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 Chapter 51. 빛과 어둠 양면이 갖춰져 최강 - 1 >
“신혁아!”
“후배!”
장내에 기이한 고요가 감돌던 그때 신은아와 클레어가 유리창을 깨부수고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저게 되면 여태까지 강신혁과 비타는 뭐하러 개고생을 해가며 지하에서부터 뚫고 왔는가 싶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가이아 시스템이, 이 빌딩이. 아니, 어쩌면 이 세계가 갖고 있던 모든 마기를 검이 빨아들여 강신혁에게 넘겨버렸기에, 빌딩의 방어력이 제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 쿠웅!
“어, 어? 기울어져?”
“바로 무너질 거야. 빠져나가자!”
강신혁은 일단 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비타 역시 자신의 친구들의 유품만을 빠르게 챙겼다.
“어!? 무너진다고? 잠깐만, 가이아 시스템도 분석해봐야……."
“오닉스!”
- 뀨!
- 잠깐, 모루 님……!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의 분체가 강신혁에게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 했으나 이미 알고 싶은 것을 전부 안 강신혁은 그것에 볼 일이 없었고, 오닉스는 그의 마음을 아는 듯 힘을 모두 잃은 기계덩어리들을 금마력으로 모두 감싸 먹어치워 버렸다.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의 실수는 본래 세상을 모두 아우르는 시스템을 물리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오닉스는 가이아 시스템의 섭리를 포함하는 시설을 모조리 집어삼켰고, 그것이 가이아 시스템의 분체의 마지막이 되었다.
한 세상을 완전히 지배하던 것치고는 상당히 허무한 퇴장이었다.
“됐어, 이제 오닉스한테 부탁하면 구조를 알려줄 거야.”
“쟤 대체 뭐야!?”
“일단 나가자!”
그러자 빌딩의 붕괴가 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강신혁은 할 말을 잃은 신은아와 클레어를 끌어내 함께 빌딩을 탈출했다.
바람의 힘으로 전원을 감싸 천천히 바닥에 착지할 즈음엔, 이미 빌딩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후였다.
“아, 저것도…… 저것도 챙겨야 돼.”
신은아와 클레어가 자이언트 메탈데스나이트를 상대했던 자리에는 이미 놈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고, 놈의 갑옷 일부만이 축소되어 남겨져 있었다.
검이 모든 마기를 빨아들이면서 시체에 남아있던 부정한 기운이 모조리 사라지고, 순수한 권능의 엑기스만이 남은 것이다.
"후배, 선물."
"응?"
그야 신은아가 잡았으니 선물이라고 하면 선물이겠지만…… 전리품을 건네주면서 볼을 붉히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굉장히 외설적인 전리품인가?
강신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주먹보다 조금 큰 철판을 받아들었다.
모든 마기, 사기가 사라져서인지 순수한 금속이 되어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영력을 뻗어 금속을 살피다 말고 강신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와 동시에 금속에서 황금의 스파크가 파직, 하고 튀었다.
“잠깐만, 이거……."
“세상이.”
“와, 아아……."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금속을 살피고 말을 꺼내려는 그때, 이번엔 세상이 기울었다.
감각이 이지러지고, 땅과 하늘에 마구 금이 갔다.
세계의 규칙이 하나하나 무너지기 시작했다.
물건들이 떠오르거나, 소멸하거나, 마구잡이로 복제되거나, 융합되고 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그 충격적인 광경에 모든 생각이 싹 사라졌다.
- 가이아 시스템의 부재로 세상이 곧 소멸합니다. 바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사이 침착함을 되찾은 관리자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공평하게 울려 퍼졌다.
상황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은 신은아가 곧장 강신혁의 손을 잡았다.
강신혁은 공간조율 스킬을 발동해 그녀와 감각을 일치시켰고, 문제없이 발동한 스킬이 그들을 강신혁의 마이룸으로 이동시켰다.
“다 무사해?”
“응.”
“어떻게든……."
“넵!"
- 뀨우!
충격적인 일의 연속에 다들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사이제논에서 배가 터지도록 기계며 금속을 먹어치우고 진화한 오닉스만 기운이 펄펄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을 관측한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만약 관리자가 미리 공간좌표를 설정해두도록 유도하지 않았다면, 제때에 공간이동을 하지 못하고 그들 또한 갈가리 찢겼을 가능성조차 있었다.
“뭔가…… 더 강해진 것 같아.”
그때 뜬금없이 신은아가 말했다.
“뭐가?”
“아까 그, 세상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시공간에 관해 더 잘 알게 된 느낌이 들어.”
“클레어, 이 사람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원래 그랬으니까 무시하자.”
무슨 소설 주인공도 아니고 이런 일로 힘을 얻다니.
하지만 신은아가 다루는 마법의 랭크가 실제로 올라갔을 뿐더러 그녀의 마력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으니,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후…… 아?"
