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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화. < Chapter 52. 마지막 체육대회 - 5 >

이번 투왕전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볼거리가 별로 없었다.

강신혁의 능력이 지나치게 성장한 것도 그렇지만 그나마 그와 싸워서 그럴듯한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인 백인하와 엘레노어가 모두 기사왕전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그 덕에 강신혁은 마법학과 학생들과만 줄창 싸우게 되었는데, 작년도 마도왕이었던 나탄 보댕도 죽어버린 탓에 올해 마법학과의 실력은 정말로 형편없었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별 볼 일 없는 투왕전이 아니었을까, 강신혁은 생각했다.

“정말 멋졌어!”

하지만 클레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뭘 보여준 것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이야.”

“맞아요, 아빠. 사람들에게 어필하기엔 충분했습니다. 특히……."

비타가 아직까지 강신혁의 손에 들려있는 검을 가리키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게 평범한 연습용 철검이라는 건 모두들 알았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면.”

신영에서 펼쳐지는 대회에는 아티팩트의 지참이 두 개까지 허락된다.

초인의 능력에는 초인의 특성, 스킬과 궁합이 맞는 아티팩트의 지원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신혁은 대회 날까지 적절한 아티팩트를 만들어내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이 평범한 연습용 철검을 들고 출전했다.

항상 착용하고 다니는 소울 커넥터도 신은혁과의 연관성 탓에 빼놓았던 탓에 정말로 아티팩트 하나 없이 나간 것이다.

“과연, 아무 생각 없었는데.”

“각 학년에서 고르고 고른 엘리트들을 아무 생각 없이 들고 나온 철검으로 격파할 수 있다는 걸, 모두들 알게 되었을 거예요.”

“맞아, 쿨했어.”

작년 신인전에서도 차마 하지 않았던 짓인데, 최소 C급 이상의 아티팩트를 두 개씩 들고 나온 허접들을 연거푸 격파하고 투왕을 차지한 탓에 그가 돋보였던 모양이다.

강신혁은 자신의 철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조건이라도 없었으면 이번 투왕전의 가치가 떨어졌을 것이다.

“그럼 이제 뭐해?”

“신인전 결승. 오혜나가 나와.”

“걱정돼?”

“아니, 실수하면 갈구려고.”

강신혁의 말에 클레어는 쿡 웃음을 터트렸다.

일부러 엄한 태도로 말하는 쪽이 더 속내가 잘 보인다는 것을 그는 과연 알까.

아니, 스스로는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귀여운 것이다.

끌어안고 뽀뽀라도 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의미로 어서 강신혁이 졸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주위를 휘휘 둘러본 후 아무도 모르게 강신혁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것을 발견한 비타가 헤, 작게 웃으며 두 사람의 모습을 가려주는 위치로 이동했다. 아주 센스 넘치는 딸이었다.

“체육대회는 다 끝난 거지?”

“응. 신인전 결승이 마지막 무대야.”

클레어에게 손이 잡혀 조금 부끄러워하던 강신혁은, 그녀의 질문을 듣곤 이내 작년도 체육대회를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아항, 그렇게 모든 관심이 신인전 결승으로 몰리는 거구나.”

“투왕전이 더 볼거리가 많으면 투왕전 쪽이 맨 마지막으로 밀리기도 하는데, 이번 년도는……."

사실 투왕전에서 강신혁이 출전한 모든 시합이 지나치게 빨리 끝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했다.

강신혁이 오혜나의 결승전을 보고 싶어서 서둘렀다기보다는 상대가 다 약했던 탓이지만, 솔직하게 그렇게 말했음에도 클레어는 히죽 히죽 웃으며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은 스승님이네.”

“아니라니까……."

이번년도 신인전 결승은 제1체육관에서 실시된다. 강신혁이 클레어와 비타와 함께 이동하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다가온 엘레노어와 카렌이 둘에게 합류했다.

“온니."

“안녕."

"손........"

“아, 그렇지.”

슬슬 주위에 사람이 많아져 비타만으로는 가리기가 힘들었다.

클레어가 못내 아쉬워하며 강신혁의 손을 놓는데 엘레노어가 그의 빈 손을 꽉 쥐었다.

