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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화. < Chapter 51. 빛과 어둠 양면이 갖춰져 최강 - 3 >

생각해보면, 히어로 유니버스 덕분에 얻기 쉬운 것처럼 보여도 본디 속성을 다루는 스킬이란 특성 못지않게 희귀한 것이었다.

이전 오혜나가 강신혁이 바람과 불을 동시에 다루는 것을 보고 경악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자명한 이치다.

오혜나만 해도 세계랭킹 1위 길드의 마스터의 딸로, 어지간한 보물은 눈에 차지도 않는 귀공녀가 아니던가.

그렇게 드문 물건이니 설령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든가 하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설마 관리자님이 그렇게나 다크 마스터리를 권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 바로 그렇습니다. 회원님의 순해빠진 성격으로 험난한 우주를 헤쳐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강신혁은 자신 내부의 소심함이나 배려심 따위가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신도 아니고 감정이나 성향의 크기를 직접 관조해서 느끼는 것은 아니고, 오늘 하루 자신이 했던 행동들이나 친구, 연인과 나눴던 메시지를 돌아보며 판단한 것이다.

‘아니, 이거 어쩔 거냐고.’

- 이것만은 관리자의 판단 밖입니다. 설마 회원님께서 소심함과 함께 도덕심까지 버리고 카사노바로 거듭날 줄은…….

‘아니거든요?’

뭣보다 지금 이 순간,

볼을 발갛게 물들인 신은아가 가벼운 차림으로 침대맡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며 가장 크게 실감했다.

“이, 이십 분 딱 맞춰서 왔네.”

“하……."

‘왜 벌써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는 건데? 이러다 망하는 거 아냐?’

그러나 이전의 그였으면 뒷걸음질을 쳤을 일이거늘, 지금 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 신은아에게 한 발 다가서고 있었다.

스스로도 놀랄 변화였다.

“왜 호텔이야?”

“어제 헤어지고 쭉 여기 있었어.”

“일은?”

“안 해."

신은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강신혁을 올려다보는데, 두 눈이 조금 붉었다.

“누구 땜에 울적해져서.”

"음......."

자신을 탓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운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신은아를 울렸다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조져놓겠지만 자기 자신이니 그럴 수도 없어 난감했다.

좋아, 지금은 자기자신을 믿고 돌격하는 수밖에 없다.

삐진 딸을 달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는 침대로 다가갔다.

“클레어랑 무슨 얘기 했는지 들었어.”

그는 신은아의 곁에 앉으며 말하곤 자신의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신은아는 무척 싫은 표정을 지었다.

“또 애 취급……."

“지금 하는 짓 보면 완전히 애잖아. 그래서, 싫어?”

“너무 싫어.”

말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그녀는 솔직하게 강신혁의 무릎에 누웠다.

그는 신은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나직이 웃곤, 조용히 말했다.

“마음 좀 풀렸어?”

"응....... "

그의 무릎에 얼굴을 누인 신은아는, 대답과는 달리 조금 찡그린 얼굴이었다.

“풀렸다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 속상했는데 고작 머리 쓰다듬어주는 정도로 기분 풀리니까 분해."

그녀의 솔직한 대꾸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은아가 불만스레 물었다.

“또 애라고 할 거야?”

“아니, 안 할게.”

그래도 요즘 좀 어른스러워진 것 같더니, 어제의 사건의 충격이 다시 그녀를 애로 되돌려놓은 것일까.

하긴 그럴 만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참사였다. 클레어와 충분히 대화를 나눈 지금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문득 아래에 시선을 주니, 신은아가 가만히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스, 해주면 안 돼?”

“안 돼.”

“쫌생이.”

강신혁은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따름이었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저번에 거리를 두고 생각하자고 했었는데.”

“그래서 열심히 생각했어.”

“그 결과가 이거야?”

"응."

신은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볼을 붉히며 말했다.

“처, 처음부터 반했다고 하면 믿어?”

“설마 히어로 유니버스에 처음 접속했을 때를 말하는 건 아니지?”

“아냐!”

소리를 빽 지른 그녀가 자기 목소리에 놀란 듯 한 손으로 입가를 막더니, 우물쭈물 망설이며 다시 조심스레 말했다.

“클레어한테, 상담했었단 말야.”

“뭘?”

“첫눈에, 반한 것 같다고……."

“……여덟 살 연하 상대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럴까봐 말 못했던 거니까!”

신은아는 그래놓곤 또 뭐가 짜증나는지 투덜거렸다.

“그런데 클레어한테 뺏길 줄은 상상도 못했어.”

“아니, 내가 먼저 클레어한테 대시한 건데 뭐. 어쩐지 쉽게 안 넘어가더라니 은아 때문에 사리고 있었던 거구나.”

“미워!”

분명 클레어도 처음부터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왜 초반에 거리를 좁히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인지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개운해졌다!

그런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신은아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마나까지 응용한 일격이었지만 이제 강신혁에게 이정도 공격은 솜방망이 정도로 느껴졌다.

“아무튼 내 얘기 들어, 가만히 들으란 말야.”

“알았어, 다 들어줄 테니까 얘기해.”

무릎 위에서 바동거리는 신은아를 붙잡아 진정시키고 나서야 뒷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점점 애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째선지 모르겠다.

“나중에 후배가 할부지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안심했어. 본능적으로 할부지라는 걸 느끼고 있었던 거구나, 하고.”

“그야 그렇지.”

강신혁이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은아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전생의 모루와의 깊은 관계 탓에 생겨난 마음을 연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오히려 신은아도 한 번은 그런 결론을 내렸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하지만 곧 깨달았어. 실수했던 거라고. 처음부터, 그냥 좋아했던 거였는데.”

