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 Chapter 51. 빛과 어둠 양면이 갖춰져 최강 - 4 >
“그걸론 안 돼! 더 날카롭게!”
드물게도 엘레노어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비룡기사단이 독점하고 있는 블랙우드 훈련소의 외부 훈련장에서 신입생들…… 정확히 말하자면 수습 단원들이 1대1로 맞붙고 있었다.
“올해 성적이 작년도보다 낮으면 전원 탈락이야! 망토 달고 싶으면 최소한 신인전 8강에는 들 각오로 해!”
“아니, 작년이면 부단장님이 신인왕 찍었는데 무슨 수로……."
“대답!”
“네, 네엡!”
155센티미터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키를 지닌 그녀에게서 어떻게 그런 쩌렁쩌렁한 소리가 나오는지 감탄이 날 정도였다.
강신혁은 그녀의 뒤에 카렌과 함께 서서 신입생들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1학년들에게서 종종 단장님 좀 말려달라는 시선이 날아들었으나 무시했다.
강신혁은 엘레노어 이상 가는 스파르타였기 때문이다.
“정식 입단은 체육대회 끝나고 하는 거랬지.”
“뭐 그렇지? 내정은 다 되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형식상 그래. 더구나 체육대회나 신인전에서 활약한 야생의 우수생들을 포획하는 작업도 있으니까.”
“하, 그래서 체육대회 끝나고……."
강신혁은 카렌에게서 날아든 답변에 고소했다.
그러고 보면 작년의 자신도 체육대회 때 카렌의 접촉을 받았던가. 자신이야말로 그녀가 말하는 ‘야생의 우수생’이었던 셈이다.
“하, 그땐 아직 내가 시뇩이랑 제일 친했는데……."
작년을 추억하는 것은 카렌도 마찬가지였는지, 괜히 그에게 아련한 시선을 보내며 그런 말을 해왔다.
강신혁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왜 소꿉친구가 보낸 청첩장을 받은 만년 취준생 같은 표정 짓고 있냐. 그리고 시뇩이라고 부르지 마라.”
“아씨, 그런 리얼한 예시 들지 마!”
욱한 카렌이 강신혁을 퍽퍽 때리는데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옆을 보니 도우진이, 앞을 보니 엘레노어가 각각 살벌한 시선으로 째려보고 있어 카렌이 조심스레 강신혁에게서 떨어졌다.
“……혹시 나 단장님한테 찍혔나?”
주위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어오는 카렌을 보고, 강신혁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볼에 꽂히는 도우진의 시선을 의식하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만 걱정하고 있으니까 네가 남친이 안 생기는 거다.”
“잠깐만, 꼬시는 거면 꼬신다고 말해줄래? 나도 마음의 준비를 조금 해야……."
“응, 안 꼬셔.”
“와, 이게 아니라고?”
클레어와 신은아만으로도 머리가 터지겠는데 미쳤다고 카렌을 건드리겠는가.
심지어 안 어울리게 도우진이랑 라이벌 노릇까지 해가면서? 강신혁에게 더 이상 청춘로맨스는 필요 없었다.
- 그렇습니다. 이제 회원님께는 질척질척한 아침드라마가 어울…….
‘조용히 하세요.’
- 500,000HP 보너스!
‘이제야 관리자님 같네.’
카렌에게서 떨어진 강신혁은 도우진에게 안심하라는 의미에서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돌아온 것은 그의 방어력을 세 단계는 낮춰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째려보기였다.
차라리 대놓고 카렌한테 데이트 가자고 꼬시기라도 하던가 왜 엄한 사람을 째려본단 말인가. 강신혁은 한숨을 쉬며 신입생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핫!”
“켁, 항복!”
“오혜나 승! 진 놈은 훈련소 열 바퀴 뛰고 와!”
“후우…… 다음!”
대련을 하고 있는 1학년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오혜나였다.
지금도 강신혁의 버프가 걸려있는 오혜나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실력을 모두 냈다간 대련이고 자시고 의미도 없게 되기 때문에 사지에 움직임을 제약하는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물론 강신혁이 손수 제작한 것으로, 스테이터스를 낮춰 신체를 움직이기 힘들게 만드는 만큼 단련의 효과를 극대화하기에 신체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초인이라면 누구나가 원할 보조 장비였다.
