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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화. < Chapter 52. 마지막 체육대회 - 4 >

그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기사왕전과 마도왕전, 신인전과 투왕전이 개시되었다.

신인전과 투왕전의 본선은 내일이지만 기사왕전과 마도왕전은 오늘 본선까지 끝이 난다.

강신혁은 오전에 출전한 시합에서 모조리 이겨 가볍게 본선 16강 진출을 확정짓고는, 기사왕전을 보러 1체육관으로 향했다. 그 옆에는 어째선지 브리짓이 있었다.

“당신 왜 있어?”

“은혁 씨랑 데이트하러 왔는데?”

강신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 세계랭킹 4위인 그녀이니 누구도 그들의 말을 엿듣지 않는 틈을 잘 골라서 말한 것이겠지만…….

강신혁은 교복 가슴주머니에 들어있던 개량판 집음기(초소형화는 물론이고 범위조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아티팩트의 영역에 이르렀다!)를 켜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며,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으려 드는 브리짓을 날카롭게 째렸다.

“한 번만 더 그렇게 불러봐.”

“죄송합니다.”

강신혁의 차가운 시선을 견뎌내지 못한 브리짓이 얌전히 사과했다.

물론 그런 태도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건지 냅다 그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려온 것이다.

“화났어요? 뽀뽀해줄 테니까 화 풀어요, 응?”

“하……."

강신혁은 냉정히 그녀의 팔짱을 풀며 물었다.

“이름만 안 부른다고 장땡이 아냐. 가뜩이나 클레어랑 친하게 지내는 걸로 주목을 받는데, 당신이랑도 친하다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이 의심할 것 아니에요.”

“그건 아냐. 마스크드 바커스 영입 대상이라고 하면 돼.”

“어?”

그럴 듯한데?

마침 강신혁은 지금 신영에서 최고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인재.

온갖 길드에서 탐을 내고 있는데, 비록 비공식 집단이라지만 젊은 초인들의 모임인(대표인 클레어나 신은혁 탓에 그렇게 알려졌다.) 마스크드 바커스에서 접근을 해온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마침 그는 클레어의 개인 후원을 받고 있는(그렇게 알려졌다.) 입장이기도 하고, 졸업 후 마스크드 바커스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하면 그 누가 태클을 걸겠는가.

“그러니까 내가 미인계로 꼬신다는 작전인 척을 이렇게……."

“그래도 그건 무리가 있으니까 하지 맙시다.”

“아니, 인형사 씨 진짜 고자야? 그냥 준다는데 못 받아먹어 왜?”

"당신은 항상 자신감 과잉이야.”

강신혁은 코웃음을 치며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시합 중이었기에 두 사람에게 쏠리는 시선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의 빠른 걸음에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잽싸게 따라붙은 브리짓이 빤히 보이는 우는 시늉을 했다.

“너무 쌀쌀맞아, 슬퍼. 오늘 저녁엔 언니 품에서 펑펑 울 거야.”

“번개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응, 역시 너무 잘 안다니까……."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는데, 브리짓은 좋은 떡밥을 물었다는 투로 짓궂은 표정을 만들어냈다.

“우리 둘뿐이니까 허심탄회하게 말해 봐요, 삼각관계 맞지?”

강신혁은 그녀를 무시하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침 백인하의 시합이었다.

그에게 무시를 당한 브리짓은 굴하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었다.

“요즘 언니 분위기 바뀐 거 알아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울적한 분위기일 때가 많았는데…… 아, 물론 그것도 내 취향이긴 했는데? 오히려 외로워 보이는 게 품에 꼭 끌어 안아주고 싶달까……."

강신혁은 계속해서 그녀를 무시하며 경기를 관람했다.

백인하는 무기도 들지 않고 나왔는데, 요즘은 강신혁이 만들어준 총을 주로 쓰고 있는 만큼 이 무대에서 그의 본 실력을 보기는 힘들 터였다.

“그랬는데 요즘은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해서, 분명 똑같은 무표정인데 뺨이 붉어. 아주 얼굴에 꽃이 폈다니까. 내 보기에 그건 사랑이야.”

강신혁은 그녀를 무시하며 백인하가 상대를 어렵지 않게 몰아붙이는 것을…….

갑자기 그녀가 강신혁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언니랑 했죠?”

