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 Chapter 53. 소실 - 4 >
침식현상은 사라졌지만, 몬스터까지 모두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침식의 영향을 받아 강화되었던 몬스터들이 눈에 띄게 약화되어, 그저 놈들을 막아내는 데 급급할 뿐이었던 초인들도 어찌 서로 힘을 합쳐 죽이는 것이 가능해졌다.
“인형사 씨!”
모든 것이 소실해버린 사태의 한복판에서 넋을 놓고 있던 강신혁을 향해 레드슈즈, 브리짓이 허공을 박차고 달려왔다. 남아있던 몬스터 대부분을 격살해 간신히 상황종료 사인이 떨어진 후였다.
“언니는!?”
“……미안.”
“거짓말, 아니지? 둘 다 그렇게나 강했는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브리짓은 강신혁과 신은아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녀와 전투를 벌이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발하는 기세가 너무 막강해,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조금씩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원래도 강했던 두 사람은 미녀와 싸우는 도중 한 단계, 어쩌면 그 이상 성장해 파격적인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이 상황을 무사히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절망 속에서도 그런 낙관을 하게끔 만드는, 그런 힘이었는데.
“그런데 왜 언니가…… 응? 언니가 왜!”
“내 잘못이야.”
강신혁은 허공에서 기이한 빛을 뿜어내며 변화하는 극천신주를 가만히 바라보며, 텅 빈 목소리로 말했다.
“극천신주만 아니었으면……."
너무 안일했다.
언제까지고 에너지를 공급해주기만 하는 단순한 배터리라고 생각했나? 헤일로의 나뭇가지를 꽂아 넣으면서 폭주의 가능성을 생각하지도 못했단 말인가?
아니, 아니. 당연히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다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야누스에게는 대적할 수 없었을 터였다.
이성적이지는 못했지만, 그 상황에서 강신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과 신은아는 게이트와 함께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눈에 선한 그 광경에 강신혁이 할 말을 잃고 주저앉으려는 그때, 그의 망막 위로 언제나처럼 차분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아뇨, 그녀는 죽지 않았습니다.
‘……정말 멋진 타이밍이네요, 관리자님.’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웃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마치 이 타이밍을 노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완벽한 관리자의 등장에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 야누스가 사라지고 게이트가 소실되어 비로소 재연결이 가능해졌습니다. 최대한 그녀를 빨리 내쫓으려 했지만…….
‘관리자님의 힘으로 야누스의 추방을 가속했다. 뭐 이런 뜻이겠죠.’
- 그렇습니다. 하지만…….
강신혁의 기분을 짐작한 듯 관리자조차 쉽게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생략된 말은 알 수 있다.
관리자가 실제로 얼마나 노력해서 야누스를 얼마나 더 빨리 내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상황은 최악이었으니까.
‘그건 됐어요, 그보다…….'
- 네, 회원님.
강신혁은 어딘가 의뭉스런 구석이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자신에게 헌신했던 관리자에게, 처음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억눌렀다. 어찌되었든 관리자에게 들어야 하는 얘기가 있다.
‘죽지 않았다고요?’
- 그렇습니다. 마지막 순간 일어난 마력폭발- 극천신주도 관여되어 일어난 그것은 아주 작은 하나의 차원을 만들어냈습니다. 은아는 그곳에 갇혔습니다.
그야, 굉장히 거대한 폭발이기는 했다.
게이트의 폭주도 심상치 않았고, 말 그대로 무한한 마력을 뽐내는 신은아의 특성이 진화하기까지 하여 발생한 마력의 폭주 역시도…….
심지어는 거기에 극천신주도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은아가 홀로 게이트에 돌진한 것처럼 보였지만, 극천신주는 이미 둘과 공명하고 있었다.
방금 일어난 마력폭발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지금 극천신주가 변화하고 있는 것도 거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차원에…… 접근은 가능한가요?’
- 히어로 유니버스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갇혔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관리자는 그 직후, 굉장히 의미심장한 투의 메시지를 던져왔다.
- 다만 극천신주가 여전히 그 차원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치 강신혁이 그것을 물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듯이.
관리자가 내놓은 말에 재차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강신혁은 아주 천천히 변화해가고 있는 극천신주를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어 그것을 손에 쥐었다.
오래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이 완성되기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해보였다.
‘기다리라는 거죠.’
- 그렇습니다. 그녀는 안전할 테니, 안심하세요.
‘마치 은아가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한 말투네요.’
- 제때에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회원님.
관리자의 정중한 사과에 강신혁은 자신이 관리자에게 대놓고 시비를 거는 투로 말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설령 관리자가 이 일에 관련되어 있다 한들, 결국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지금 관리자 뿐.
강신혁의 행동은 그야말로 전생의 모루에게는 있을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미안해요, 관리자님. 내 편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회원님. 관리자에게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야 그렇겠지.
강신혁은 차오르는 무수한 감정을 떨쳐내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눈앞에 클레어의 얼굴이 있었다.
“괜찮아……?”
신은아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 터. 강신혁에게 신은아가 소중한 존재이듯, 클레어 역시 신은아를 생각하는 마음은 각별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그 마음을 감추고, 강신혁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진짜 어른에게 어울리는 태도일 것이다.
“미안, 클레어. 내가 지켰어야 했는데……."
“네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 알아. 나야말로, 능력이 부족해서……."
두 사람의 대화의 공백에 오직 그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 담겼다.