"응? 으응?"

“부단장이, 단장을 에스코트.”

“언제 생긴 법이야?”

“나도 손잡고 싶었어.”

“이젠 감추지도 않는구나, 얘가.”

클레어가 어이없어하며 말하는데, 반대편에서 비타가 비어있던 강신혁의 나머지 손을 잡으며 수줍게 웃었다.

“그럼 저도 잡을래요. 손, 잡고 싶었어요.”

“그래그래, 마음대로 해.”

"......."

강신혁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클레어는 조금 안심한 기색이 된 반면 엘레노어와 카렌의 눈은 가늘어졌다.

“그래서 신혁아, 이 예쁜 언니는 누군데? 또 어디서 꼬셔온 건데?”

“어제도 있었는데, 대체……?”

“몰라도 돼.”

엘레노어가 새로운 멤버인 비타를 견제하느라 클레어와 기 싸움을 하지 않고 끝났다.

주위의 시선을 끌지 않고 끝나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지만, 미녀 넷에 둘러싸여있는 시점에서 이미 그는 폭풍의 핵과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주위 이목을 싹쓸이하며 이동하다 보니 지인을 발견하기도 쉬웠다.

“시뇨기!”

“아, 백인하. 아직 안 들어가고 있었냐?”

“학생회 사람들이랑 잠깐 얘기하느라. 선배, 그럼 나중에.”

체육관 앞에서 학생회 멤버들과 얘기하고 있던 백인하가 강신혁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데, 학생회 멤버들이 그의 소매를 잡아끌며 한 마디씩 던졌다.

“인하 너, 오늘 뒤풀이는 와야 된다?”

“인하 안 오면 나도 안 가!”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배.”

게임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메시지를 던지는 여자들과, 그녀들에게 적당히 대답해주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백인하. 강신혁은 혹시 저 사람들이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람 맞아요.”

“내 마음 좀 읽지 말아줄래, 비타?”

“그야 저도 똑같이 생각했으니까.”

강신혁의 영력을 기초로 하여 탄생한 존재이기 때문인 것인가. 하지만 그의 속내를 읽어내는 건 관리자와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시뇩아, 이 하렘 뭐냐.”

“그건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인데…… 아.”

뒤늦게 자신이 아직까지 엘레노어와 비타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강신혁은 곧장 둘의 손을 놓았다.

“그래서 이 분은 언제 소개해줄 건데?”

“소개 안해준다고 했지.”

강신혁이 백인하를 밀어내며 비타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있으려니 녀석이 클레어를 보며 다급히 물었다.

“누님, 남친이 바람피려고 하는데요, 이거 괜찮은 거예요? 네?”

“바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너, 비타한테 접근하지 마.”

“컥.”

그들은 백인하를 밀어내며 체육관 안에 들어섰다.

다행히 양 선수가 시합장 위로 올라왔을 뿐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는데, 강신혁은 어째 오혜나와 마주하고 있는 상대를 어디선가 봤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화려한 금발의, 귀공녀처럼 우아하고 매력적인 여자아이. 남들과 같은 교복을 걸치고 있는데도 귀족적인 분위기가 풍겨나는데, 눈매가 제법 날카로운 것이 성격을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역시 저 여자애와 직접 만난 기억은 없는데.

“저거 누구지?”

“마법학과잖아.”

“그건 교복 보면 아는데, 아무리 봐도 유학생……."

“쟤 말이지.”

대답은 다른 이에게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그곳에 이나희가 있었다.

“아델라이드 보댕. 올해 입학한 프랑스 유학생이야.”

“……아니지?”

“맞아.”

이나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탄 보댕의 여동생.”

“홀리 쉿.”

“프랑스인이라니까.”

“퓌탕.”

“그래그래, 나중에 프랑스 가서도 잘 할 것 같네.”

이나희는 그의 프랑스어 욕설에 흐뭇하게 웃어 보인 후 말을 이었다.

“마도왕전에서도 귀찮게 달라붙어서 개빡쳤다니까 진짜. 당연히 내가 이겼지만.”