‘저렇게 하고도 신인전 우승은 어려워 보이지 않을 정도니까, 오혜나가 신인전이 아니라 투왕전에 나가려 한 것도 납득은 간다만.’
실제로 그녀는 투왕전에서도 능히 우승을 거둘 만한 인재다.
한때 세계랭킹 1위였던 남자의 유전자를 확실하게 물려받은 데다 강신혁이 만들어준 아티팩트까지 갖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지금 세대의 신영의 인재 수준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것.
지금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비공식 집단 ‘마스크드 바커스’의 인원 대다수가 신영에 속한 학생들이지 않은가!
까놓고 말해 마스크드 바커스의 공인 최약체인 이나희조차 그녀와는 좋은 승부를 보여줄 것이다. 물론 템빨이지만 투왕전은 템빨이 허용되는 대회인 것이다!
‘어찌 보면 시대를 잘못 만났어.’
아니, 강신혁의 눈에 들어 그의 주도 아래 성장할 기회를 잡았으니 운이 최고로 좋았다고 봐야겠지만, 아마 강신혁과 친구들이 졸업하기 전까진 그녀에게 상복은 별로 없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오혜나를 보고 있던(슬슬 그녀가 차고 있는 아티팩트의 제약을 한 단계 올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강신혁의 귓가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나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이번엔 엘레노어였다.
대련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며 강신혁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데, 입술은 벌써 삐죽이고 있었다.
강신혁은 티가 나지 않게 그녀를 째리며 대꾸했다.
“지금 애들 대련하고 있으니까 사적인 대화는 하지 말죠?”
“혜나랑, 사적인 관계야?”
“내가 지금 쟤 신경 쓰게 생겼어?”
“그럼 누구?”
예상치 못하게 날카로운 말이 날아들었다.
힐끗 보니, 엘레노어가 제법 초조한 안색으로 그를 살피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걱정이다.
“누구 때문에 그러는데? 온니?”
“티 나?”
“웅. ……계속 보고 있으니까.”
강신혁은 그녀의 말에 조금 감동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냥 스토커였다.
더구나 엘레노어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그냥 작게 웃고 말았다.
“심각한 일 아니니까 걱정 마. 남한테 얘기할 만한 것도 아니고.”
“그래…… 그래도 난 언제든, 괜찮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뒤로 손을 뻗어 강신혁의 한 손을 굳게 잡았다가, 놓았다.
그를 생각하는 그녀의 따스한 마음이 다이렉트로 전달되는 것만 같아, 강신혁도 결국 웃어주고 말았다.
엘레노어가 배시시 웃으며 부끄러워했다.
“단장님?”
“아, 단장님이 부단장님 손잡는다!”
“부단장님 거짓말쟁이, 여친 아니라고 했으면서!”
“단장님이 날 속였어! 부단장님만 노리고 있었는데!”
그리고 당연히 그것이 들켜 대폭동이 일어났다.
@@@
깡! 깡!
망치질 소리가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방과 후, 이나희와 함께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학교 커뮤니티가 다시 불타고 있다고.”
“네."
깡! 깡! 깡!
강신혁은 규칙적으로 울리는 망치 소리에 마음이 한결 평온해지는 것을 느끼며 대꾸했다.
그러나 이나희는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그를 매도했다.
“너 바보지. 일부러야?”
“제가 아니라 엘리가 그런 거거든요?”
망치질을 멈춘 강신혁은 고개를 들며 투덜거렸다가 이나희의 가벼운 차림을 보고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불 앞이라서 덥다고 해도 그렇지 가슴골이 깊숙이 파인 브라탑 하나만 입고 있으니, 그녀의 과격한 프로포션에 힘입어 실로 흉악한 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시선은 왜 피해? 더 당당하게 봐, 여기. 여기이.”
“아니 옷 좀 제대로 입으라고요. 일부러 그러는 거지?”
“기껏 예쁜 몸으로 태어났는데 꽁꽁 감추고 사는 것도 아깝잖아.”
이나희는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매끈한 겨드랑이며 복부를 자랑했다.
강신혁은 그녀를 밀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몸매 자랑하고 싶으면 다른 데서 자랑하라고.”
“싫어, 밖에서 이러고 다니면 그냥 변태잖아.”