서로에게 신은아가 갖는 의미는 제각기였으나, 상실감은 공통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것은 둘의 관계를 대놓고 드러내는 짓이었으나 강신혁이 야누스와 싸우면서 내보인 신위를 생각하면 정말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인형사 씨, 둘이서만 얘기하면 나는 어쩌라고……."
“미안.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까.”
클레어의 품에서 벗어나 간신히 조금 침착한 강신혁이 주위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죽지 않았다면 누가? 신은아가?
브리짓의 눈이 커지자, 강신혁이 다급히 덧붙였다.
“나중에 얘기해. 지금은 다른 일이 너무 많아.”
"으, 응."
클레어 역시 관리자에게 사정설명을 들었을 터, 둘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교환했다.
강신혁은 극천신주를 인벤토리에 넣고는 돌아섰다.
상황이 끝나 이젠 모두가 사상자를 수습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그를 향해 날아드는 시선이 많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우리도 도울까.”
“응. 그나마 피해가 체육관에 국한돼서 다행이야.”
“핵심 인재는 모두 이쪽에 몰려 있었지만……."
피해는 막심했다. 신인전이 끝나면 바로 이곳에서 수여식이 실시될 예정이었던 터라, 신인전에 출전한 선수들은 물론이고 기사왕전, 마도왕전, 투왕전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대부분 체육관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학생들뿐만이 아니다. 미래의 인재를 관찰하고 그들을 길드에 끌어들이려,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유수의 길드의 핵심 인사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신혁과 신은아를 중심으로 마스크드 바커스의 멤버들이 있는 힘껏 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중의 대략 4할은 이미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강신혁은 자신과 친한 이들은 대부분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순간이나마 안심한 자신이 조금 혐오스러워졌다.
“신혁아......."
사상자를 수습하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백인하가 다가왔다. 여태껏 본 적 없던 그의 침중한 안색이 사태의 심각함을 증명했다.
“오혜나는?”
“재웠어.”
오주영의 사념에 지배되어 강신혁에게 칼을 찔러 넣기까지 했으니, 그야 제정신이 아니었겠지. 강신혁은 최대한 그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끔 말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나한테 큰 도움이 됐어. ……네가 잘 달래줘.”
“……고맙다.”
“괜찮다니까.”
“신혁.”
“후배…… 그, 일단 쉬고 나중에 얘기하자. 응?”
백인하가 강신혁에게 말을 거는 것을 시작으로 마스크드 바커스의 멤버들이 그에게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그녀들도 신은아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강신혁의 상태가 겉으로는 멀쩡해보여도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를 어떻게든 위로하려 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동료들의 모습에 강신혁은 얼어붙은 심장이 아주 조금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그러나 지인들이 그에게 합류하는 것을 본 이 중 누군가 입을 열었다.
국내 10위권의 길드에 속한 스카우터였는데, 1학년 때도 강신혁의 시합을 참관했던 것을 지나가듯이 본 기억이 있었다.
“혹시, 강신혁 군이 인형사 신은혁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제와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강신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주위로 퍼져나가는 경악의 감정. 다들 설마하고 있던 상황에 본인이 직접 쐐기를 박은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혹시 나이를 속이고 이 학교에 잠입을……?”
“가짜 신분은 신은혁 쪽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얘기할 수 있을까요?”
“아, 그, 실례했습니다.”
다급히 뒤로 물러서는 그 스카우터에게 어이없음과 감탄이 섞인 시선이 팍 꽂혔다.
지금 이 참혹한 상황에 물어볼 말이 아니었지만, 다들 내심 강신혁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으니까. 좋은 희생양이 되어준 셈이다.
“아니, 정말 신은혁이, 그, 미성년? 잠깐, 이제 랭킹 1위잖,”
“닥쳐 병신아!”
“그보다 협회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신영에서 이만한 일이 터졌는데 여태까지 지원도 오지 않다니 말이 돼?”
강신혁이 풍기는 기세에 감히 그를 더 자극하지 못하고 물러난 사람들이 이제야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함께 일단 그 자리를 물러나려던 강신혁도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게이트가 침식되어 있던 동안 외부에서 간섭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지만, 게이트가 소멸한 지금까지 외부에서 아무런 접근이 없는 것은 이상했다.
아니, 신은아가 중간에 지원으로 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협회 역시 이곳에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쯤 연락이 날아드는 게 당연한 일인데, 어째서…….
“미, 미친.”
“뭐, 너 갑자기 왜……."
“어……."
“말도......."
그때 폰을 꺼내 상황을 확인하던 한 초인이 경직된 목소리를 흘렸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그에게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점차 경악과 침묵이 퍼져갔다.
간과할 수 없는 분위기에 강신혁 역시 인상을 찌푸리며 폰을 꺼내들려 하는데, 돌연 저 멀리 어딘가에서 굉장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 콰아아아아아아앙!
어찌나 거대한 폭발인지, 멀리서 들려오는 것이 분명한데도 소리가 조금도 죽지 않았다.
강신혁은 다급히 반쯤 무너진 체육관 천장 위로 올라가 주위를 훑었다.
여기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을, 그보다 더 거대한 불꽃이 우악스레 잡아먹는 모습이 두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뭐……."
“잠깐, 저기……."
그에 이어서 다급히 뛰어올라온 백인하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아니, 농담이지……. 저거, 협회 본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