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 Chapter 54. 학교는 군단이다 - 2 >
“앞으로 잘 부탁하네, 강신혁 교관.”
“전처럼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볼튼 선생님.”
강신혁은 자신의 눈앞에 앉은 중년의 남성, 에밀 볼튼을 보며 쓰게 웃었다.
요즘 늘어나는 건 쓴웃음뿐인가, 남일처럼 생각하며.
에밀 볼튼. 한때 세계 초인 랭킹 300위 안에 들어갔던 맹자(猛者)로, 지금은 은퇴하고 신영에서 남자기숙사 사감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이번 체육관에서의 소동에서 크게 활약하며 능력이 쇠퇴하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강해졌음을 증명했다.
신영이 교육기관이 아니라, 최전선에 서는 전투집단으로 변모한 지금 그 또한 학생들을 지키며 그들과 함께 싸울 것을 결의했다.
……그래서, 결국 에밀 볼튼도 강신혁의 능력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인데.
“아니, 내가 가르침을 받는 입장인 이상 전처럼 대할 수는 없지. 자네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닌 교관이야. 우리부터 구분을 확실히 해야 기강이 똑바로 잡히지 않겠나.”
“그건…… 어쩔 수 없네요.”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로열 클래스의 개인휴게실이었다.
강신혁이 학생 입장에서 벗어나게 된 이상 숙소를 새로 정할 필요가 있어, 겸사겸사 얘기를 나눌 겸 그와 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교관과 검을 나누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지. 하지만 결국 이렇게 약속을 지키게 되었으니, 이게 다 연 인 모양이야.”
“했었죠, 그런 약속도.”
솔직히 거기까지 정신이 닿지 않았다. 근 1년간 워낙 바쁘게 살아왔다는 반증이리라.
요즘은 과거를 떠올리면 절로 다른 일들까지 떠올라서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에밀 볼튼의 말마따나, 사람과의 연이란 곧 과거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도저히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강신혁 교관.”
“아, 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가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에 자네에게 주어진 직함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데…… 큼.”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그것을 속으로 삼키고는 강신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화제를 전환했다.
“교장과는 얘기가 다 끝났네. 원래 쓰던 방을 계속 쓰도록 해. 보일 선생과 함께하는 것이 맞지?”
“아…… 네.”
“좋아. ……이런 때, 연인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힘 있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강신혁은 어딘가 잘 와 닿지 않는 ‘보일 선생’이라는 말에 묘한 감상을 품으며, 문득 특성이 진화한 후 한번도 스테이터스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특성이 진화한 후로 폭풍같이 너무 많은 일들이 몰아쳐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강신혁 - SSS+랭크](동화율 97.5%)
[특성]
파천룡(破天龍)(X) - 하늘을 부수고 그 위로 올라 삼라만상(表羅萬象)과 교류하며 그에 간섭할 권한을 얻은 용. 자아를 각성하며 타자를 변화시키는 힘을 숙련하여, 이제 세상을 변화시키는 첫발을 내딛었다.
[신체능력]
힘 - SSS+
민첩 - SSS+
체력 - SSS+
[특수능력]
영력 - X-
파천기 - X-
[스킬]
파천무(X) - SSS
호풍환우(X) - SSS
공간지배(X) - SS
다크 마스터리(X) - SS+
라이트 마스터리(SSS+) - SS+
파이어 마스터리(SSS+) - SS+
영혼독(SSS+) - SSS
야금술 - SS+
감정 - X
수리 - S+
대충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그의 변화는 극심했다.
신체 스테이터스가 모조리 현계한도, 즉 SSS+랭크에 이른 것도 어처구니없었지만, 강신혁은 스스로 현계한도를 곧 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특수능력인 영력, 그리고 황룡투기에서 변화한 파천기는 벌써 X-랭크에 이르러 있었다. 그 둘이 이미 현계한도를 돌파했는데 신체능력이라고 돌파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스킬에 이르면 더 가관이어서, 황룡투에서 진화한 파천무는 희귀도 X랭크에 숙련도는 SSS랭크까지 끌어올려져 있었다.
