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 Chapter 54. 학교는 군단이다 - 4 >
“어차피 능력이 안 되면 의미도 없는데, 인간이란 왜 그렇게 감투를 좋아하는 걸까.”
- 쿠우우우.
와이번의 울음소리 안에 감투가 뭐냐고 묻는 의사가 담겨 있었다. 강신혁은 와이번 - 헬 스파이크 와이번 ‘헬’에게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구매한 와이번용 간식을 먹여주며 대꾸했다.
“왕관 같은 거야. 멋있지만 거추장스러운 거.”
- 쿠우우우우.
과연, 본인은 타고날 때부터 멋있으니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헬의 머리 위에 돋은 붉은 뿔이야말로 타고난 감투가 아닐까 싶었지만 강신혁은 굳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와, 와아아아아……."
“진짜다, 진짜 마스크드 바커스 단원이 타고 다니던 와이번이잖아.”
“개멋지다…… 이거 수컷이지?”
- 쿠르르르르.
비룡기사단 단원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헬이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강신혁은 녀석의 목을 쓰다듬어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여자애야.”
“아니 생김새는 완전 수컷인데.”
“그런 말 나 없을 때 하면 헬한테 찔려도 모른다.”
“말을 알아듣는다고!?”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건 뭘로 들었냐.”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바로 비룡기사단이 독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블랙우드 훈련소의 부속 시설, 와이번 축사였다.
정확히는 원래 와이번 두 마리 정도가 들어가는 게 한계였던 시설을 크게 증축하여, 헬과 녀석이 이끌고 온 스파이크 와이번들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강신혁의 정체도 들켰겠다, 자신을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헬을 따로 멀리 놔둘 필요가 없어져 이번에 불러들인 것.
더구나 스파이크 와이번이라는 강력한 기승용 몬스터를 상품으로 내걸기라도 하면, 학생들의 열의를 북돋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그럼 이 와이번은 여태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냐?”
단원들 누구나가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것을 도우진이 질문했다.
다들 대충 눈치 채고 있을 줄 알았는데, 강신혁은 고개를 갸웃하곤 대꾸했다.
“그야 당연히 아프리카지.”
“디스 이스 낫 아프리카……."
“뭔 개소리야. 날아오는 거 못 봤어?”
도우진이 말없이 이마를 짚고 뒤로 물러났다.
살짝 마이클 잭슨 같은 움직임에 강신혁이 감탄하고 있는데, 그를 대신해 카렌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말했다.
“여태까지 그 위험한 아프리카 대륙에 남겨져 있었던 것도 어이가 없는데, 네가 오라고 했다고 거기서 한국의 서울까지 날아왔다는 얘기잖아, 지금.”
“그렇지?”
게다가 아프리카 대륙이 위험하긴 해도, 애초에 헬은 거기서 스파이크 와이번 무리를 이끌고 잘 살고 있던 현지의 몬스터다.
더욱이 강신혁의 특성으로 인해 헬은 진화하기까지 했고, 그런 녀석이 죽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았다.
“게다가 아프리카에서 서울까지 날아오는 문제는…… 얼마나 날았어?”
- 쿠우우우우!
“중간에 밥 먹고 쉬고 하면서 5시간 정도 날았다네. 그 정도 비행이 무슨 문제라고.”
“빨라!”
“아마 헬 혼자였으면 훨씬 더 빨랐을걸.”
- 쿠르르르아아아!
강신혁의 말에 헬이 당연하지! 하고 대꾸하듯 크게 울었다.
그 울음소리에는 의도하지 않아도 약간의 위압감이 담겨있어, 단원 중 아직 마력저항이 높지 않은 이들은 절로 한 발짝씩 물러나고 말았다.
“아, 강신혁 진짜 신은혁이다……."
“그러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펫을 거느릴 수 있는 건 신은혁 뿐이지……."
“그러면 우리 단장도 진짜 그거냐? ‘R’?”
3학년 단원 중 누군가가 뱉은 말에, 강신혁과 카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어제 마스크드 바커스의 단원 목록을 정식으로 밝혔지만 그걸 새삼스레 긍정하자니 어째 조금 부끄러운 것이다.
반면 마스크드 바커스와 조금도 관련이 없던 인물인 도우진은 오히려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처음부터 단장님이라고 생각했다. 창을 찌를 때의 동작이 똑같은 것도 그렇지만 구두굽이 너무 높았잖아.”
