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 Chapter 50. 러스티드 랩소디 - 7 >
온 세상의 시체가 전부 이곳에 몰려든 것 같다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물론 지금 둘이서 그중 대다수를 완전히 지워내고 있기는 했지만.
“잘도 이런 역겨운 세상이 존재할 수 있구나.”
“그래서 지우러 온 거잖아.”
신은아는 담담히 말하며 전방을 향해 뇌전을 뿜어냈지만, 뺨은 여전히 조금 붉었다.
아까 클레어가 한 말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서두르자. 근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양이 심상치 않아. 어쩌면 후배가 위험할지도 몰라.”
“여기서 우리가 막고 있으면 괜찮을 거야.”
클레어는 사격 기능을 갖춘 드론을 풀어 벌떼처럼 몰려오는 좀비며 구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며 대꾸했다.
능력에 한계가 있어 정말 강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힘들지만, A급 이하의 몬스터 정도라면 신은아에게도 밀리지 않는 속도로 쓸어버릴 수 있었다.
이번에 강신혁과 이나희가 드론 개발에 도움을 주면서 더욱 능력이 강화되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여기서 시선을 끌 필요도 없이 신혁이 혼자 해결해버릴지도 모르겠네.’
절대자의 입장에서 강신혁을 내려다볼 뿐인 신은아와는 달리, 클레어는 줄곧 옆에서 강신혁의 성장을 지켜봐왔다.
물론 그 모든 과정에서 그의 곁에 같이 있어주지 못했던 것은 무척 분한 일이지만…….
그래도 그의 성장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그가 어딜 향해 가고 있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당장 그의 도움으로 완성된 드론의 성능 향상 폭만 보아도 증명이 되지 않는가.
“무슨 특성이 됐든 특화되는 영역이 있고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말이지……."
그의 특성은 지나치게 자유롭고 강해서, 마치 세상이라는 게임의 밸런스를 기껏 맞추어놓고 그 혼자만 어디 다른 세상에서 데려온 것만 같았다.
하다못해 지금 그녀의 곁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천 줄기의 번개를 뿜어내고 있는 신은아에게조차 약점이 있는데, 강신혁은 그녀조차 초월하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능력을 본격적으로 각성하고 고작 1년 만에 이룬 성장치를 보면 자명한 일이다. 심지어 세계랭킹 2위로 인정받은 지금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 않은가.
단순한 강함을 논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되는 모든 것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그는 세계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분하게도 곧 누구나가 그것을 알게 될 터였다.
“클레어, 빌딩에서 마기가 폭주하고 있어. 우리도 이제 빌딩으로 가자!”
“그래, 이제 여긴 얼추 정리된 것 같으니까…… 가자.”
“으, 후배 빨리 보고 싶다……."
“그런 건 속으로 말해.”
“미, 미안.”
클레어가 신은아에게 ‘그런 말’을 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클레어도 독점욕 정도는 갖고 있다. 아무리 신은아가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라고 해도 자신의 남자를 허락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신혁은…… 그녀가 독점하기엔 너무 대단한 존재인 것이다. 그녀는 자기 혼자서 강신혁을 온전히 받쳐줄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 대단한 히어로 유니버스의 존재들이 모두 그에게 목을 매는 것을 보고 대충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는 단지 지구에서뿐만 아니라, 전 차원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존재 중 하나였다.
그 편린은 일찍이 보이고 있었고, 심지어 빠르게 개화하고 있었다…….
“빌딩, 흔들리고 있어…… 후배가 잘하고 있나봐.”
"......."
“클레어?”
“아, 응. 가자.”
강신혁의 앞에 기다리고 있을 미래를 생각하면 그녀는 겁이 났다.
그가 자신을 버릴까 하는 우려보다도, 자신이 그의 짝으로서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날이 올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 더욱 컸다.
이번 아프리카 원정에서 돌아오는 그를 보며 진실로, 그때가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괜한 투정을 부렸던 것도 실은 전부 그런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엉뚱한 화풀이인 셈이다.
그러니까 둘의 관계에 신은아를 끌어들인 것은 친구에 대한 양보나 사랑 따위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이 강신혁의 곁에 쭉 붙어있기 위한 방책의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후, 이래서 너무 잘난 남자는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평범한 여자라면 여기서 깔끔하게 강신혁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기엔 클레어도 그렇게 얌전한 성격은 아니다.
