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 Chapter 52. 마지막 체육대회 - 2 >
“그래서 어떻게 됐어?”
강신혁이 이마에 파란 띠를 묶으며 하는 말에, 백인하가 마찬가지로 띠를 매며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말했다.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자.”
“절반 실패란 얘기잖아, 새꺄.”
왜냐면 오늘 그들은 릴레이와 기마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구세대 체육대회의 핵심은 고스란히 남은 셈이다!
그들이 작년 기마전에서 날뛰었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는지, 벌써부터 강신혁과 백인하에게 꽂히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웃기는 것은 개중 1학년들의 시선이 제일 날카롭다는 점이다.
“야, 저기 둘 같이 있다.”
“실물 보는 건 처음임.”
“백인하가 더 낫네.”
“아, 지랄. 우리 신혁 오빠가 훨씬 잘생겼거든.”
“아무튼 저 둘이 작년 체육대회에서……."
하긴 저들은 강신혁과 백인하의 실력을 말로만 들었을 테니, 어쩌면 오늘이 그것을 확인하기에 가장 좋은 날일지도 모른다.
백인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저 유망한 인재들을 길드로 끌어올 가장 큰 찬스가 바로 오늘이란 얘기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관심의 핵심에 기마전이 있는 거냐고!
저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또 광대 노릇을 해야 한다니!
“고리타분한 경기를 전면폐지하고 화끈 폭발하는 경기로 리뉴얼한다고 하지 않았었냐? 어?”
“하지만 높으신 분들이 죽어도 이 두 개는 봐야겠다잖아.”
“대체 릴레이랑 기마전에 뭐가 있기에……."
“글쎄, 저들 젊은 날의 혼 같은……?”
“하……."
그나마 백인하가 절반의 성공이라고 한 만큼 나머지 경기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조별로 특별 제작된 인공던전을 클리어해 클리어 시간을 겨루는 스피드런이나,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대형 몬스터의 가상 레이드 등등,
그야말로 초인학교에 어울리는 경기로 프로그램이 꽉 차 있었다.
그리고 보상으로 성적에 보탬이 되는 점수를 부여한다는 얘기도 있었기에 학생들은 말 그대로 불타오르고 있었고,
가뜩이나 우수한 학생이 몰려있는 A반의 경우 한 사람마다 나갈 수 있는 경기의 수가 제한되거나,
각 경기마다 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제한되는 등 온갖 제한을 덕지덕지 달고도 다른 반을 압도하는 성적을 내고 있었다.
“마법학과에는 특별반 없나?”
“없나봐. 안 그래도 작년 신입 중에는 기사학과에서 유망주가 많았잖아.”
“올해도 마찬가지 같은데.”
강신혁은 쓰게 웃으며 말하곤 대운동장 중앙에서 펼쳐지는 경기에 시선을 주었다.
지금 대운동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기는 오혜나를 필두로 1학년들이 참가한 장애물 베기였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작거나 큰 장애물들을 몸에 닿기 전에 요격하거나 피하는 경기로, 오혜나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장애물을 얼려 부수는 압도적인 위용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냥 마력자랑 대회인가. 마법학과 애들이 오혜나 째려보는 거 보여? 우리도 마력만 많았으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딱 그런 눈빛이잖아.”
“바보냐, 저런 건 세심한 컨트롤이 중요한거라고. 마력만 많다고 불규칙적으로 날아드는 장애물들을 모조리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거든?"
아니, 장애물이 일정 범위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그대로 얼려버리는 걸로 봐선 그닥 세심한 컨트롤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하지만 백인하가 오혜나를 감싸는 거야 항상 있는 일이니 그런 셈 치기로 했다.
더구나 저 어린 나이에 많은 양의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재능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학생들에게든 관중에게든 그녀의 능력이 제대로 어필될 터였다.
“저 아이가 그 신검의……."
“예쁘군, 다행히도 모친을 닮았어.”
“하지만…… 뱅가드에 대한 조사는 다 끝난 거야? 그 오주영의 딸인데 저렇게 놔둬도 되는 건지, 원."
오혜나가 활약하는 모습을 백인하와 함께 가만히 보고 있자니, 관중석에서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스테이터스가 초월적으로 높다는 것은 이럴 때에 한해서 그닥 좋지 않다.
저들이 주위에 들리지 않게 하려 노력할수록 더욱 강신혁의 귓가에 쏙쏙 박히는 기분이었다.
“엉? 아……."