“어라, 신인전이랑 마도왕전 중복 돼요?”

“당연한 거 아냐? 중복이 안 되는 건 투왕전이랑 신인전뿐이지. 스케줄 겹치니까.”

그랬던가. 강신혁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나희가 어째선지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남부럽지 않은 자신의 가슴팍을 쭉 내밀며 우쭐거렸다.

“왜 그러는데?”

“내가 이겼다니까?”

“뭘?”

“마도왕전.”

“……엥?”

믿을 수 없었지만 강신혁은 일단 확인해두기로 했다.

“선배가 마도왕이라고?”

“응.”

“구라.”

“아니 이 새끼가.”

이나희가 강신혁을 욕하려다가 클레어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는 다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살짝 돌렸다.

“나탄 보댕이 죽었잖아.”

“죽었지.”

“그리고 솔직히 지난 반 년간 나 많이 성장했잖아?”

“그랬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룬에 한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시뇩이 너도 참. 그야 마스크드 바커스 공인 최약체긴 하지만,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나희 누님 마력도 엄청 늘었잖아.”

“백인하 넌 나중에 뒤졌어. 암튼, 그 뭐냐. 그것도 있고.”

‘그것’이라고 말하며 강신혁을 힐끔하는 이나희. 강신혁은 그 말에 바로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이나희도 상시 그의 버프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과연, 그래서 마도왕이 된 거라고?”

“그야 뭐, 여러 가지로 운이 겹치기는 했지만…… 아무튼!”

“축하해요. 로열 클래스 오겠네.”

“1년밖에 없긴 하지만…… 헤.”

강신혁이 순순히 축하의 말을 던지자 이나희 역시 맑게 웃어보였다. 단 클레어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나희 너, 신혁이 방에 몰래 숨어들어온다거나 하는 짓은 안 되는 거 알지?”

“그야 당연하죠, 언니도 참.”

“로열 클래스, 전부 감시하고 있으니까.”

“언니 그런 짓까지……."

아델라이드 보댕에 관한 얘기는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야 다시 제대로 나눌 수 있었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니 나탄 보댕의 동생이어서였구나. 학교에서 잘도 받아줬네.”

“배신자가 된 건 나탄 보댕이지 동생이 아니었으니까. 오빠를 닮아서 굉장히 뛰어난 재능이기도 했고.”

“그렇단 말이지……."

강신혁은 오혜나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아델라이드 보댕을 지그시 바라보며 희미한 한숨을 흘렸다.

공교로워도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나. 어찌 보면 그녀는 오혜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오혜나가 그랬듯이 그녀 역시 그날 나탄 보댕을 죽인 ‘신은혁’을 증오하고 있지 않을까……?

다만 놀라운 것은 여태까지 그녀의 이름을 들은 기억이 없다는 점이다.

“이번 년도는 네가 워낙 떠들썩하게 시선을 몰고 다니기도 했고, 저 녀석도 얌전했던 모양이라. 이번 마도왕전 전까지는.”

“그래서 어떤데? 오혜나가 질 것 같아?”

“으음, 아슬아슬하게 이길 것도 같은데.”

이나희는 말을 하면서도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하긴 이나희부터가 오혜나와 맞붙어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 그런 것이리라.

그녀에게는 아티팩트 제작자로서의 욕심밖에는 없는 줄 알았는데, 본인의 전투능력에 대해서도 욕심이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웠다.

“더 강해질 거야.”

“상냥한 목소리로 달래지 마, 확 덮치고 싶어지니까.”

눈이 진심이었다. 강신혁이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이 사람 진짜 싫어.”

“괜찮아, 내가 처리할게.”

“언니? 언니 농담, 잠깐만, 언니!?”

그런데 그때였다.

순간이지만, 시합장 위에 서 있던 아델라이드 보댕의 눈이 강신혁을 향한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든 것이다.

그를 알아보는 건가? 그녀는 설마 강신혁의 정체가 신은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무대가 된 신인전 결승전, 시합 선언이 떨어진 순간.

신영의 모든 내부인사와 한국 내외의 초인들이 모여 있던 그곳에.

지구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규모의 게이트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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