이건 단순히 각성 때문만이 아니라, 신살검무를 만들어낸 야누스와 영력을 섞은 검을 맞부딪히며 단기간에 압도적인 경험을 얻은 탓이었다.
다른 마스터리 스킬의 희귀도와 숙련도가 오른 것도 물론이지만, 윈드 마스터리가 마스터리 너머의 영역, [호풍환우]라는 스킬로 탈바꿈한 것도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는 용의 힘을 발현하기에는 그야 윈드 마스터리가 가장 적절했을 터, 그것을 중심으로 삼아 힘이 정착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거, 단순히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는 스킬은 아니란 말이지.’
강신혁은 아직 야누스가 강림했던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 혹은 그녀는 자신의 영력으로 일대를 압도하고 전장의 분위기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바꾸었는데, 호풍환우가 바로 그런 비슷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스킬이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전장, 즉 필드 전체에 효과를 주는 마법인 것이다. 아군을 강화하고, 적군을 약화하는 강신혁의 특성의 힘이 광역범위로 발현되게끔 하는 어마어마한 능력.
이 스킬로 인해 강신혁은 비로소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초월자로서 한 발짝 내딛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
물론 야누스에 비하면 그것도 새발의 피 수준이지만, 그의 특성이라면 여기서 더욱 빠르게, 더욱 강하게 성장해나갈 터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뜻밖인 점이 있다면 감정 스킬이 X랭크에 이르렀다는 것. 존재의 격이 끌어올려졌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의 눈에 변화가 닥쳐왔기 때문일까?
특성이 진화하고, 강신혁은 약간의 신체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키가 조금 크고 몸이 더 가다듬어지는 것까지야 평범했지만, 눈에 찾아온 변화가 조금 심했다.
파충류의 그것처럼 동공이 약간 세로로 서게 된 것. 특히 파천기를 운용하게 되면 세로로 서는 정도가 심해지며 눈이 오색으로 빛나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위압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시력은 빼어나게 좋아졌다.
영력이나 마력 등 에너지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은 원래부터 훌륭했지만 특성이 진화한 후로 그것이 더욱 강해져, 어쩌면 타인에게서 시작되는 에너지의 흐름에서 약점을 찾아 끊어내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도 감정 스킬 또한 그것에 영향을 받아 성장한 게 아닐까.
“자기.”
“아, 클레어.”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고 클레어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로열 클래스에 들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리라. 다른 학생들도 이 일로 엄청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나마 로열 클래스가 원래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기숙사라서 다행이었다.
평범한 남자 기숙사였으면 클레어를 안으로 들이기보다, 강신혁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여기서 뭐해?”
“볼튼 선생님이랑 얘기를 좀. 서류는 다 처리됐대.”
“으응, 나도 여자선생님들이랑 얘기하고 왔는데.”
클레어는 작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더니, 자연스럽게 강신혁의 어깨에 기대며 이마를 그의 뺨에 꾹꾹 눌러왔다.
“욕 엄청 먹었잖아, 어떻게 미성년을 꼬시냐고.”
“에이, 설마.”
그들이 어찌 감히 클레어를 욕하겠나, 싶은 시선을 담아 보내자 그녀가 쿡쿡 웃으며 정정했다.
“그야 대놓고는 못하지. 돌려 말하는 거야. ‘우와, 정말 놀랐어요! 두 사람 다 너무 감쪽같아서!’ 라든가, ‘정말 세기의 커플이네요!’라든가, ‘처음부터 신혁이 정체를 알고 계셨나요?’같은 거.”
“음습해……."
“사실 교사는 학생을 꼬셨다고 하면 바로 아웃이잖아.”
강신혁과 클레어도 순서가 조금 어긋났으면 이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아니 신은아까지 더해 세 사람의 관계를 그렇게 쉽게 설명할 수는 없으리라.
“그래서 괜히 나한테 샘내는 거지, 누군가 은근하게 ‘나도 교사만 아니었으면 얼마든지’같은 소리를 하더라고.”
“으윽, 누굴지 알고 싶지도 않아.”