언제쯤이었을까. 말끝마다 할부지를 붙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아마도 강신혁이 2학기를 맞이했을 즈음부터는 확실하게, 그녀는 깨닫고 있었다.

강신혁은 이야기의 중심을 잡을 수 없는 기분에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모루’에 대한 애정이잖아? 남녀 간의 연정이 아닌, 가족애에 가까운……."

“그것도, 분명히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은아는 말하다 말고 부끄러워졌는지 몸을 빙글 돌려 그의 복부에 얼굴을 밀착시켰다.

조금 간지러워 순간 입을 열지 못했는데, 그 다음 순간 바로 폭탄이 떨어졌다.

“그것만 있으면 이렇게 두근거릴 리가 없단 말이야......."

"......."

- 회원님, 침묵하시면 안 됩니다! 상대의 치밀한 수에 당하지 마시고 지금! 지금이 바로 반격할 때입니다!

강신혁은 광분한 관리자의 메시지를 한 눈으로 흘기며 신은아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얼굴을 그의 복부에 완전히 묻고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이 안 바뀌는걸…… 좋아해……."

- ‘난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대꾸하세요! 다크 마스터리의 힘을 끌어내세요! 배려심과 인내심을 모두 버리고 지금 회원님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으세요! 귀찮은 여자는 질색이라고!

관리자가 계속 초를 치는 바람에 더욱 대응이 어려웠다. 솔직히 지금은 관리자가 더 귀찮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이번엔 관리자가 삐질 테니 꾹 눌러 참았다.

“이제, 할부지라곤 못 불러……."

“그건, 뭐 고마운 일이긴 한데.”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맺혔다.

사실 전생을 거의 대부분 자각한 그에게는 적잖이 섭섭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원래 부모의 품을 벗어나 비로소 성장하는 법이 아니던가?

비록 그 방식이 실로 충격적이긴 하나, 그녀가 과거의 관계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한다면…… 그로선 축하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응, 역시 지나치게 충격적이긴 한데.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는데 정말 나쁜 사람으로 커버렸네. 임자가 있는 남자를 탐내고 말이야.”

“크, 클레어한테 허락 받았다니까……."

“내 마음은 고려도 안 하고. 이렇게 나쁜 여자가 있나.”

“그, 그건…… 미안해……. 어떻게든, 내 마음을 전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강신혁은 쓰게 웃으며 재차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신은아는 지금까지도 애 취급을 하냐는 듯 불만스러움 반,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기쁨 반을 담아 고양이 같은 목소리를 내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알았어, 그럼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진짜!?”

결국 그가 내놓은 답에 신은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강신혁과 얼굴을 마주하고 금세 시선을 딴 데로 돌리려 들었다.

할 말 못할 말 다 했으니 그야 부끄러운 것이 정상이다. 강신혁은 어이가 없어 그녀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뭘 피해, 피하긴.”

“부끄러워.”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어제 같은 짓은 못하지 않을까.”

“나빠!”

또 그의 어깨를 퍽퍽 때리는 신은아였으나 손에선 적잖이 힘이 빠져있었다.

좋아, 어쨌든 이걸로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녀와의 관계에는 여전히 풀어갈 구석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 이것은 그 혼자 끙끙댈 일이 아니라 클레어와도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였다.

클레어의 고뇌와 결심을 하찮게 취급할 수는 없고…… 신은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비록 이성적인 감정은 없다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있어 굉장히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더구나 은아도, 그 두 가지 감정을 구분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모양이니까.’

만약 강신혁의 동화율이 오르는 속도가 조금 낮았다면, 신은아가 감정을 빨리 정리하고 보다 과감하게 나왔다면, 클레어가 친구에 대한 배려심에 한 발 더 뒤로 물러났더라면, 지금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것이다.

강신혁은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제 뒷머리를 헝클어트리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삼류 러브코미디 같은 상황에 빠졌나 고뇌했다.

‘전부 관리자님 탓인가?’

- 자연스럽게 남탓을 하게 되실 줄도 알다니, 과연 다크 마스터리의 주인이십니다.

‘진짜 혼날 줄 알아요.’

- 오히려 바라던 바입니다.

덤으로 관리자와의 관계도 점점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드는데, 이건 뭐 기분 탓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다만 관리자가 한 말씀만 드리자면.

‘네?’

강신혁이 여전히 그의 품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를 않는 신은아를 적당히 토닥여주고 있는데, 관리자가 지금까지의 장난기가 모두 빠진 진지한 메시지를(관리자 본인은 여태까지도 계속 진지했던 모양이지만) 보내왔다.

- 지구의 법률과 관련해 고민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회원님께 하등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 회원님께선 이미 지구의 이치를 벗어나, 우주적인 규모로 활동하는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이 되셨습니다. 일부일처제란 제도는 인간의 감정에 기초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닌, 현대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 더 유리하기 때문에 채택된 제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미 지구는 다른 환경, 다른 세상으로 변화해가고 있으니, 조만간, 아니 당장 지금도 온갖 법률은 아무런 구속력도 갖지 못하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회원님께서 따지셔야 할 문제는 바로 회원님의 정신적, 물리적 득실뿐입니다.

‘..좋은 조언, 고마워요.’

- 관리자는 언제나 회원님께서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에 걸맞은 활약을 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관리자는 정말로 든든해지는 메시지를 보내고는.

- 그래도 역시 불여우는 모두 태워버리고 싶네요. 전부 가이아의 신벌에 죽어버렸으면…….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 방금 발생한 신뢰를 깎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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