“굽 높은 걸로 들킬 거면 대체 왜 굽 높은 구두를 신긴 거지?”
“커 보이고 싶어서 아니었을까?”
“다, 다들 죠용!”
마음껏 뒷담을 하고 있던 자리에 엘레노어가 나타났다. 혀를 있는 한껏 씹고 있는 데다 얼굴도 새빨간 것으로 보아 얘기를 대충 들은 모양이었다.
“와이번들, 상태는, 괜찮아?”
“아, 못 들은 걸로 하고 넘어가는구나.”
누군가 중얼거리는 말에 엘레노어의 매서운 눈길이 꽂혔다. 다들 조용해졌다.
이번에 세계랭킹 6위로 정식 인정 받은 엘레노어의 창에 꿰뚫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응, 뭐 괜찮은 것 같아. 멜로이랑 마스가 신입들한테 쫄아있는 것 빼고는.”
강신혁은 그녀의 뜻대로 대답해주었다.(마스는 이전 강신혁과 엘레노어가 함께 게이트에 들어가 구해온 플레임 와이번의 이름이다.)
이젠 두 사람이 공중의 면전에서 반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누구도 태클을 걸지 않게 되었다.
두 사람이 반년이 넘도록 함께 활발하게 활동해온 무력집단의 동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으으으응.”
엘레노어는 자연스럽게 강신혁과 자신의 끈끈한 사이를 인정하는 듯한 분위기가 만연한 상황을 즐기는 듯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콧소리를 냈다.
카렌은 그녀의 시종답게 칠칠치 못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레노어의 얼굴을 슬쩍 가려주며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그래도 마스는 용감하네. 무력으로는 상대도 안 될 텐데 저렇게 멜로이를 지키려고 하잖아.”
“아, 그건……."
SS-랭크에 달하는 최상위종 포식자 스파이크 와이번 무리를 앞에 두고, 아무리 잘 쳐줘도 A+랭크에 불과한 플레임 와이번이 멜로이를 지키려 하는 모습은 조금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물론 스파이크 와이번들에겐 딱히 멜로이나 마스를 괴롭힐 생각이 없을뿐더러, 정말로 괴롭히려고 하면 3초도 안 걸려 마스는 물론이고 멜로이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겠지만…….
“멜로이가 임신 중이라서 그런 거려나.”
"......응?"
그런 와이번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내뱉은 강신혁의 말에,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얼어붙었다.
“지금 뭐라고?”
“멜로이가 임신 중이라서 마스가 더 노력하고 있는 거라고."
“이, 임신.”
분명 처음엔 멜로이가 마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그의 충격적인 발언에 모두 입도 뻥끗 못했다.
아니, 어째서 이렇게 충격적인 일을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강신혁만은 영력으로 멜로이를 훑은 순간 바로 알아차렸지만.
“대체 어느 틈에……?”
“아니, 얘네들은 지성이 있는데 그런 걸 우리한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겠지. 당연히 몰래……."
“오우야.”
“좀 닥쳐봐."
“그러면 비룡기사단이 보유하는 와이번이 늘어나는 건가……."
“그, 난 기왕이면 스파이크 와이번이 좋은데.”
마지막으로 발언을 한 단원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는 알아서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냥 그렇다고. 미안.”
“가망이 없지는 않지. 엄청 노력해서 마일리지를 적립하면 스파이크 와이번의 주인으로 인정해줄 수도 있어. 다들 혈안이 되서 노릴 테니까 힘들겠지만.”
“그냥 가망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
“하지만 스파이크 와이번이라……."
다들 새삼스레 놀라워했다.
예전 같았으면 와이번이 임신을 했다고 하면 학교 전체가 들끓어도 놀랍지 않을 만한 대사건이었을 텐데, 당장 수십 마리의 스파이크 와이번이 들어옴에 따라 노멀 와이번이 플레임 와이번의 아이를 밴 정도로는 별로 크게 기뻐할 일도 아닌 느낌이었으니까.
“스파이크 와이번은 여기 축사를 빌리고는 있지만 비룡기사단 소속이 아냐. 그런 면에서 볼 때 확실하게 비룡기사단 소속인 와이번의 탄생에 기뻐해도 좋지 않을까?”
“비룡기사단 소속이라고 봐도 되나?”
“마스를 비룡기사단 소속으로 넣었으니까 뭐 그야.”
