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 Chapter 54. 학교는 군단이다 - 6 >
강신혁이 직접적으로 학생들과 마주하며 그들의 몸에 직접 경험과 힘을 때려 넣고 있다면, 클레어는 신영 시스템 지원팀으로 들어갔다.
로열 클래스 관리 시스템의 핵심 개발자이기도 한 그녀는 본래 연금술뿐만 아니라 기계로 아티팩트를 만드는 ‘마력 기반 프로그래밍’의 전문가.
당장 그녀가 제 1체육관의 시스템에 손을 댔더라면 요르문간드 습격 당시 그렇게 큰 희생을 내지 않고 끝났을 수도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셈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신영의 시스템을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보안과 경고 두 분야에 있어서는 클레어의 전면적인 개입이 절실했다.
“여태까지는 부탁을 받아도 귀찮아서 거절했었는데 말이지.”
새로운 일에 대해 한참 얘기를 늘어놓은 후.
강신혁의 가슴팍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 클레어가 씁쓸하게 웃었다.
“조금 실수했으려나. 여태까지, 바를 운영할 시간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있었을 텐데.”
“그건 말도 안 돼. 능력이 있다고 모든 일에 책임을 지려는 거야말로 오만한 일이야.”
“음…… 응, 아마도 은아가 그랬던 것 같아.”
확실히, 신은아는 자신의 능력을 타인을 지키기 위해 쓰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때로 그녀는 사명감마저 지니고 있는 듯이 보였다.
자신이 인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모종의 강박관념이 그녀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으니까.
그것이 ‘모루’와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착한 아이’로 있기 위한 노력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을, 강신혁은 아직 완전히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 해.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삶의 방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말이지. 이번에 은아를 보고, 내가 잘못된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클레어랑 은아는 달라.”
“응, 알지만…… 으으, 짜증나. 이래서야 거의 저주잖아.”
어딘가 납득이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클레어가 문득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은아 생각 탓에 우리가 제대로 꽁냥대지 못하는 이 상황, 자긴 어떻게 생각해?”
“외부에서 보면 충분히 바퀴벌레 커플처럼 보일 것 같은데.”
그야 두 사람이 있을 때보다도 세 사람이 있을 때가 많았던 탓에, 둘이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히 신은아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조금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솔직히 두 사람의 모습은 지나치게 끈적거렸다.
서로의 신분 탓에 밖에서 별로 달라붙지 못하기 때문인지, 둘이 방 안에 있을 때면 15금 딱지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냐, 그래도 부족해.”
“부족해?”
“응. 안아줘.”
“그래.”
강신혁은 양팔을 뻗어 클레어를 뒤에서 살포시 껴안았다.
그러나 오늘은 어리광을 부리기로 작정한 클레어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좀 더 세게 안아줘.”
“그래그래.”
“응…… 응!?"
조금 괴롭지 않을까 싶을 만큼 꽉 껴안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든 시점에, 강신혁은 괜히 장난기가 돌았다.
“꺅, 자, 자기, 간지러, 꺄흐.”
그는 클레어의 가녀린 목덜미에 입김을 후후 불었다.
클레어가 표정을 무너트리며 안달을 내도 쉽게 놔줄 생각은 없었다.
호풍환우 스킬까지 사용해 입김을 절묘한 위치에 닿게 하는 신기에 클레어가 아주 좋아 죽으려고 했다.
“하, 하지 마아. 그만, 거기 약해, 킥, 키헛.”
“저기, 두 사람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거?”
"응?"
훌륭한 바퀴벌레 짓을 하고 있던 커플을 멈춘 것은 바로 그들의 맞은편에 앉아 캔맥주를 따고 있던 여성, 브리짓 폴센이었다.
평상복 차림에 편하게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과연 모델이라 그런지 태가 나는 모습. 하지만 표정은 엉망이었다.
“뭐가?”
“저도 있는데 그렇게 둘만 달라붙어 있는 거 좀 비겁하지 않아요? 게다가 아까부터 얘기도 안 끼워주고.”
“그러게 누가 이럴 때 방해하래?”
