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 Chapter 53. 소실 - 1 >
- 내부 회원의 간섭으로 히어로 유니버스의 연결이 일시적으로 끊어진 상태입니다. 관리자는 지금부터 시스템의 수복에 돌입하겠습니다. 그녀는 결코 회원님의 목숨을 노리지 않을 테지만, 그 외의 다른 사람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으니 부디 주의…….
“관리자, 시끄러워. 일이 끝나면 돌아갈 테니 지금은 다물고 있어.”
망막 위로 떠오르던 관리자의 메시지가 차단되고, 강신혁은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 존재감이 강대해서 마치 자신을 제외하고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버린 듯한 착각마저 주는 여성이 그곳에 있었다.
강신혁이 신살검을 처음 얻어 영력으로 그것을 살폈을 때, 그는 그 안에서 정체모를 인영이 아름다운 검무를 추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움직임이었으며, 영력을 효율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다루는 방법으로서 극에 이르러 있었다.
강신혁의 성장은 영력을 각성하고 히어로 유니버스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지만, 그의 전투기술이 제대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검무와 만나면서부터였다.
“……응? 미안, 모루. 이거 모루가 죽이고 싶었어? 이런 벌레한테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는데.”
검을 발했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죽어버린 아델라이드 보댕의 미간에서 검을 뽑아내는 그 동작을 보며 강신혁은 확신했다.
신살검을 들고 검무를 추었던 이는 분명 그녀라고.
손에 들린 신살검을 보고도 확신할 수 없었는데, 검을 다루는 손동작만으로 신기하게도 자연스럽게 납득이 갔다.
그러니까 그녀는, 정말로 안타깝지만, 야누스가 맞았다.
그리고 아마도 츠쿠요 역시 야누스의 지금 모습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안전하다는 얘기만 듣고 안심한 척, 더는 추궁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갔었지. ……난 이미 이런 사태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나와 직접 부딪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겨 외면했던 거야.’
야누스라는 이름의 의미, 신살검의 강탈……. 그리고 요르문간드에 일어난 일련의 변화까지.
상황을 정리해보면 일목요연하지 않은가. 야누스는 지금 요르문간드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요르문간드는 결코 히어로 유니버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관리자도 강신혁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만 했을 뿐.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때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것도 모두 강신혁이 자신을 속여 가며 편한 길로만 걸어온 반작용이리라.
“모루, 다시 말할게. 여기 있는 것들은 전원 죽일 거야. 조금 느슨하게 할 테니, 그 안에 모루는 빠져나가도록 해. 그리고 나중에 다시 얘기를 나누자.”
“……야누스.”
“자아, 어서.”
자신을 모루라고 부르며, 자기자신을 야누스라 칭하는 그녀.
영문을 모를 소리를 한 그녀가 앞으로 가볍게 한 발 내딛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일대에 둔중한 진동이 내달렸다.
- 쿠웅
“깍!?"
“크핫!”
“지, 지진……!”
강신혁은 자신의 목을 졸라오는 느낌에 저항하려 영력을 한껏 끌어올려 자유를 되찾고서야 간신히, 그 진동이 상대의 거대한 영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강신혁 자신이 막대한 영력을 얻어 주위를 압도하는 것이 가능해졌듯이, 상대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력으로 일대를 짓누른 것이다.
특별한 목적을 담지도 않고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 침식된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를 억압한다.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영력을 갖고 있는 강신혁만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하.”
그저 웃음만 나왔다.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물론 야누스와 이전부터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 자리에 야누스가 나타난 것을 그의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허나 미리 아델라이드 보댕의 존재를 인지해두지 못했던 것은 확실히 그의 실수라고 해야 하리라.
과거 나탄 보댕이 요르문간드로 넘어간 과정도 불명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핏줄에도 어떠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했어야 했는데.
꼴에 강해졌다고 전능감에 도취되어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다른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들과 비교하면 아직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능력을 갖고 있을 뿐인데, 그는 주제를 모르고 너무 들떠 있었다.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던 일인데 그러지 못해서 끝내 저 위험한 존재를…… 야누스를 이 장소에 불러들이고 만 것이다.
‘1학년인 오혜나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도 알 수 있었는데.’
