일이 많아질 학생들에게는 포션이 필수. 상당히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사실 클레어가 하고자 한다면 이런 형식이 아니라 연금술사 명의로 신영과 직접 거래를 해도 됐겠지만, 클레어는 반쯤 억지로 카페에서 포션을 파는 형태를 밀어붙였다.
왜냐면 그것이 RPG같아서 재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교 매점에서 아무렇지 않게 파는 포션을 사서 교외 던전을 탐색하는 학생들, 그야말로 게임 속 한 장면이 아닌가!
“그리고 그 외에는 인물사진.”
“응, 아무리 봐도 다들 이쪽이 목적이네.”
비타의 수줍은 셀카 외에도 클레어와 같이 찍은 사진이나 강신혁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어 그런 사진엔 더욱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비타의 계정이 강신혁과 클레어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팔로워 수가 늘어나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어서, 이 추세로 가면 이번주 안에 1천만을 돌파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후배, 그러니까 나랑도 사진 같이 찍자.”
“그러지 뭐.”
“응? 진짜?”
본인이 부탁해놓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이나희. 강신혁은 씩 웃으며 말했다.
“선배도 마스크드 바커스잖아. 나랑 친밀한 사이라는 걸 과시해줘야 사람들이 더 혹하지 않을까 해서.”
“그럼 기왕 하는 거 볼에 뽀뽀라도 할까.”
“그건 안 되고.”
“진짜 이 조선시대 남자……."
강신혁은 속은 여전히 소심한 주제에 겉으로만 화끈한 척하는 이나희를 옆으로 끌어 같이 셀카를 찍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신혁이 옆으로 붙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지만, 일단 사진을 찍고 나자 SNS에 업로드하는 동작은 무척 재빨랐다.
“아, 업로드하자마자 엘리가 댓글 달았어. 지금 어디냐는데 무서우니까 씹을게.”
“응, 제발 부탁해.”
이나희가 폰을 정리한 후, 두 사람은 비로소 작업에 돌입했다.
이번 월드 프라이즈에 출품할 목적으로 만드는 물건은, 다름 아닌 방패였다.
“방패는 판떼기가 넓어서 룬 쓰기가 편하다니까.”
“선배는 전력을 다해서 써.”
“너 손에 힘 빼려고 그러지.”
“응, 결과적으로 SS+랭크 정도에 안착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강신혁의 말에 이나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대 월드 프라이즈 대상을 탄 아티팩트 중 가장 등급이 높았던 것이, 바로 과거 이만우가 만들었던 SS랭크의 아티팩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 강신혁의 발언은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나희는 강신혁의 진정한 실력을 일부나마 알고 있다. 손에 힘을 빼고도 SS+랭크로 완성시킬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나 허풍이 아닐 터였다.
“야, 그럴 거면 있잖아.”
“뭔데?”
“나도 따로 하나 만들어보면 안 돼?”
이만우의 도움을 받아 미리 준비해뒀던 철괴를 꺼내던 강신혁이 흐음,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선배가 혼자 만들어서 출품하고 싶다는 뜻이야?”
“응, 나 원래 혼자서도 악세서리형 아티팩트 만들던 건 알잖아.”
“알지.”
“그러니까 네가 형태만 잡아주면…… 나머지는 전부 내가 해보고 싶은데. 안 돼?”
강신혁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이나희에게 아티팩트 제작욕구가 있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보다도 부모를 사랑하고 그들의 뒤를 잇고 싶어 한다는 것을.
다만 본인은 대장장이로서 재능이 없었던 탓에, 처음에 강신혁과 만났을 때도 그렇게 삐걱거렸던 것이고…….
‘나희 선배가 특성을 진화시킨 지도 벌써 반년은 훌쩍 넘었지. 그럼 이제 슬슬 다음 단계를 노려봐도 될 것 같아.’
그녀의 능력 개발을 위해선 이것도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그녀가 단독으로 훌륭한 아티팩트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면 장차 그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고…….
생각을 마친 강신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그렇게 하자. 하나는 팀 명의로, 하나는 나희 선배 이름으로 출품하는 걸로.”