자신이 찍은 남자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뭣보다 자신이 아닌 그 어떤 여자라 해도 강신혁을 독점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설령 그 짜증나는 불여우라고 해도 말이다.
누구 좋으라고 강신혁과 헤어진단 말인가. 그의 품이 자신 혼자 감당하기 힘들 만큼 넓으면 한두 명 더 데려오면 될 뿐이다.
어차피 그는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 그래, 그거면 된 거지.
조금 배알 꼴리지만, 그녀는 그렇게라도 강신혁과 함께할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쭉 그런 생각을 해오고 있었다.
“클레어, 봐.”
“응? ……아.”
복잡한 상념에 잠겨있느라 전방을 신경 쓰지 못하던 클레어를 신은아가 불러 세웠다.
이제 빌딩까지는 고작 수백 미터 정도가 남았는데, 그 빌딩 앞을…… 뭔가 시커먼 것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갑옷을 두르고 있었고, 거대한 검을 들고 있었다.
꼭 기사처럼 보였다.
“아, 나 저 장면 야겜에서 봤어.”
“화낼 거야.”
“알았어, 그럼 야겜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하자.”
“그런 문제가 아냐.”
놈은 몸에서 시커먼 기운을 줄줄이 뿜어내고 있었는데, 어째선지 여태까지 신은아와 클레어의 손에서 살아남은 좀비며 구울, 온갖 안드로이드와 언데드 따위가 모조리 놈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신은아는 표적이 집중되어 좋다며 번개를 마구 날려대고 있었지만, 놈들이 죽을 때마다 퍼져나오는 마기마저 모조리 태워 없애지는 못했다.
그것이 모조리 기사에게로 흡수되는 것 또한.
“신혁이가 있었으면 극천신주로 빨아들여줬을 텐데.”
“클레어, 한가하게 있지 말고 공격.”
“이미 하고 있어. 하지만 막을 도리가 없어.”
그녀 역시 저 광경을 본 순간 즉시 비축해두고 있던 드론을 모조리 불러내, 갖고 있는 마탄을 모조리 소모할 기세로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저 기계 언데드들은 생자인 둘을 증오하며 덤벼들던 것 이상으로 필사적인 기세로 검은 기사에게로 몰려들고 있었으니까.
100마리가 죽어도, 1마리는 놈에게 성공적으로 도달했다.
그리고 마기뿐만 아니라 육체의 융합을 일으켜 검은 기사의 덩치를 실시간으로 불렸다.
지금 이 전장에 수십만의 언데드가 있으니 족히 수천 마리는 그런 식으로 직접 융합이 이루어지고, 미처 놈과 융합하지 못하고 죽은 놈들도 놈에게 마기를 전달하는 것만은 막지 못했다.
아마도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이 직접 개입했으리라. 신은아가 빌딩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일까? 알 수 없지만, 저 끔찍한 집단융합의 결과물을 신은아조차 무시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은아야, 미안. 나 리타이어.”
클레어는 비축해두고 있던 탄환을 모조리 소모했다. 설마 인벤토리에 비축해두고 있던 모든 탄환을 털리게 될 줄이야,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이 세상을 얕본 것이 아니라, 설마 세상 전체를 대적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줄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마나는 남아있어?”
“응, 그리고 영력 조금하고…… 칵테일 한 잔, 만들어줄 정도로는.”
강신혁과 함께 지내면서 클레어는 영력을 다루는 솜씨가 빠르게 성장했다. 이제 강신혁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 내부의 영력의 양을 체크하고 자유롭게 다루는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래, 영력. 강신혁은 아마도 타인의 영혼에마저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가능하면 빨리 만들어줘.”
“오케이.”
비축해두고 있는 칵테일도 있지만 아무래도 바로 만드는 것과는 맛이 차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맛이 차이나면, 효과도 차이가 난다. 그녀가 만드는 칵테일은 그런 물건이다.
비록 환경은 최악이었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빨랐다. 순식간에 재료들을 꺼내 셰이커에 따르고 흔들어, 멋들어진 잔에 따라냈다.
“꼭 이런 불안정한 잔에 따라야 돼?”
“응. 그래야 영력이 잘 담겨.”
“하여간 못 말려.”
신은아는 픽 웃으며 완성된 칵테일을 받아 마셨다.
토막 난 시체와 망가지고 부서진 기계 따위로 뒤덮인 전장에서, 이젠 거의 빌딩만한 크기로 커진 금속질의 시체기사를 눈앞에 두고 마시는 한 잔.
최고로 상쾌하다.
