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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화. < Chapter 53. 소실 - 5 >

- 깡! 깡! 깡!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방 안에 망치질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강신혁은 눈앞의 검에 대고 망치를 계속해서 두드렸다.

신염의 화로에서 한껏 달구어져, 강신혁의 쇠질 아래 형태가 참혹하게 구겨지고 있는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비수스였다.

- 깡! 깡! 깡!

아비수스는 비록 그 성향은 뒤틀려있다지만 과거 모루가 낳은 작품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신살검에 비견될 만한 걸작.

감히 그것을 녹여 두드릴 생각을 그 누가 하겠는가, 설령 그렇게 하고 싶어도 어지간한 능력으로 어찌 이 마검을 녹일 수가 있겠는가.

지구의 초인들이라면 미처 엄두도 내지 못할 파괴공작을 태연하게 해내고 있으면서도 그에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 깡! 깡!

아니…… 오히려 지금은 작업의 난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을 소모시킬 뿐인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은 전생에 겪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다음.”

아비수스를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 강신혁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무기 하나를 더 꺼냈다. 다름 아닌 ‘엑스칼리버 - 디스페어’였다.

요르문간드로 넘어간 오주영이 자신의 능력을 쏟아 부어 만들어낸 지고의 마검으로, 쉬이 부수거나 녹일 수 없는 물건이지만 강신혁은 그것에서 삿된 부분만 걸러내, 검이 지니고 있던 능력만은 보존한 채 괴의 형태로 되돌리고 있었다.

- 깡! 깡! 깡!

강신혁은 이 두 개를 합쳐 새로운 검을 빚어낼 생각이었다.

야누스가 쥐고 있는 신살검에 닿으려면 각각의 힘으로는 부족하니, 아예 두 개를 합쳐버리는 것이 빠르지 않겠는가 싶었다.

프라가라흐와 아스트라페는 논외. 물론 둘 다 굉장히 훌륭한 물건이지만, 이미 속성이 고착되어 있어 재단련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그 둘의 힘을 더한다고 야누스를 넘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만약 신은아가 이 무기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더라면 얘기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 깡!

“……하.”

강신혁은 아비수스와 엑스칼리버를 뭉쳐 하나의 괴로 만드는 작업까지 시행한 직후, 괴로운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두 검의 힘을 보존시켜 하나의 괴로 응축시키는 것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점점 잡념이 커져 더는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작업한다고 해도 새로운 ‘아비수스’가 태어날 뿐, 신살검을 넘을 수는 없으리라. 그런 확신이 들고 나니 절로 망치가 멈췄다.

“빌어먹을……."

- 회원님........

관리자의 조심스러운 메시지가 강신혁의 망막을 두드렸다. 어제오늘 관리자는 계속 이런 느낌이었다.

- 마이룸에, 방문자 요청이.

“누군데요?”

- ……츠쿠요입니다.

하, 실소가 터져 나왔다.

딱히 츠쿠요에게 안 좋은 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이전 지구에 차원 퀘스트가 생겼던 당시 그녀가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엔 정말로 관리자도 츠쿠요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구나, 하고 체념할 뿐.

그저 이전엔 츠쿠요를 막으려 기를 쓰던 관리자가 순순히 그에게 츠쿠요의 방문 요청을 알려온다는 것이, 조금 웃겼다.

“허가할게요.”

- 알겠습니다.

곧 마이룸에 츠쿠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언제나와 같은 전통복 차림새였으나, 표정이 침잠해있어 분위기가 이전과 상당히 다른 느낌이었다.

“모루……."

“좋은 소리 못 들을 줄 알면서 온 표정인데.”

“모루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저는 늘 행복한걸요. 저를 매도해서 기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그리 하세요.”

다른 누가 들으면 강신혁을 비웃는 것인 줄 알겠지만 츠쿠요에게 그럴 의도가 조금도 없다는 것 정도는 그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매도라니. 그녀에게 이번 일의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를 매도한다고 사태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애꿎은 그녀에게 화를 내봤자 강신혁이 바보가 될 뿐이 아니겠는가.

강신혁이 감정을 잃어버린 듯 표정을 지우고 침묵하자 츠쿠요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모루, 제가 당신께 가까이 가도 될까요?”

"......."

강신혁이 작업을 마친 것을 확인한 츠쿠요는 모루 위에 놓인 쇳덩이가 무시무시한 예기와 살기를 발하는 것을 보곤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느슨해진 그의 손아귀에서 망치를 빼내 벽에 걸었다.

그리곤 그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을까 몸을 조금씩 떨면서도 천천히 그를 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강신혁은 클레어가 알면 별로 좋아하진 않겠지, 생각하면서도, 츠쿠요가 그 이상 자신에게 성적인 접촉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그녀의 품에 안겨있기로 했다. 솔직히 그녀를 뿌리칠 기력도 없었다.