백인하 역시 강신혁의 불쾌한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고 대충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래도 제자라고 신경 쓰이냐?”
“아니, 난 원래 저렇게 뒤에서 쑥덕거리는 것들을 별로 안 좋아해.”
“동병상련이냐고.”
백인하가 씁쓸하게 웃으며 강신혁의 어깨를 때렸다.
그 말이 맞았기에 강신혁은 괜히 부정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히어로 유니버스다, 모루다, 하면서 아무리 새로운 기억이 덧칠되어도, 그 근간에는 부족한 특성을 타고나 많은 사람의 멸시어린 시선을 견뎌내며 아득바득 성장해온 어린 시절이 선명히 남아있는 것이다.
오혜나는 처음부터 높은 곳에 있었기에 추락 또한 뼈아팠지만, 강신혁에게 밑도 끝도 없이 대들고 백인하에게 부담을 팍팍 주며 기댄 끝에 지금은 어느 정도 버텨낼 힘을 기른 것처럼 보였다.
“아, 역시나 혜나가 이겼어.”
“1학년은커녕 전교 단위로 놓고 봐도 저 망아지 기를 꺾어놓을 만한 인간은 별로 없을 텐데, 당연하지.”
오혜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뭐라 떠들건 말건, 검지를 들어 올리며 지가 제일 잘났다고 만천하에 자랑해대고 있었다.
몇 번이고 밟아줘도 저 자존심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강신혁도 이젠 그냥 허허 웃으며 바라볼 따름이었다.
“야, 시뇨기.”
“어, 아.”
그런데 남 일처럼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음은 강신혁이 참가하는 종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신혁과 백인하는 기마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종목에서 같이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런 페널티를 안고도 2학년 A반은 반별 점수가 가장 높았다.
다른 반과 비교해 명백히 적은 숫자로 나와 압도적으로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들을 어찌 주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학교는 그들을 띄우려고 처음부터 작정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 다녀올게.”
“너무 튀지는 마라.”
“나도 그러고 싶다.”
백인하가 농담 삼아 던진 말에 강신혁은 정색하며 대꾸했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얼마나 귀찮은 일들이 많이 생겼는가를 생각하면 그냥 학교를 나와 버리고 싶은 수준이었다.
‘후,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의 초인학교처럼 조기졸업 제도가 정착되면 좋겠는데.’
날이 갈수록 사회의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버거워진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강신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동장 가운데로 나와 정해진 위치에 서자 거짓말 안 보태고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이가 강신혁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작년만 해도 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든 끌어보겠다고 있는 힘껏 발악했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신은혁의 무구를 드러내고…… 아니, 아니야.’
강신혁은 얌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연습용 철검을 들고 자리에 섰다.
종목 이름은 바로 ‘돌파’, 랜덤하게 주어지는 환경에서 최대한 신속하고 안전하게 빠져나오는 것이 목적으로, 가상환경과 실제 조형물을 섞어놓은 커다란 세트장에서 진행되는 경기였다.
물론 영력을 다루는 강신혁의 눈에는 뭐가 진짜 세트인지, 혹은 환상에 불과한지 속속들이 보였지만 이 경기는 실제 환경을 가정하고 펼쳐지는 것이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초인학교 식으로 개조된 장애물 달리기였다.
'설령 정말로 이것들이 진짜라고 해도……."
강신혁은 눈앞에서 이글이글 끓는 용암의 환상이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천장에 매달려 위협적으로 흔들거리는 마력 돌고드름 따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세상은커녕 지구 기준으로도 높지 않은 수준의 장애물이야.’
지금의 자신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드러내야 할지 여러 번 고민을 했었는데, 경기의 수준을 보아하니 고민을 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강신혁은 더없이 차분해진 마음으로 신호를 기다렸다. 세트장에 숨겨진 영상송출용 카메라에 괜히 얼굴을 한 번 들이대볼까 하다가 참았다.
[작년도 신인왕, 2학년 A클래스 강신혁 선수가 스타트 라인에 섭니다! 과연 이대로 모든 경기의 에이스를 2학년 A반에게 탈취되고 마는가! 모든 선수 제자리에, 준비…… 출발!]
강신혁은 체내의 모든 영력을 억제하고 황룡투기만을 운용하며 바닥을 박찼다.
하지만 그는 이제 황룡투기도 SSS랭크. 전신에 황금의 기운이 휘돌며 빠르게 그의 몸을 허공으로 튕겨냈다!