신은아의 황당한 말 덕에 간신히 여유를 되찾고 보니, 마이룸에 자그마한 변화가 생겨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로 옆에 도구걸이가 생겨나 있었는데, 거기에 망치며 집게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이거.”
강신혁은 말없이 거기 다가가 망치 손잡이를 더듬었다.
손잡이를 감싸고 있는, 여기저기 찢어지고 새로 덧댄 천 쪼가리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 시절의 물건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영력을 불어넣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아예 같은 물건이었던 것이다.
"......."
“후배?”
“쉿, 놔둬."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망치와의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면 다크 마스터리를 얻은 것보다도, 차원 퀘스트의 보상으로 이 망치를 얻은 것이 그에게는 더욱 의미가 큰일인지도 모른다.
망치에는 전생의 모루가 망치질을 했던 시절의 기억과 경험이 모두 담겨있으니 강신혁이 그것을 몸에 새겨 야금술의 수준을 높이는데에도 도움이 될 테고…… 뭣보다도, 전생의 모루의 20년간의 삶이 그대로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적절한 시기에 나와줬네. 관리자의 센스를 인정하긴 싫지만.’
만약 그가 마이룸에 들어왔을 때 바로 이런 기물을 얻었더라면, 그는 모루의 기억과 능력에 휩쓸려 자아에 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여태까지 천천히 동화율을 높이며, 차근차근 영력을 수련해 자신을 형성해왔다. 그 덕에 이런 막대한 ‘근원’을 갖춘 망치를 얻고도 자연스럽게 그 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히려 망치는 지금의 그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마검을 통해 들어온 정보와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 그에게 이질감을 주고 있었는데 이번에 망치로부터 얻은 기억이 자연스럽게 거기에 녹아들면서 순서가 잡히게 된 것이다.
- 동기화가 믿기지 않는 속도로 가속합니다. 현재 동화율 92.9%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신혁이 망치를 제자리에 걸어두고 돌아서자 신은아와 클레어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천연덕스럽게 반문하는 거 봐. 너 거기서 30분간은 그러고 있었어.”
“음, 미안해. 얻은 정보가 너무 많았거든.”
클레어는 자신에게 대답하는 강신혁의 표정에서, 그가 짧은 순간 굉장히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얼굴이 바뀐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원래부터 나이에 비하면 성숙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보다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냥 내가 신혁이를 내 취향에 끼워 맞추고 있는 건가……? 아닌데, 분명히 더 매력적으로 변했는데 뭐가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할 수가 없어……!’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녀의 사랑은 분명히 중증이다. 클레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괜찮은 거지?”
“문제없어. 그렇지, 오닉스. 클레어한테 네가 얻은걸 보여줘.”
- 뀨!
강신혁의 어깨에서 뛰어내린 오닉스가 클레어에게 아장아장 걸어가 등을 내밀었다.
그러자 녀석의 등에 난 가시 중 몇 개인가가 전선처럼 가늘고 길게 늘어났고, 클레어는 그것을 보며 순간 고개를 갸웃하더니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폰을 접촉시켰다.
순식간에 무수한 데이터가 그녀의 폰으로 다운로드되었다.
“……얘 언제부터 컴퓨터 됐어?”
“아마도 오늘부터.”
- 뀨뀨웃!
심지어는 문자 메시지 형식으로 그녀에게 오닉스의 메시지가 전달되기까지 했다. 클레어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자기야아, 나 이거 주라.”
“가져."
“진짜?”
- 뀨웃!?
순식간에 팔려나간 오닉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하자 클레어는 쿡쿡 웃으며 녀석을 안아들었다.
“달라는 건 농담이고, 가끔 빌릴게. 나랑 궁합이 좋을 것 같아.”
“가져가도 되는데.”
- 뀨뀨우웃뀨우웃!
“의외로 충성심이 강한 녀석이네.”
그건 아마도 이번에 포식을 하는 과정에서 녀석의 충성도가 경사스럽게도 100을 달성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강신혁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기에 오닉스의 반응에 웃을 따름이었다.
“아빠, 여기가 지구인가요?”
비타의 질문이었다. 비타는 다른 의미로 멍하니 있었는데, 자신이 태어난 세상을 벗어난 것은 처음일뿐더러 마이룸의 분위기가 너무 독특해서였다.
“여기는 히어로 유니버스에 딸린 공간. 엄밀히 말하면 지구는 아니야.”
“그렇군요……."
“빨리 나가고 싶어?”
"아....... 아뇨."
비타는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슬픈 일이 너무 많아서…… 조금 정도는 차분히 있고 싶어요. 그러니까 잠깐 여기 있을래요.”
“그래……."
말꼬리를 흐린 강신혁이 클레어에게 눈치를 주자, 클레어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 비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품에 안기며 조용히 울었다.