“안 했어, 미친년아.”

도저히 브리짓에게 윽박지르지 않고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답에 만족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삼각관계이기는 하구나.”

“하……."

부정할까 했지만, 그랬다가 일이 더 귀찮아지리라는 확신이 어째선지 들었다.

그는 끝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알았으면 이제 은아 선배 말고 다른 사람 알아봐요.”

"오."

브리짓이 그 말에 감탄한 기색으로 박수를 쳤다.

시합이 시작되고 빠르게 상대를 몰아붙여 승리한 백인하는 브리짓이 자신에게 박수를 치는 건줄 알고 손을 흔들어 보이며 좋아했다.

오혜나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브리짓을 째려봤을 텐데, 다행히도 그녀는 지금 제2체육관에서 펼쳐지는 신인전 예선에 참가하고 있었다.

“인형사 씨가 그렇게 말해줄 줄은 몰랐네. 은아 언니 부담된다면서 나한테 언니를 꼬시라고 할 줄 알았어.”

“뭐야, 그 쓰레기는.”

“하지만 얼마 전까지 그런 느낌이지 않았던가?”

“아니 그건 아니지……."

강신혁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완전히는 부정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야 정말로 신은아가 그쪽으로 넘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나 클레어 말고 다른 사람과도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으니까.

침묵하는 강신혁을 보며 헤, 웃은 브리짓이 말했다.

“걸으려는 거구나, 수라의 길을.”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와 가지고. 일본 애니메이션 적당히 봐요, 진짜.”

“아냐, 한국 커뮤니티에서 본 거…… 아앗.”

그는 브리짓의 매끈매끈한 이마에 딱밤을 먹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라의 길이고 자시고, 은아가 그렇게 된 데에는 내 탓도 있으니까. 책임지려는 것뿐이에요.”

“사랑은?”

“사랑도 있지. 있는데, 그게 남녀 간의 사랑이 맞는지는 확신이 없고.”

다만 신은아가 자신에게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인 것만은 확실하다.

되살아난 모루의 기억과 감정이 강신혁의 그것과 뒤섞여 정확히 그가 신은아에게 품는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사실 가정을 이루는 모든 남녀가 서로에게 이성적인 사랑을 느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신은아에게 깊은 친애의 정을 갖고 있는 강신혁은 합격점을 상회한다고 할 수도 있다.

더구나 상황이 그를 이쪽으로 몰아간다고 해야 할지, 그가 제일 사랑하는 클레어가 이 일에 가장 적극적이기도 한 탓에…… 그는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은아는 가족관계가 치명적으로 안 좋았으니까…… 여기서 나나 클레어가 은아를 내버려두고 둘이서만 가정을 이룬다고 하면, 그녀는 다시 한 번 가족에게 버려진 기분을 느끼게 될 수도 있어. 그건…… 그래, 확실히 좋지 않아. 은아 입장에서는 최악이지. 후, 진즉 이런 점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물론 그의 전생이나 신은아의 가족관계에 대한 얘기를 아무 생각 없이 브리짓에게 늘어놓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그저 자신과 클레어가 신은아와 갖는 관계는 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고 얼버무렸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하지만 브리짓은 쉽게 넘어가주지 않았다. 약간의 집착마저 느껴졌다.

어쩌면 진심으로 신은아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형사 씨, 처음 은아 언니나 클레어 언니랑 만난 건 작년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 둘과 그렇게 깊은 관계가 형성된 거야? 예전부터 줄곧 생각했는데 그게 가장 이해가 안 가.”

“이해하려고 하지 마.”

“우와, 재수 없는 말투. 하지만 그래도 좋아.”

“제발 싫어해줘.”

“아냐, 점점 더 좋아.”

브리짓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거기 나도 껴주면 안 돼요? 응?”

“응, 싫어.”

“은아 언니 때문만이 아니라니까? 인형사 씨도 만만치 않게 좋고, 클레어 언니는…… 사실 내 타입은 아니지만 인형사 씨랑 있을 때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할까, 쌉가능.”

“뭐가 쌉가능인지는 죽어도 말하지 마.”

이전부터 느꼈지만 브리짓은 한국의 안 좋은 문화를 흡수하는 데 아주 천재적이었다.

강신혁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밀어냈다.