“이렇게 계속 새끼를 치면……."
“아니 안되겠지.”
“그래도 비룡기사단에 와이번 라이더가 셋이 되는 건 확실하네.”
“와이번은 몇 살부터 탈 수 있지?”
스파이크 와이번에 대한 헛꿈을 얌전히 포기한 단원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망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강신혁은 과연 이런 이들을 마스크드 바커스의 새로운 단원으로 들이는 날이 올 것인가, 생각하면서도 멜로이와 마스에게 확실히 독립된 축사를 마련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으음 덤으로.......”
이 녀석들한테도 일단 버프를 걸어둘까, 가볍게 맘먹은 그는 손을 뻗어 녀석들을 쓰다듬어주며 힘을 주입시켰다.
헬이 이끄는 스파이크 와이번들한테도 앞으로는 가능한 만큼 버프를 걸 생각이었으므로, 뛰어넘지는 못해도 녀석들 간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만큼은 막을 셈이었다.
“그래서 엘리.”
"응?"
“왕실에서 답변은?”
“왔, 는데……."
엘레노어는 영국으로 돌아갈 뜻이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녀가 영국으로 돌아가 봤자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부려 먹힐 뿐이었으니까.
차라리 그녀가 왕실과 무관한 인물이었으면, 영국에서도 어마어마한 인지도를 얻으며 영국 초인계를 꽉 잡는 인물로 자리 잡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왕족이다. 그녀를 차기 여왕으로 앉히지 않는 이상, 그녀는 중용하기에도 내치기에도 껄끄러운 역린 같은 존재가 될 것이 뻔했다.
엘레노어는 공주인만큼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충분히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이 멋대로 좌지우지 당하는 꼴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강신혁과 의논하여 확실하게-- 영국에서 벗어나 그와 함께 독립적으로 활동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자신을 부르는 이들에게도 확고한 답변을 했다.
그와 동시에 마스크드 바커스 단원의 공개 발표가 이루어졌다. 다른 이들도 저마다의 사정이 있지만, 당연히 그 이유의 중심에 엘레노어의 존재가 있었다.
엘레노어, R은 영국 왕실이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냥 알겠다고……."
“으으응, 역시 수상하네.”
“당분간, 영국 땅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럴 수도 없단 말이지.”
물론 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 본인도 알고 있었다. 강신혁이 이미 월드 프라이즈에 출품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도…… 그리고.
“그러면, 나도 가.”
“응, 뭐 그걸 아마 그쪽에서 원하고 있겠지.”
“뭔데, 뭔데?”
“이 다음은 비밀~”
“패 죽이고 싶다 진짜.”
“이제 다들 가라. 와이번들이 너희 시끄럽다고 싫대.”
- 쿠우우우우우우!
강신혁은 와이번 축사로 몰려드는 단원들을 휘이휘이 손짓을 해 물리고는, 마지막으로 녀석들의 상태를 점검한 후 친구들과 함께 그곳에서 물러나왔다.
헬이 이끄는 스파이크 와이번 무리가 신영으로 날아 들어온 것만으로 신영의 입지는 다시 한 번 확고하게 굳혀졌을 것이다.
어째 정말로 신영이 전부 자신에게 떠맡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정말로 마스크드 바커스에 들일만 한 인재가 나올까……
“여기 있잖아, 나. 나!”
“응, 짐꾼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짐꾼이라니, 너……."
“너무하네 진짜!”
얼마 전부터 꾸준히 자신을 어필해오던 카렌이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강신혁은 그녀를 어렵지 않게 붙잡아 멈추고는, 카렌이 붙들린 순간 몸을 움찔하는 도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 둘 랭크가 비슷하니까 아마 같이 행동하게 될 것 같은데. 휘둘리지 말고 잘해라.”
“네가 말 안 해도 잘하고 있거든. 마스크드 바커스인지 뭔지는 흥미 없지만.”
“진짜? 카렌은 들어온다는데?”
“……네가 안 넣는다며.”
“응? 카렌 들어오면 너도 들어오려고?”
“아무 상관없거든!? 어!?”
역시 가끔씩은 이런 청춘의 맛을 첨가하지 않으면 기운이 나질 않는다니까.
강신혁은 바락바락 악을 쓰는 도우진까지 한 손으로 붙들고 걸어가며 소란을 피웠다.
엘레노어는 그런 강신혁의 뒤를 따르며 걱정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대회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열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