최소한 자신이 아는 여교사는 아니기를 바랐다.
강신혁이 질색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클레어가 그 모습을 보며 후후 웃고는 조용히 물어왔다.
“괜찮아?”
“괜찮지는 않지만.”
“……응, 실은 나두.”
“그렇다고 멈춰있으면 그네들이 원하는 꼴이 될 뿐이니까.”
사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이 생각하듯, 신은아의 죽음 탓에 침울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리자로부터 신은아가 살아있다는 확답도 받았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를 구해내리라 다짐했다.
다만 같은 히어로 유니버스의 존재인 야누스에게 처참하게 밀려, 양쪽에서 놀아난 신세가 된 것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컸다.
“나, 그 빌어먹을 년을 꺾을 수 있게 만드는 포션을 만들어낼 거야. 물론 복수는 자기한테 부탁해야겠지만.”
“부탁해.”
“응, 그리고 내 힘으로 그 시스템을 다 뜯어고칠 거야.”
클레어가 조용히 다짐하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생생히 알 수 있었다.
“그게 가능할까?”
“저번에 그 세계, 다녀오길 정말 잘했어.”
“사이제논?”
"응."
그녀는 여전히 그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관리하는 시스템도 인간의 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그 개념을 확실히 붙잡았으니까. 물론 자기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당연히 도울 거야.”
“응. 도와줘. 가이아니 요르문간드니, 이상한 것들한테 놀아나는 건 이제 질색이야.”
클레어가 양팔을 뻗어 강신혁을 꽉 붙들었다. 그날 이후로 깊은 얘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인지라, 강신혁도 조금 긴장했지만 이젠 괜찮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앞으로도 파트너로서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상은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한 파트너다.
“저기, 여기 휴게실인데 그렇게 꽁냥대는 건 좀……."
어느덧 빼꼼 열린 문 너머로 카렌이 둘을 지그시 째려보고 있었다. 물론 탁월한 기감으로 그녀의 접근을 알고 있었던 강신혁은 능청스레 대꾸했다.
“이 정도는 다들 하잖아.”
“아니, 전하가 슬슬 우실 것 같으니까 이런 데서는 자중해주지 않을래?”
커플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문을 열자 카렌이 물러나는 게 아니라, 카렌을 시작으로 눈에 익은 멤버들이 줄줄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야 다들 이 주위에서 귀를 세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물론 집음기로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어째서 전부 안으로 들어오는 거지?
“뭐야, 왜.”
“아니, 어차피 네 정체도 뽀록났겠다.”
“마스크드 바커스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논하고 싶어서.”
강신혁이 중얼거리는 말에 백인하가 대꾸하나 싶더니 그 뒤를 받아 이나희가 대꾸했다.
엘레노어는 그녀의 등에 달라붙은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로 조금 훌쩍이고 있는 것은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이제 예전처럼은 안 될 테고, 그냥 당당하게 가고 싶어서. 어쩌면 내가 백양을 이끌겠다고 나가는 것보다, 여기에 남아있는 게 더 이득이 될 수도 있고.”
“판단 한 번 과격하네.”
“나는.”
엘레노어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내 운명을 너한테 걸었으니까. 영국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신분을 확고하게 만들어야 해.”
“아…… 응?”
강신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퍼뜩 깨닫는 것이 있었다.
“설마 영국으로 돌아오래?”
“그리고 거절했어. 하지만 쉽게는 끝나지 않을 테니, 신혁의 도움이 필요해.”
“하."
“전하의 경우는 특수하다 쳐도, 지금쯤 유학생들은 다 비슷한 처지일걸. 그야 신영이 전투길드로 변모한다고 하면 어느 누가 가만히 놔두겠어, 본국으로 소환해서 병사로 써먹기에도 부족한데.”
카렌이 엘레노어의 설명에 덧붙여 말하더니, 강신혁을 빤히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래서, 이쪽에선 유학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메리트를 제시해야 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생각해, 신은혁 씨.”
“야, 일단 쟤 빼고 얘기해.”
“아아아앙! 빼지 마! 나도, 나도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