이나희는 그 말 한 마디로 브라탑을 입고 돌아다니는 세상 모든 여자를 적으로 돌렸다.
강신혁은 망치를 놓으며 그녀에게 위협적으로 말했다.
“두꺼운 패딩 입혀버리기 전에 얌전히 옷 챙겨 입어요.”
“……네가 입혀주는 거면 그것도 좀 괜찮을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 확신했는데, 당신은 변태가 맞아.”
가만 듣고 있으면 브리짓을 닮아가는 것도 같다.
하필이면 제일 닮아선 안 될 사람을 닮으려 하다니 이게 무슨 재앙이란 말인가.
강신혁이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호감도 현황을 그녀에게 알려줄까 말까 고민하는데, 문득 이나희가 태도를 바꾸어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 본론인데.”
“아니, 본론이 따로 있었단 말이야?”
그만 작업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이나희가 무시할 수 없는 말을 했다.
“혹시, 그, 언니랑 문제 생겼어?”
"......."
강렬한 데자뷰.
강신혁은 혹시 클레어가 이 둘에게 무슨 얘기를 했나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아니, 하지만 아무리 클레어라도 신은아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타인에게 털어놓는 미친 짓은 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자신의 얼굴에서 그게 티가 난다는 얘기인데…… 그는 일단 눈을 가늘게 뜨며 부정했다.
“아무 문제도 없어요.”
“아냐, 무조건 있어. 여자 문제라고 얼굴에 쓰여 있단 말이야. 얼른 솔직하게 말해봐.”
“정말로, 클레어랑은 없어요.”
“아항, 그러면 뇌제 언니랑 있구나.”
아니, 룬을 깨닫더니 이 선배가 점쟁이로 노선을 바꿨나?
강신혁은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다.
“일이나 합시다.”
“말해줘. 궁금하단 말이야.”
“안 해요.”
“피……."
단호한 태도에 정말로 가망이 없음을 확신한 이나희가 입술을 삐죽이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수시로 선을 넘으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선은 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와 계속 같은 공간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망치를 드는데, 이나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혹시 그런 일 생기면…… 기회는 나한테 먼저 줘야 된다? 난 언제든 괜찮으니까.”
“……아."
강신혁은 그제야 아까 엘레노어가 말했던 ‘난 언제든 괜찮으니까’의 참뜻을 깨닫곤 전율했다.
대답이 굉장히 곤란한데…… 아니, 지금이야말로 다크 마스터리가 활약할 때다!
그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입을 열어 말했다!
"엘리가 먼저 예약 걸어놨는데.”
"뭐 그 망할 년이!? 새치기 하지 않기로 해놓고선!”
아니 이게 아니잖아, 이래서야 불을 더 키울 뿐이 아닌가!
그리고 새치기는 너도 지금 하려고 하잖아!
“지금 당장 그년 죽이고 올게! 그러면 내가 1번이지!”
“아니 선배, 지금은 같이 작업……."
그러나 이나희는 다급히 교복 상의를 걸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말로 엘레노어와 대판 싸우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강신혁이 멍하니 그녀의 그림자를 쫓고 있으려니 관리자가 시니컬한 메시지를 띄웠다.
- 이것으로 불여우를 회원님의 곁에서 쫓아내셨군요. 훌륭한 전략입니다.
“아니, 나중에 큰일 날 것 같은데.”
- 예약이야 누구든 걸어놓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리는 절대 비지 않겠지만요.
“묘한 자신감이네요.”
클레어와 강신혁의 관계를 어째서 관리자가 논하는 것인가.
아니, 예전부터 이런 기미는 종종 있었지만 최근엔 더욱 노골적이지 않은가!
- 오늘 저녁부터 비타가 바에 선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회원님. 가보실 건가요?
“게다가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기까지……."
하지만 비타가 바에 선다니 아비된 노릇으로 가보지 않을 수도 없다.
강신혁은 자신이 두드리고 있던 쇳덩이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이나희가 룬의 씨앗을 불어넣었으니, 이걸로 마이룸에서 작업해놓을 생각이었다. 마무리 작업만 함께 하면 순조로이 완성될 것이다.
빛과 어둠을 함께 다루게 된 결과 비로소 강신혁이 이르게 된 새로운 경지의 병기…… 빔 병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