‘이럴 때’란, 그 사건 이후로부터 며칠이 지나 두 사람이 간신히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이제 막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타이밍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아의 소실 이후 며칠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브리짓이, 하필이면 지금 나타나 그들을 방해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일부러 과시해주자는 마음이 생겼을 정도였다!
“진짜 너무하네요, 얘기를 안 끼워줄 거면 다른 거라도 끼워주던가! 어머나, 마침 여기 딱 끼우기 좋게 생긴…….”
“당신은 하루라도 섹드립을 안 치면 죽는 병에 걸렸어요!?”
며칠간 안 보여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찰나에 이런 꼴이라니!
“그럼 이제 얘기 끼워줄 거예요?”
“후우, 할 수 있는 얘기는 저번에 다 했잖아.”
클레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와중에도 강신혁의 품에 단단히 파묻혀 나올 생각은 없어보였다.
“으음, 그 얘기는 뭐, 그렇죠.”
사건 직후. 귀신같은 얼굴로 달라붙어오는 브리짓에게 강신혁은 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짤막하게 했다.
그야 히어로 유니버스에 대해서까진 말해줄 수 없었지만, 대충 강신혁이 만든 무구를 신은아가 지니고 있어 그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친 것이다.
……사실 극천신주의 존재를 고려하면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극천신주의 융합이 끝나면 그것을 통해 신은아가 있는 차원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 테니까.
“아직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확신이 들지만, 거기까진 얘기 안 해줄 것 같고.”
“그것도 힌트는 줬잖아. 강해지면 된다니까요?”
"부........"
브리짓이 샐쭉한 표정으로 강신혁을 째려봤으나 강신혁은 그 이상 말해줄 생각도 없었고 말해줄 수도 없었다.
브리짓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만 얘기해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그녀가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의 자격을 갖추길 기다릴 수밖에. 안 그래도 관리자 역시 브리짓은 ‘머지않았다.’는 얘기를 할 정도였으니까.
“뭐, 안 그래도 그러려고 온 거긴 한데.”
“그러려고 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음, 뭐 원래 오늘 하려던 얘긴데.”
브리짓은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바닥에 툭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게 선언했다.
“저 은퇴했어요.”
“할리우드에서?”
“아니, 원래 하던 일 전부."
"......."
아마도 강신혁과 클레어는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탑 랭커가 될 때까지도 배우 일을 손에서 놓지 않던 그녀가 이제 와서 그것을 그만뒀다고?
대체 신은아가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기에?
“둘 다 그런 눈으로 보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냐? 클레어 언니도 바텐더 그만뒀잖아요.”
“으, 응? 아니, 내 바는 까놓고 말하면 내 욕심 반, 신혁이 꼬시려고 한 거 반이었는데……. 게다가 지금 한가롭게 바텐더로 놀고먹을 때가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한 거거든요.”
브리짓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말을 하면서도 두 캔 째의 맥주를 뜯는 것을 보면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저는 언니한테 계속 진심이었거든요? 아, 덤으로 말하면 인형사 씨한테도.”
“그건 지금은 됐으니까.”
“그런데 언니가 그렇게 되고, 각국에서 이렇게 난리가 나는 걸 보니까, 뭔가…… 언제까지고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까놓고 말해 전 세계적으로 씹창이 난 상황에 할리우드라고 멀쩡하게 돌아갈 것 같지도 않고.”
굉장히 직설적인 발언이었지만 틀린 구석이 없었다. 이럴 수가, 브리짓이 정상인처럼 보이다니!
혹시 신은아를 잃은 충격으로 자신이 맛이 간 것은 아닐까, 강신혁은 진지하게 고뇌했다.
“게다가 인형사 씨는 나보고 언니를 만나고 싶으면 강해지라고 하고. 농담 아니었잖아? 나도 농담 아닌 거 알아가지고, 그러면 이제 진짜 초인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구나 싶어서요.”
“그러면 며칠 동안 바빴던 건……."
“아아…… 응, 뭐 그렇죠.”
브리짓은 담담히 지난 며칠간 철야로 촬영을 했던 사실을 밝혔다.
“마무리할 수 있는 작품은 전부 반쯤 억지로 마무리지었고, 단기간에 안 되겠다 싶은 건 위약금 주고 파기하고 온 거예요. 매니저랑도 완전히 작별했고.”