“그럼 우선 한 방!”
신은아는 고조되는 마력을 느끼며 저 먼 하늘에 게이트를 열었다.
그녀가 무한한 마력을 꺼내다 쓰는 바로 그 마력의 통로와 이어지는 문.
그 안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마력이 그녀의 권능에 의해 황금의 번개로 화하고, 그것이 그대로 기사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쾅!
검을 들어 막을 틈 따위는 없다. 신은아는 지금도 계속해서 쏟아지는 마력을 고스란히 번개로 전환해 기사에게 연달아 내리쳤다.
놈은 꼼짝도 못하고 연거푸 그것을 얻어맞으며 땅에 무릎을 꿇었다. 진동이 대지를 울리고, 빌딩이 조금 기울었다.
- 크, 아, 아, 아-!
계속해서 번개에 얻어맞는 탓에 놈이 내지르는 괴성조차 뚝뚝 끊겼다.
잔뜩 분노한 놈은 어떻게든 번개를 피해 그녀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다.
신은아는 최대출력의 번개를 몇 발이나 더 놈에게 떨궈 놈의 움직임에 제한을 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해.”
“염치가 좀 있어봐,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고 있으면서 뭐가 ‘강해’야, ‘강해’는.”
“안 죽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클레어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금 신은아가 만들어내는 번개는 감히 X급의 존재에게도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수준의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번개를 족히 열 발 이상을 얻어맞고도 놈은 무릎을 꿇었을 뿐 쓰러지지는 않은 것이다.
더욱 무서운 점은, 점점 놈의 번개저항력이 높아져가고 있다는 점. 처음 몇 발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얻어맞은 놈이, 지금은 번개를 맞으면서도 어찌어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가만, 저거 설마…….'
설마, 하면서도 클레어는 정말로 아주 조금 남은 영력을 자신의 눈에 집중시켜 놈을 살폈다.
놈은 막대한 양의 사체와 기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번개를 맞을 때마다 그 금속들이 스파크를 튀기며 모습을 변형시키고 있었다.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개를 맞으면서 일정한 형태가 완성되어가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 증거로 놈의 움직임이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거짓말, 설마 극천신주와 비슷한 성질이야?”
“아무리 극천신주라도 한도는 있어야 할 거 아냐.”
신은아는 놈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번개 속에서 기어이 자세를 바로잡고, 둘에게 수십 미터 길이가 넘는 거검을 겨누는 것을 보곤 이를 악물며 말했다.
클레어는 그러나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저만한 질량이잖아. 설령 효율이 극천신주보다 떨어진다고 해도 양이 막대하다면……."
“그럼 어떻게 해? 클레어 네 말대로면 저거 그 누구도 못 이겨.”
“아니.”
클레어는 영력이 소진되기 전에 빠르게 놈을 살피며 분석했다. 다행히도 착안점을 잡을 수 있었다.
“극천신주와 비슷한 성질을 띠고 있는 건 금속 부분인 것 같아. 그러니까…… 알지?”
“응, 끊어놓으면 된단 얘기지.”
신은아는 그 즉시 게이트를 닫고, 무한한 마력을 자신의 내부에서 해방했다.
그것을 자신의 손 위에 번개의 형태로 뽑아내, 그것을 압축시키고 벼렸다. 평소 강신혁이 다루는 것 같은 검의 형태로 그것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근접전?”
“아니.”
신은아가 단호히 대꾸한 다음 순간, 그녀의 손에 잡힌 번개의 검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시체기사…… 자이언트 메탈데스나이트의 몸통, 기계로 뒤덮이지 않은 절묘한 틈에 나타난 번개의 검이 방전을 일으켜 시체를 모조리 태워버렸다.
- 크하아아아아아아!
마지막 순간, 놈이 발악하듯 거검을 내리쳤다.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마기에 만약 그대로 적중당하기라도 한다면 제아무리 신은아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 전에.
검에 깃들어있던 마기가 검을 벗어나 빌딩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뭐?”
“검뿐만이 아니라, 은아야! 저거!”
원래부터 이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신은아가 놈을 처리한 것에 따른 반응인지.
자이언트 메탈데스나이트에게 깃들어있던 미증유의 마기가 모조리 빌딩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이겼…… 아니, 후배!”
“시, 신혁이!”
두 사람은 극천신주와 비슷한 성질의 전리품을 회수할 생각도 미처 하지 못하고, 폐허가 되어버린 전장을 벗어나 다급히 빌딩으로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