강신혁은 검을 쥐고 야누스와 대치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신살검이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안에서는 오주영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를 요르문간드에 들인 것부터가 저것을…… 그러니까 신살검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루, 대련이라면 나중에 해줄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아냐. 귀찮지만…… 일단 일은 끝내야지.”
과거 야누스와 히어로 유니버스의 귓속말 시스템을 이용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는 전혀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 야누스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권태감뿐이었다.
두려운 것은, 전혀 전력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야누스의 기운만으로도 자신은 물론이고 장내의 모든 이가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게이트 침식이 이루어지고 나타난 괴물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강신혁은 이를 악물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꾸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어.”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야누스는 강신혁의 눈을 개의치 않고 검을 휘둘렀다. 허공의 파리를 쫓듯이 가볍게 일검.
- 사아아
강신혁은 그녀의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필사적으로 내달려 자신의 검으로 그것에 맞서고자 했지만, 상대의 속도가 워낙 빨라 검이 이미 7할쯤 내질러진 후에야 간신히 자신의 검을 맞댈 수 있었다.
- 챙!
“컥……!”
검이 충돌하는 순간, 강신혁은 전신에 끔찍한 압력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검과 검을 맞댔을 뿐인데 그의 전신이, 나아가 영혼 마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스킬은 아니지만, 아마도 이것이 신살검무의 진정한 힘이리라. 상대는 존재의 격으로서도, 신체의 힘으로도, 영력의 양으로도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가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충돌 순간 야누스가 검에서 힘을 빼주었기 때문이었다.
“모루, 안 되지. 방해하면.”
“……너.”
간신히 제자리에 버티고 선 강신혁은, 자신이 막아내지 못한 나머지 7할’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의 검이 그려낸 궤적을 따라 보이지 않는 짙은 영력의 칼날이 휘둘러져, 그 경로 상에 있던 모든 것을 베어내 죽인 것이다.
인간도 괴물도 가리지 않고 모조리 가르고 나아간 그 궤적은 끝내 게이트에 침식된 체육관마저 갈라내, 천장을 파괴하고 핏빛으로 물든 하늘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침식에서 풀려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라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게이트의 핵이 만들어내는 기운이 점차로 퍼져 체육관 외부로 뻗어나가며 침식의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모루와 만나서 반가운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여기에 체재할 수 있는 시간도 많지는 않아.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알겠어?”
"일!? 사람을 죽이는 게 일이라고……!”
게이트 침식이 이루어지고 발생한 피해보다, 방금 그녀가 장난스럽게 휘두른 일검에 의해 일어난 피해가 훨씬 더 많았다.
클레어는 살아있는 듯했지만 이 와중에 자신의 지인이 모두 살아있어주리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나와 더 떠들고 싶은 거라면, 무척 유감이지만 무력화를 하지 않을 수 없어.”
“야누스!”
그 혹은 그녀와 자신의 친분은 지금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강신혁은 그녀가 다시금 휘두르려고 치켜든 신살검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아스트라페는 무려 X랭크의 무구지만 신살검을 막아내면서 약간 이가 나갔다. 아마 그가 만든 빛의 검도 비슷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둘 다 현계한도를 돌파하는 무구이니, 지금 야누스가 들고 있는 신살검과 비교해도 결코 많이 부족하지는 않다.
요는 무구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의 문제다. 강신혁이 히어로 유니버스의 VIP가 된 것은, 결국 그가 제작 계열의 능력자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강신혁은 오래도록 보관만 해왔던 헤일로의 나뭇가지를 꺼냈다.
야누스가 그것을 보며 눈을 조금 크게 뜨는 것을 개의치 않고, 그것을 극천신주에 냅다 꽂았다.
사실 이렇게 막무가내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만 쓰려면 충분할 터였다.
헤일로의 나뭇가지로 인해 극천신주는 폭발적인 마력을 뿜어내게 되었지만, 강신혁은 그것을 즉시 자신의 벨트에 채워, 모든 에너지를 스스로에게 수렴시켰다.
당장 쏟아내지 않으면 그의 전신이 폭발해버리겠지만, 다행히 이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을 만한 엄청난 무구가 이미 그에게는 여럿 있다.
“모루.”
“어디 해보자고.”