“매니저도 있었구나.”
“일도 잘하고 예쁜 사람이었지만 역시 은아 언니보단 별로려나.”
“왜 기준이 은아가 된 건데?”
“왜냐면 매니저가 나랑 섹……."
“오케이, 거기까지.”
조금만 방심하면 위험한 말이 튀어나오니 안심할 수가 없다. 강신혁이 기가 막혀 고개를 젓는데, 클레어가 브리짓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너, 혹시 신영이랑 벌써 얘기 끝냈어?”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그야 네가 여기에 인가 받고 들어왔으니까.”
“어라.”
그러고 보니 그렇네. 강신혁은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짓 폴센은 엄연히 외부인. 그녀가 로열 클래스에 강신혁을 떼놓고 독립적으로 출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건물 안에 들어와 있고, 그렇다는 것은 학교 측에 허가를 받았다는 얘기인데…….
“강해지려면 인형사 씨 곁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하잖아요? 저한테도 좀 내줘요, 클레어 언니이.”
“싫어, 안 줘. 못 줘.”
“아잉, 그러지 말고. 오늘밤은 우리 셋이서 돈독하게 같은 침대에서……."
“하지 말라고 진짜.”
이 걸어 다니는 음란방송 같으니!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내일부터 잘 부탁해요, 인형사 씨!”
“응? 그래서 결국 신영에서 뭐하는데? 교사?”
“내일 알게 될 거야.”
브리짓은 킥킥 웃으며 세 캔째의 맥주를 뜯었다.
그리고 클레어에게 쫓겨나 울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그리고 다음날, 강신혁은 확실하게 브리짓의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자자, 여기서 늠름한 얼굴.”
"하......."
허공에 둥둥 뜬 드론의 머리에 달린 카메라가 햇빛을 반사해 번쩍였다.
강신혁은 어째선지 브리짓과 나란히 선 채 포즈를 취하도록 요구받고 있었다.
“제가 맡은 일 중에 이런 건 없었던 것 같은데요.”
“음? 폴센 양이 포스터를 함께 찍기로 약속했다고 했네만. 다른가?”
“브리짓.”
강신혁이 살벌한 표정으로 브리짓을 째리자 그녀는 약 오를 만큼 깜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앙, 그렇게 보면 흥분하잖아.”
“잘 됐네, 나도 엄청 흥분했거든…… 끓어오르는 살의로.”
“오오, 지금 표정 굉장히 좋네! 지금! 지금 찍어요!”
브리짓이 순식간에 표정을 늠름하게 바꾸며 외치자, 카메라가 찰칵,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모습을 확실하게 캡쳐했다.
몬스터가 아닌 브리짓에 대한 살의였지만 어쨌든 결과물은 정말로 훌륭했는데, 브리짓은 그런 사진을 강신혁과 함께 몇 장이나 찍고는 그 외에도 클레어, 백인하, 오혜나를 비롯한 마스크드 바커스 멤버들이 출연하는 영상물을 찍으며 한껏 날뛰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시대는 이제 갈 거야. 세상이 험난한데 누가 그런 걸 보고 있겠어요? 그 대신 몬스터들과 맞서 싸우는 초인들의 영상이 대히트할 거야! 예쁘고 잘생긴 초인들이 용맹하게 게이트를 정복하고 인류를 수호하는 영상! 신영의 홍보도 되고, 우리의 인지도도 높아지고!”
“응, 아주 잘 알겠어, 당신의 본질은 그대로라는 걸 말이지……."
배우나 모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것 같으니 무대를 바꾼 것뿐이 아닌가! 그야 상당히 괜찮은 발상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날, 신영의 전속 모델 겸 용병이 된 브리짓과 함께 강신혁, 클레어 등의 사진을 베이스로 한 포스터 등이 인터넷에 퍼져 미디어를 크게 달구었다.
그리고 신영 공식 홍보 채널로 탈바꿈한 브리짓의 미튜브 계정에는 브리짓과 강신혁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상이 올라가, 고작 10시간 만에 5천만뷰를 돌파하며 시대의 변화를 그들에게 실감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