신은아가 그 광경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보더니 강신혁에게 돌아서며 저거 진짜 사람 아니냐는 표정을 짓는 것을 무시하며 관리자에게 확인했다.
“지금이 지구 시간으로는 어느 정도죠, 관리자님?”
- 아직 목요일 밤입니다. 내일 학교를 쉴 필요도 없겠군요.
“아."
사이제논의 미쳐버린 시간비율을 잠시 잊고 있었다!
백인하에게 결석한다고 폼나게 말하고 뛰쳐나왔는데…… 예전 같으면 겁나 쪽팔린다고 생각했겠지만 모루의 기억을 대량으로 받아들여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한 강신혁은 더 이상 그런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정말 계속 거기 있을 거야?”
“여기, 아빠 방이죠? 그럼 오늘밤만 있을게요. 음, 그래도 되죠?”
강신혁에게 대꾸한 비타가 이어서 허공에 대고 허락을 구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녀가 누구에게 말을 걸었는지는,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관리자 언니."
”언니……."
“언니……."
“언니……."
강신혁과 클레어, 신은아의 목소리가 사이좋게 한데 겹쳐졌다. 관리자가 곧장 대꾸했다.
- 관리자에게 할 말이 있다면 직접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서 관리자를 더 공격하면 확실히 곤란한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후일이 두렵다.
아까 다크 마스터리와 관련해서 그녀에게 추궁한 것도 있고, 강신혁은 오늘은 이 정도에서 봐주기로 했다.
셋은 휴식을 취하기로 한 비타를 놔두고 마이룸을 나왔다. 강신혁의 방이었는데, 시간은 놀랍게도 새벽 1시밖에 되지 않았다.
강신혁은 우선 백인하에게 메시지를 보내두기로 했다.
[나 : 내일 안 쉬어도 될 듯.]
[백인하 : 조루냐?]
아까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던가?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나 : 뒈진다 너 진짜.]
[백인하 : 아니 웰케 금방 끝나는데, 그것도 둘이나 데리고 가서.]
[나 : 친구 가지고 야설 쓰지 마라, 새꺄. 아무튼 내일 보자.]
백인하와의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드니 두 사람이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강신혁은 어느덧 감돌기 시작한 묘한 분위기에 당황했다.
아니,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응? 왜 두 사람 다…… 잠깐만. 뭐해?”
“벗고 있는데?”
“미친, 기다려봐.”
강신혁은 클레어를 뜯어말린 후, 클레어를 따라 벗으려는 신은아를 기겁하며 붙들었다.
“선배, 안 돼.”
“아니야, 돼.”
“절대 안 돼.”
“클레어어……."
신은아가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자 그녀가 쳇, 하고 혀를 찼다.
“일단 덮치고 나중에 얼버무릴 생각이었는데……."
“무슨 생각인지는 대충 알겠지만, 안 돼.”
“신혁이 너도 싫지 않잖아.”
“이건 다른 문제야. 설령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안 돼.”
“윽, 흐으.......”
대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클레어가 신은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강신혁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루의 기억과 경험을 거의 완전히 체화한 지금은 더더욱.
“후배, 나 후배한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은아 선배, 다음에 얘기하자. 오늘은 클레어를 조금 혼내야 될 것 같으니까, 다음에. 오늘은 안 돼.”
강신혁의 단호한 태도에 신은아 역시 그가 변화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의지는 굳건했으며 뚫고 들어갈 틈은 없어보였다.
클레어가 그녀에게 자신이 혼자 설득해보겠다는 뜻에서 눈을 깜박여보이자,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공간이동으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클레어는 신은아가 사라지자마자 휙 돌아서며 강신혁에게 말했다.
“아니이, 어떻게 차려진 밥상을 거부하는 거야? 심지어 내가 된다는데! 미쳤어?”
“클레어, 난 클레어가 미친 것처럼 보여……."
대체 어떤 여자가 다른 여자를 데려와 자신의 남자에게 붙일 생각을 한단 말인가? 이래서야 정말로 백인하나 브리짓이 생각하는 대로 될 뿐이지 않은가!
“날 생각해주는 건 정말 너무 고마운데 있지, 나도 나름 생각이 있어서……."
“그러면 얘기해줄래?”
"응?"
“클레어가 하는 생각.”
강신혁은 침대에 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며 클레어에게 가만히 말했다.
“전부 말해줘. 다 들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얘기하자. 어떤 생각을 해서 그런 결론에 이른 건지, 알고 싶어.”
“아, 으……."
흔들리지 않는 그의 두 눈을 보며 잠시 고뇌하던 클레어가 이내 슬금슬금 다가와 그의 옆에 걸터앉았다.
“안 웃어?”
“안 웃어.”
“정 안 떨어져?”
“무슨 말을 하든, 안 떨어져.”
“그럼 말한다……?”
“그래.”
클레어는 괜히 쭈뼛거리며 그에게 비스듬히 기댔다.
그리고 얘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