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 Chapter 50. 러스티드 랩소디 - 4 >
-쾅!
빌딩이 크게 울렸다. 유리창 정도는 산산이 박살나고도 남을 충격이었으나 놀랍게도 멀쩡했다.
끔찍한 충격이 빌딩 전체에 연달아 퍼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내부에서 수렴할 뿐 외부로 터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젠장, 처음부터 위에 있는 줄 알았으면 밑바닥까지 훑고 오는 일이 없었을 텐데.”
“그래도 그 덕분에 부릴 수 있는 병력이 늘었습니다.”
지금 강신혁과 비타는 빌딩의 지상 5층을 달리고 있었다.
무려 지하 7층까지 뚫고 내려갔다가, 빌딩의 밑바닥에 그들이 원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곧장 방향을 틀어 위로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강신혁이 영력으로 공간 전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면 이런 뻘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마기에 잠식된 빌딩은 영력이 뻗어나가기에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빌딩을 단숨에 부수고 올라가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하도 마기가 지독하게 깔려있다보니, 겹겹이 보호막이 둘러쳐져있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마력이 되었든 황룡투기가 되었든, 심지어는 영력이 되었든 일정범위 이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다만 지하를 답파하는 과정에서 비타가 다룰 수 있는 나노봇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한 덕에, 진행속도 자체는 점차로 빨라지고 있었다.
그들이 강해지는 메커니즘을 깨달은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 역시 그들이 지하를 누비고 다닐 땐 주로 나노봇으로 공격해오던 것을, 상층으로 향하는 지금은 빌딩에 저장되어 있던 로봇들…… 그리고 괴상한 몬스터들을 내보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 적이 덮쳐옵니다! 메탈구울입니다!
관리자가 경고성 메시지를 날린 직후, 옆 벽이 화려하게 터져나가며 썩어 문드러진 시체 위를 차가운 금속이 뒤덮고 있는 형태의 괴상한 몬스터가 나타났다.
언데드와 기계의 융합.
이전 비타의 원형이 되었던 이블 안드로이드가 기계 안에 시체를 욱여넣은 형태였다면, 이젠 본격적으로 기계를 언데드에 이식한 형태의 몬스터가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강신혁은 그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세상이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의 뜻대로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진즉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까지, 그러니까 도시와 빈민가로 나뉘어 통제되고 있던 인간들의 삶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은 외부와의 단절 이후, 인류와 몬스터의 대립을 스스로의 힘으로 재현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멸망을 결정적으로 가속시킨, 그야말로 광인의 발상이었다.
무차별적으로 인류를 공격할 뿐인 요르문간드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심지어는 따라하려고 하다니!
‘위협을 만들고, 그로써 인류를 선별하고 통제했다……. 그렇게 세상을 무대로 삼아 어설픈 자작극을 벌인 거야.’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의 사회 통제 실험은 당연히 실패로 끝났다.
녹슨 문명은 예정되어 있던 대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 세상에 남은 것은 죽은 자들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가이아 시스템과, 미처 죽지 못한 극소수의 생자들뿐이다.
- 캬아아아악!
- 인간…… 살아있어!?
- 사, 살아, 살아있는 인간. 살아있는 인간!
강신혁은 여기저기 무너지는 복도 너머로부터 밀물처럼 밀려오는 메탈구울 무리를 보며 비타에게 확인했다.
“비타, 되겠어?”
비타의 주위를 황금의 안개가 감싸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강신혁의 특성, 수호황룡으로 인해 강화된 나노봇의 무리가 지나치게 모여든 나머지 가시화되어 보일 뿐이었다.
체내로 수렴하고 또 수렴해도 넘쳐날 만큼 많은 양의 나노봇. 지하 7층까지 답파해 얻은 유일한 성과라고 볼 수 있었다.
비타는 나노봇 일부를 정찰로 보내 적의 정보를 파악하고는 곧장 대꾸했다.