“모루는, 역시 모루네요.”

"응?"

그녀가 문득 꺼낸 말에 시선을 주니, 츠쿠요는 모루 위에 놓인 쇳덩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뇨, 이것을 보며 당신이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해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에 벼린 몇 가지 무구들을 떠올렸답니다. 거칠고 가다듬어지지 않은, 폭력적인 사념…… 당신이 그 당시 벼려낸 무구들 가운데 그런 것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 있었지요. 지금 이것도 마찬가지네요."

"......."

역시 츠쿠요는 알아보는가. 그의 전생의 기억에도 분명, 츠쿠요가 모루의 사념이 짙게 담긴 무기에 과하게 반응하던 장면이 있었다.

당시 모루는 그것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츠쿠요를 조금 꺼림칙하게 생각하며, 그녀를 조금 경계했었다…….

오늘 작업을 더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고 생각하는 강신혁을 보며 츠쿠요는 살짝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제가 당신께 탄복한 것은 바로 그런 작품들 때문이었지만, 당신은 곧 감정을 다스려내는 데 성공하셨어요. 물론 그 후로 만들어내신 것들도 매우 훌륭했지만 저는 역시 그것들을 잊지 못해……."

“당신이 그걸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좋은 감정이 담긴 무구는 나쁜 일을 초래해.”

강신혁이 조용히 말했다.

모루였던 당시에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며, 환생하여 히어로 유니버스에 접속한 후로 몇 개인가의 차원 퀘스트를 해결하며 확실히 깨달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요……. 강한 사념이 담긴 무기는 존재만으로 악을 북돋우며, 때로는 생자를 억압하고, 나아가 문명을 무너트리기도 하죠.”

강신혁은 그녀의 말을 듣다 말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츠쿠요는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안다는 듯이 그를 조금 더 세게 껴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모루, 그건 당신이 말했듯 나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랍니다.”

“뭐?”

“생각해보세요. 모루도 차원 퀘스트를 해봤으니 알겠죠, 이 우주에 얼마나 많은 세상이 있는지.”

강신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의 경험은 츠쿠요와 비교하면 티끌만한 수준이겠지만, 그래도 이 우주의 방대함을 깨닫기에는 충분했으니까.

“그러면 그 모든 세계가 멸하지 않고 무한히 발전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다니, 계속 발전할 뿐이겠지.”

“모루, 이미 알고 있으면서 회피하면 안 돼요. 발전할 만큼 발전한 세상은 이윽고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될 거예요. 그래요, 다른 세상으로……."

"음......?"

강신혁은 그녀의 말에 문득 뭔가가 마음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무엇이? 어째서 지금 그녀의 말이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거지?

아, 그래 .

“그건 요르문간드가 하는 짓이잖아.”

“요르문간드가 없다면?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

“정답은 아니오, 랍니다.”

츠쿠요는 무척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요르문간드의 침입을 받지 않고 발전한 세상이 끝내 어떻게 되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라도 한 것처럼.

"요르문간드가 보유하고 있는 차원이동 능력은 확실히 대단해요. 하지만 그것이 요르문간드만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잖아요? 당장 히어로 유니버스에도 있고…… 모루, 당신도 그 씨앗을 틔워냈어요.”

강신혁은 몸을 움찔했다. 이번에 그의 특성이 한 차례 더 진화하며 공간조율 스킬이 공간지배로 변화했다.

당연히 차원을 넘나든다거나 하는 것은 무리지만, 이 스킬에는 분명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진화시키는 그의 특성이 어우러진다면 언젠가 반드시, 그의 힘만으로도 차원을…….

그리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다는 얘기는, 츠쿠요 역시 혼자 힘으로 차원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런 존재가 없었을까요? 차원을 넘나드는 힘으로 다른 세계를 침략하고자 하는 이들이 없었을까요?”

“아니, 하지만 그건…… 그래서야 완전히 요르문간드랑 마찬가지잖아!”

강신혁의 고함소리에도 츠쿠요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네, 문명에 따라 생김새가 판이하게 달라진다면…… 그야말로 요르문간드와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지겠지요? 그 모든 세상을 가만히 놔둔다면, 분명 이 우주는 끔찍한 꼴이 되었을 거예요.”

츠쿠요는 그렇게 말하곤 지그시 강신혁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말했으면 이제 다 알아듣지 않았냐는 듯한 제스처.

알아들었다. 그래서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서…… 뭐야? 내가 만들어낸 무기가 우주로 퍼져 많은 세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잘한 일이라고?”

“선한 존재의 손에 들어가면, 제아무리 깊은 사념이 담긴 무기라도 날뛰지 못해요. 당신의 무구는 세상이 마땅히 멸망해야 할 시점에, 비로소 힘을 발휘한답니다.”