그는 한 손에는 아스트라페를, 다른 한 손에는 만들자마자 주위 반응이 두려워 인벤토리에 넣어버렸던 빛의 검을 들었다.
자신이 검술로 상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단 한 번의 충돌로도 아주 잘 알았다.
한 번 더 부딪치게 되면 그땐 꼼짝없이 무력화 당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최대한 상대의 발을 묶기 위해, 그는 아티팩트의 근원의 힘을 폭발시킬 생각이었다. 영력으로 무구를 자극해, 아티팩트가 지닌 능력을 극한으로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프라가라흐]
[????]
[특수능력 - 은하수, 멸광, ???, ???]
*은하수 : 무구에 깃든 신의 권능으로 하늘의 무수한 별들의 힘을 조종해, 적을 속박한다.
*멸광 : 빛과 같이 내쏘아져 반드시 적을 멸한다.
*???
*???
사실 자신이 만들어놓고 등급도 확인하지 못한 검이라 실력이 늘어나기 전까진 결코 꺼내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강신혁이 두 무구를 쥐고 그 힘을 자극시키는 모습에, 야누스조차 눈을 크게 떴다.
“신의 힘이구나. 신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야. 하긴 그러니 나의 신살검을 만들 수 있었겠지……. 역시 다시 만져줬으면 좋겠어. 이 저급한 혼으로는 신살검의 구멍을 미처 채울 수 없거든.”
“조심해라, 야누스.”
그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서가 아니다.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모루, 왜 이렇게 뜨거워?”
“은하수!”
"큭......!"
- 차르르르
빛의 검, 프라가라흐의 권능을 발동한 순간 붉게 물든 하늘 저 너머로부터 무수한 빛이 반짝이며 수십 개의 사슬이 떨어져 내렸다!
침식된 게이트 안이기에 그 위력이 줄기는 했으나, 하늘에 박힌 별들의 힘은 어떻게든 게이트를 뚫고 들어와 야누스의 몸을 속박했다.
그는 아스트라페와 프라가라흐에 일시에 넘쳐나는 에너지를 모조리 쏟아버리며 그 둘의 특수능력을 모조리 발동시켰다.
- 콰앙!
적에게 벼락을 떨구어 멸하는 신벌, 빛이 되어 적을 관통해 죽이는 멸광!
아스트라페와 프라가라흐는 일시에 그의 손에서 사라져, 하나는 번개가 되어, 하나는 빛이 되어 위와 옆에서 야누스를 향해 쇄도했다!
이미 프라가라흐의 특수능력 은하수에 의해 속박되어 있던 야누스는 도저히 그것을 피할 길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야누스의 대응은 강신혁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모루, 이건 아직 완전히 네 것이 아닌 것 같네!”
두 공격이 일시에 야누스를 범하려던 그때, 야누스는 자신의 영력을 내쏘아 우선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프라가라흐를 붙들었다.
강신혁의 몸을 파이프로 삼아, 극천신주로부터 비롯된 어마어마한 기운이 프라가라흐를 타고 폭주하며 야누스에게 해를 끼쳤으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받아내며 기어이 그것의 통제권을 얻어, 위에서 떨어져 내리던 벼락, 아스트라페를 쳐냈다.
직후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신살검을 조종해 이번엔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사슬들을 모조리 풀어냈다.
“돌려줄게. 조금, 못 쓰게 된 것 같긴 한데.”
허공에 둥둥 뜬 아스트라페와 프라가라흐가 강신혁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강신혁은 그것을 허탈한 심정으로 보다, 문득 눈치 챈 것이 있었다.
검 안에 야누스의 영력이 깃들어있었던 것이다.
“큿!? ”
“죽이진 않아. 결코.”
야누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롭네, 모루. 일단 조금 자고 있어.”
두 검이 곧장 날을 세워 강신혁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도저히 반응할 수 없는 공격에 강신혁이 눈을 부릅뜬 그때.
하늘에서 친 ‘진짜’ 벼락이 두 검을 직격했다.
“너, 죽여 버릴 거야.”
강신혁은 침식된 게이트의 경계를 찢어버리고 안으로 하강해오는 신은아를 보며…… 든든함보다도, 어째선지 한 줄기 불안감을 느꼈다.
이로써 모든 주연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