[강신혁 선수 단연 선두입니다! 그런데 하, 사방에서 날아드는 함정을 인식할 수 없는 속도로 피해내고 있습니다!]
작년 신인전이나 투왕전 당시 들어본 적 있는 듯한 학생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기사학과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다면 그가 인식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종유석은 그저 시선 끌기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용암지대에서 튀어 올라 사방으로 휘날리는 불덩이와, 그 속에서 솟구쳐 그의 다리를 노리는 석순이다.
그러나 강신혁은 윈드 마스터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기의 흐름을 읽고 있었으므로, 그 궤도를 예측한 것처럼 발을 놀리며…… 심지어는 허공을 딛고 장애물을 피해냈다!
[방금 강신혁 선수가 허공을 밟은 것처럼 보였는데요, 제가 착각한 게 아닐까 궁금합…… 아! 중간지점의 보너스를 획득하고 또 허공을 밟으며 튀어나갔습니다! 이번 경기에 아티팩트의 반입은 금지되어 있…… 아, 아티팩트가 아니라고 합니다!]
강신혁은 바람의 보조를 받아 빠르게 골을 통과했다.
아직 2위가 중간지점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데, 그는 모든 용암과 종유석, 바닥이 무너지는 함정 따위를 우습게 뛰어넘어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럴 수가, 이 대회가 강신혁 선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검은 한 번 휘둘러보지도 않고 그대로 골인합니다!]
강신혁이 내보인 퍼포먼스에 순식간에 장내가 끓어올랐다.
비록 그의 능력의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나 방금 그가 내보인 것은 단독으로 훌륭한 특성 취급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능력이었으니!
“특성인가?”
“아니, 특성은 무예에 특화된 계열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저게 특수한 무예인 것 아닐까?”
“흥미로운데.”
“작년 자료는 어땠지? 당연히 투왕전에는 나가겠지?”
초인양성학교의 대회 따위를 보러 이 많은 사람들이 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유망주 발굴을 위해서가 아니던가.
1년 전의 강신혁이 싹이 보이는 인재였다면 지금의 강신혁은 화려하게 개화한 인재였다.
당시에 이미 협회와 뱅가드가 강신혁에게 침을 발라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도 많았지만, 강신혁이 예상을 뛰어넘는 성장을 보여준 지금, 협회나, 하물며 리더를 잃고 추락중인 뱅가드 따위에게 강신혁을 넘겨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는 이가 많았다.
그렇게 많은 이가 김칫국을 마시게 내버려두고 강신혁은 반으로 복귀했다.
“야 강신혁, 그거 뭐냐? 그게 그 허공답보인가 뭔가 하는 거냐?”
“와 그런 개사기 기술을 감추고 있었다고? 너 막 하늘에서 뛰어다닐 수도 있냐?”
같은 A클래스의 학생들까지 그를 귀찮게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쿨하게 무시했다. 그는 입학 초기부터 일관되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선 일절 논하지 않았다.
처음엔 멸시당하는 것이 싫어서, 각성 이후론 지켜야 할 비밀이 너무 많아서.
“하, 능력 이름이라도 말해줄 것이지 치사하게…… 어, 다음 경기 단체전이네.”
“제일 처음으로 죽는 놈이 대역죄인 되는 거다. 미네쌤 눈길 봐.”
A클래스의 누군가 꺼낸 말에 강신혁과 백인하의 시선까지 담임 지민혜가 있는 곳으로 향했으나 곧 원래대로 되돌렸다.
시선이 너무 살벌해서 누구 한 명 죽일 것만 같았다. 아무튼 그녀가 MVP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 반 담임을 맡았지.”
“기어이 나를 투왕전 사퇴시킬 때부터 알아봤어.”
한숨을 내쉬는 백인하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강신혁이 안타까운 투로 말했다.
“그러면 나중에 엘리한테 화 많이 내시겠네.”
“강신혁 너 진짜 뒤진다.”
“힘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써야 되는 거 아니냐?”
“아오 진짜.”
“너희 지금 싸우면 안 돼.”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던 그때 둘 사이로 끼어든 카렌이 비련의 히로인을 흉내 내듯이 그렇게 말했다.
어느덧 주위 시선이 그들에게만 꽂혀있는 것이 느껴졌다.
열기마저 띤, 기대어린 저 시선의 의미를 강신혁은 곧 깨달았다.
즉 이제 곧 기마전이 시작된다는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