짜증나는 말이지만 짐작 가는 구석이 몇 군데 있다는 점이 더욱 소름끼쳤다. 츠쿠요는 감정이 고조되었는지 그를 더욱 세게 껴안으며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인간의 손에서 태어난 무구가 하나의 세계를 컨트롤하고, 멸망시킨다니……. 모루, 당신은 홀로 우주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랍니다.”

“너."

강신혁이 그녀를 강하게 밀쳐내곤 처음으로 삿대질을 했다.

“나한테 산 무구를 다른 세상에 뿌린 게 너냐?”

“저뿐만이 아니에요, 모루……. 제가 당신의 모든 무구를 구입한 게 아니잖아요?”

그 말에 강신혁은 재차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잘못된 것이냐고 하면 또 그걸 강하게 주장할 자신도 없었다.

츠쿠요의 말에는, 미숙한 그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깊은 업이 담겨있었다.

“가만…… 그럼 요르문간드는?”

문득 생각이 났다.

“설마 요르문간드도 내가 만든 무구들과 같은 작용을 하고 있다고? 야누스가 요르문간드로 넘어간 것도 그래서야?”

“그런 천한 것들과 모루의 능력을 같은 선에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모루의 우아하고 절제된 작품들과, 그저 날뛸 줄만 아는 잡것들을 어찌.”

츠쿠요는 거기에 강한 반감을 보이면서도, 강신혁의 말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지구는…… 지구도, 지나치게 발전한 거냐? 그래서 이번에, 그렇게.”

“지구에는, 당신이 있으니까.”

츠쿠요의 목소리가 다시 조금 가라앉았다.

“당신이 이대로 계속해서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내어, 언젠가 수백만의 초인이 모두 당신의 무구로 무장한다고 생각해보세요.”

"......."

“물론 당신은 그러시지 않겠지요. 하지만 누군가, 과한 욕망을 지닌 누군가가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능력을 갖춘다면? 보다 많은 자원, 보다 많은 부, 보다 많은 인력…… 그것을 노리고 다른 세상을 침공하고자 한다면?”

강신혁은 인간의 선함을 그리 믿지 않는다.

당장 그가 이만우를 통해 판매한 무구들을 최전선의 초인들이 장비하게 되면서, 그들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츠쿠요의 말은 굉장한 비약이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이 쿡 찔리는 느낌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강신혁은 급격히 피곤해져 침대에 주저앉았다.

어떻게든 침착해지고자 몇 시간이고 쇠를 두드렸던 게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 때문에, 그렇게 요르문간드의 습격이 심해졌던 거라고. 나 때문에 은아가......."

"모루, 은아는 무사해요. 정말이에요. 야누스도 조만간 원래대로 되돌아올 테고........"

강신혁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관리자는 자신이 직접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츠쿠요에게 맡기고자 그녀를 불러들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진실이라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인간이 강해지면 요르문간드의 습격이 더 심해진다고?

그래서야 아무리 강해져봤자 승산이 없지 않은가. 그저 모두 죽을 때까지 죽어라 발악하며 쳇바퀴를 돌릴 뿐…….

지구에 마나가 피어난 순간부터, 지구의 운명이 정해져버린 것이 아닌가.

“만약."

강신혁이 그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츠쿠요에게 물었다.

“정말로 우리가 요르문간드를 끝장낸다면?”

“요르문간드는 우리의 거울이에요. 우리가 강해진다면, 그만큼 새로운 그림자가 태어날 뿐이에요.”

그 얘기는 이전에도 들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묻는 거야. 어딘가에는 반드시 요르문간드의 시작점이, 근원이 있을 것 아냐. 그걸 내가 부순다면?”

“근원.”

츠쿠요는 이미 그것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텐데도, 어째선지.

그의 말을 듣고 비로소 납득했다는 듯이,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찾아낼 수 있겠지요. 정말로 그것을 없앤다면, 요르문간드의 멸절이 가능할지도요.”

“그래.”

여러 번 그런 암시는 받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요르문간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스템이었다. 가이아 시스템과는 다른, 하지만 비슷한 기능을 시행하는 시스템.

그렇다면 그 시스템의 핵을 부순다면 시스템은 확실하게 멈춘다.

지금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했다.

“협력해. 은아 건도, 요르문간드 건도.”

“당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좋아. 그럼 오늘은 돌아가 줘.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네, 모루. 그 전에.”

“응? 아……."

그의 부하라도 된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대답한 츠쿠요가, 하지만 얌전히 물러가지는 않겠다는 듯 그의 뺨에 쪽, 입술자국을 남기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강신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이룸의 문을 열었다.

이젠 좋으나 싫으나 현실로 돌아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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