“그냥 기계입니다. 아무래도 가이아가 이쪽의 수법을 알아차리고 대비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오히려 그게 더 고마운데, 모르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가라, 오닉스! 너로 정했다!”
- 뀨뀨웃!
강신혁의 어깨에 앉아있던 오닉스가 신이 나서는 뛰쳐나갔다.
정확히는 강신혁이 윈드 마스터리로 날려보낸 것이지만, 그 와중에도 은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녀석의 은신이 대단한 이유 중 하나였다.
- 뀻!
- 키익!?
오닉스는 마치 미사일처럼 뛰쳐나가 금세 메탈구울의 선두와 부딪쳤다.
그 순간 놈이 정지하고, 이어서 다른 구울들도 정지했다.
오닉스가 ‘동화’로 모든 구울들의 동작을 싱크로시킨 탓이었다.
- 뀨우우우웃!
녀석은 그렇게 정지시킨 구울들에게서 기계만 쏙 골라내 흡입하기 시작했다.
이젠 직접 입으로 물어뜯지도 않았다.
은은한 묵빛의 금마력을 발산해 구울들을 뒤덮어, 금마력 안에 기계장치를 녹여내는 것이다.
- 이미 훌륭한 보스몬스터로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대상이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기만 하면 동작을 정지시켜, 금속을 모조리 빨아들여 죽인다니 사실 몬스터보다는 괴담에 더 어울리는 능력이었는데…… 결과물도 괴담 못지않게 잔혹했다.
기계로 이루어진 부분을 모조리 빨아먹히고, 몸에 구멍이 뻥뻥 뚫린 구울들은 그 자리에서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다가는 이내 픽픽 쓰러졌다.
- 킥, 키힉.......
- 쿠아아.......
지하로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오닉스의 능력은 저렇게 강력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오닉스가 아직 자신의 마력을 다루는 법에 능통하지 못했다고 봐야하리라.
하지만 금속으로 이루어진 괴물들과의 전투가 이어지며 오닉스도 이곳의 몬스터들이 지닌 금속의 속성에 익숙해졌고, 금마력을 발휘하는 것에도 적응하여 어느덧 이런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적을 폭식, 아니 처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뀨웃!
“오냐, 잘했다.”
여기저기서 벽을 부수고 나타나는 메탈구울의 폭주는 좀비영화의 클라이막스 못지않았지만 놈들을 모조리 눕히기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적이 가이아 시스템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아 움직이는 경우엔 오닉스도 쉽게 빨아들일 수 없지만, 그땐 비타의 나노봇으로 해킹을 하면 될 뿐이었다.
“가자. 아직 한참 남았어!”
“네!”
일행은 파죽지세로 빌딩을 돌파했다.
귀를 기울이면 밖에서 희미하게,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신은아와 클레어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강신혁과 비타, 오닉스가 제아무리 많은 적을 물리쳤다 해도, 지금 밖에서 날뛰고 있을 신은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것이다.
‘은아 선배의 마력은 무한해도 체력은 무한하지 않아. 최대한 빨리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데.......'
처음 이 빌딩에 들어온 이유는 가이아 시스템의 첨병에게 붙들린 비타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빌딩을 탐색하고 돌파하는 와중 강신혁은 반쯤 깨달았다.
비타의 동료들은 이미 죽었으리라는 것을.
이 빌딩 안에는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일절 마련되어있지 않다.
짙은 마기가 빌딩 내부를 빈틈없이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설령 컨디션이 최상이었던 인간이라 해도 그것에 계속 노출되고 있으면 금세 죽어 언데드가 되든 마기를 버티지 못해 괴물로 변이하든 했으리라.
‘……비타.’
하지만 아마도 이 사실을 강신혁보다도 일찍 깨달았을 비타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동료들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으면서도, 굳이 이곳에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설마 죽은 동료들을 위해 복수라도 하려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정말로 미련하고…… 또 굉장히 ‘사람’ 같은 일이었다.
“왜 그러시나요, 신혁 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강신혁은 그녀에게 하려던 말을 그냥 삼켜버렸다.