“아니, 월드 프라이즈는 팀당 두 개까지 출품 가능하니까 팀 명의로 가자. 게다가 형태만 잡아준다고 해도 네 ‘능력’이 많이 들어갈 테고……. 굳이 내 이름을 따로 뺄 필요는 없어. 우리는 팀이니까.”
“아, 응.”
“지금이니까 말해두지만 난 너랑 평생 같이 가기로 정했으니까, 내 이름으로 아티팩트를 팔 생각은 없어. 우리가 만드는 작품은 모두 K&L 브랜드로 나가는 거야, 알겠지?”
기분 탓인지 팀을 굉장히 강조해오는 이나희. 아니, 아마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강신혁은 이나희가 K&L이라는 이름에 담고 있을 의미를 생각하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자신이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데 부디 그것이 착각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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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혁은 당초의 걱정과는 달리 신영에서의 뒤바뀐 입지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작년에도 그랬다. 능력이 없다며 그를 멸시하던 이들의 시선은 그가 영력을 각성하고 빠르게 바뀌었다.
하물며 세계 랭킹 1위임이 드러난 지금은 어떻겠는가. 학생들은 거부감 없이 강신혁을 자신들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윗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건 강신혁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그가 클레어와 연인 관계라는 사실이 함께 드러난 것이 더욱 좋은 결과를 낳았다.
자신들과 비슷한 나이에 성인 여성, 그것도 매력적인 초인을 논할 땐 늘 한 손에 꼽히는 클레어와 교제를 하고 있으니, 겉모습은 달라진 게 하나 없어도 그까지 어딘가 어른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더불어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고 있으니 그까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는 현상이 더해져,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교관으로 취임한 강신혁의 인기는 현재 신영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의 인식이란 이 어찌도 얄팍한가. 강신혁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며칠 뒤에 출발이라고 하셨죠?”
“사흘. 같이 못 가서 미안해. 여기서만 머무르니 답답하지.”
이나희와 작품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오후 열 시가 넘은 시각, 강신혁은 문을 닫은 카페 안쪽, 플로어에서 비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신혁과 방을 같이 쓰는 클레어와 달리, 비타는 사람들의 시선도 있고 해서 평소에는 운유관에 딸린 숙소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가 비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아니에요, 아빠. 저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이곳이 마음에 든다는 비타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안드로이드 주제에 표정을 잘 꾸며내지 못하는 그녀는 지금 진심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멸망한 세상에서 태어나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밖에 사람과 교류하지 못한 비타에게는, 활기로 가득 넘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가 큰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여기…… 그곳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그래서 때로 슬프지만, 그래서 더 친숙해져버렸다고 해야 할까요……."
“비슷해?”
“네."
카운터를 한 손으로 쓸며 비타가 중얼거렸다. 강신혁이 눈쌀을 찌푸리며 반문하자, 비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전장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응원해주고 음료를 내주면서……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같은 자리에서 계속.”
“아, 음…… 그래, 그럴 지도 모르겠네.”
강신혁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비타의 씁쓸한 표정을 보며 둘이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비타가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에 살포시 자신의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빠는, 무사히 돌아오실 거죠?”
“당연하지. 상 받으러 가는 건데 뭐.”
“후후, 기다리고 있을게요.”
강신혁의 믿음직스러운 대꾸에 비로소 표정이 풀린 비타가 아무도 없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조심스레 다가와 그의 뺨에 쪽, 입술을 맞추었다.
강신혁이 눈을 살짝 크게 뜨자 그녀는 뭐가 불만인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말했다.
“입술에 뽀뽀하고 싶은데 그건 엄마가 안 된대요.”
“응, 그건 봐줬으면 좋겠네.”
“아빠랑 딸인데.”
“응…… 그래도 안 되려나.”
“칫."
삐진 흉내를 내는 비타의 모습을 보며 강신혁은 역시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덤으로 클레어에게 물어봤더니 다음부터는 볼에 뽀뽀하는 것도 자신의 감독 하에 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