“짜증날 때도 있지만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요, 브리짓. 물론 거기까지지만.”

“아냐, 생각해봐.”

브리짓이 진지하게 말했다.

“처음엔 나 엄청 싫어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거기까지 발전했잖아? 그러면 앞으로 나 하기에 따라서는 4P를 한다면 가장 먼저 부르고 싶은 상대다, 까지도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안심해,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아잉, 이런 말도 있잖아. 모든 가능성 열어둬~ 워우워우워~”

“노래 부르지 마.”

하지만 두렵게도 그녀의 이런 태도가 마냥 싫지만도 않았다.

급속도로 이쪽의 AT필드를 녹여오는 재주가 아주, 타고난 인싸의 그것이었다.

사실 강신혁은 물론이고 클레어와 신은아도 쿨한 외모와 달리 내적 찐따였으므로 이런 타입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누나 어서 와요!”

“오, 인하!”

시합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생긴 것일까, 백인하가 잽싸게 관중석까지 올라온 것이다.

주위에 친분을 과시하듯 경쾌하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강신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말해주고 싶은 건 아주 많았지만 지금 당장은…….

“백인하 너, 여유 넘친다 아주?”

“엘레노어 누님만 아니면 경계할 상대가 없어. 브리짓 누나, 저 보러 왔어요?”

“으응? 그럴 리가, 네가 오늘 시합인 것도 몰랐는데. 인형사 씨 꼬시러 왔어.”

집음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여러 의미로.

“너무 솔직하네! 하지만 그게 매력적이야!”

“당연하지, 아하하하!”

뭐가 웃긴 건지 웃음을 터트리는 백인하와 브리짓. 굉장히 얼간이처럼 보였다.

강신혁은 둘이 웃고 있도록 놔두고는 시선을 다시 시합장으로 돌렸다.

이제 엘레노어의 시합이 시작될 때였다.

“백인하, 시합 안 봐도 되겠냐?”

“아니, 지금 내 눈 앞에 미녀가 있는데 왜 시선을 돌려야 하지?”

“그래, 그럼 그러든가.”

어쩌면 백인하도 긴장하고 있는 걸까?

하긴 엘레노어의 능력에 대해서는 같이 마스크드 바커스로서 활동하는 그도 아주 잘 알고 있을 터.

지금 저 녀석이 브리짓에게 달라붙어있는 것도 아마 그 나름의 긴장해소 방법일 터다.

‘아, 나오네. 내가 보이려나. 보이나보네.’

시합장에 올라온 엘레노어가 강신혁을 발견하곤 수줍게 미소 지으며 한 손을 살짝 흔들었다. 화답의 의미로 마주 손을 흔들어주는데 회장이 술렁였다.

그저 친구끼리 인사를 주고받는 것에 불과한데 다른 사람들이 과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강신혁은 세계 최고의 초인들을 길러내는 신영이 원래부터 이런 곳이었던가, 회한을 느꼈다.

그 옆에서 브리짓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즉 4P를 한다면 내가 아니라 저 애라고……? 실망이야, 인형사 씨.”

“당신 진짜 막말 너무 심한 거 알아?”

“응? 4P? 무슨 얘기…… 핫!?”

“넌 뭐 깨달은 척 하지 말고 빨리 내려가, 새꺄.”

이러다 마스크드 바커스 내에서 공인되게 생겼다. 강신혁은 진절머리를 내며 백인하를 아래로 밀어냈다.

그로부터 대략 2시간 후에 펼쳐진 결승전에서, 백인하와 엘레노어는 치열하게 맞붙었으나 결국 빠른 속도로도 엘레노어를 뚫지 못한 백인하가 안타깝게 패배하고 말았다.

“아, 이걸 지네.”

백인하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였지만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강신혁은 친구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괜찮아, 내년엔 엘리가 없으니까.”

“시뇩아, 진짜 세게 때려도 됨?”

“노노, 오늘도 클레어랑 만나야 돼.”

“그 말 들으니까 더 때리고 싶다, 진짜……."

체육대회는 이미 청팀의 승리가 확정되었고, 기사왕전도 무사히 끝났다.

백인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비룡기사단 입장에서는 단장인 엘레노어가 기사왕을 차지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았으니까.

이제 굵직한 행사 중 남은 것은 투왕전과 신인전 뿐.

강신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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