최상층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그는 비타와 함께할 것이다.
그것이 10년간 그녀를 내버려둔 그가 보여야 할 최소한의 성의였다.
@@@
그들은 곧 6층으로 진입했다.
6층을 넘어 7층으로, 다시 8층까지.
그들은 마주치는 모든 기계 언데드를 시간을 얼마 들이지 않고 쓰러트리며 전진했다.
그것은 마치 탑을 오르는 용사 파티가 레벨 업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비타를 따르는 나노봇은 점점 더 늘어났고, 오닉스가 다루는 금마력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빌딩은 수십 층에 이르렀고, 이런 식으로는 앞으로 꼬박 하루는 쉬지 않고 내달려야 정상에 이르게 될 터였다.
그러나 강신혁이 이대로는 위험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돌연 빌딩 전체에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끔찍한 진동이 내달렸다.
“신혁 님, 보세요!”
“어, 아, 와……."
내부에서 어떤 충격이 일어도 결코 깨지지 않고 버티던 빌딩의 유리창이 일제히 터져나가 있었다.
비타가 나노봇 일부를 내보내 외부를 살피더니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쳤다.
“마기가 외부로 빠져나가고 있어요……! 대량으로!”
강신혁의 눈에도 보였다. 당장 8층 복도에 자욱하던 마기가 스멀스멀 밖으로 새어나가고 있었으니까.
“은아 선배가 손을 썼구나.”
“하지만 이런 대량의 마기가 외부로 나간다면, 그걸 빨아들인 언데드들이 강해질 텐데……."
“그건 괜찮아, 은아 선배니까. 선배도 우리가 여길 빨리 정리하고 나가는 쪽을 더 좋아하겠지.”
그리고 신은아가 힘을 써준 덕에 그들이 더는 삽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강신혁은 포이보스를 꺼내들며 비타에게 물었다.
“그보다 어때, 이제 천장을 뚫을 수 있겠지?”
“아……! 네, 협력하겠습니다!”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기 탓에 건물에 해를 입히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가득 차 있던 마기를 신은아가 빼내준 덕에 빈틈이 생긴 것이다.
뒤늦게 그것을 인식한 비타 역시 나노봇을 내보내 천장에 달라붙게 만들었다. 남아있는 마기까지 모조리 빨아들여 천장의 내구도를 부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다.
“연속으로 갈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준비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간다!”
쾅! 내쏘아진 광탄이 천장을 간단히 부숴 무너트리며 솟구쳤다.
천장이 박살나며 자재가 와르르 쏟아져 내렸지만 강신혁은 그것을 무시하며 재차 광탄을 쏘아냈다.
비타는 그와 타이밍을 맞추어 나노봇을 쏘아내 천장에 달라붙게 만들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함께 행동하는 사이 둘의 호흡이 자연스레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 캬아아아아악!
- 키하아아!
- 타겟을 제거합니다!
- 관리시설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위협적인 개체를 확인!
9층, 10층, 11층…… 천장이 무너질 때마다 그 위에 몰려있던 괴물들이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며 함께 추락해왔지만, 그것들은 비타의 나노봇과 오닉스에 의해 그들에게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분해되어 소멸했다.
- 쾅! 콰광! 콰아앙!
13층, 16층, 20층. 강신혁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탄을 쏘아냈다.
지금 그의 에너지는 무한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벨트에 끼워 넣은 극천신주 탓이었다.
사방에 가득 차 있던 마기를 끊임없이 빨아들이고 있었으니, 강신혁이 쏘아낼 광탄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 건물 최상층까지 꿰뚫어버리려는 강신혁의 깜찍한 의도는 머지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 관리시설 전체에 심각한 손상 발생. 관리 시스템을 일시정지하고 복구 작업을 수행합니다.
그들이 여태껏 건물 안에서 신나게 날뛰었음에도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기계적인 목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우며 그들을 위축시켰다.
이어서 박살난 유리창 위를 무너진 건축자재나 기계전선 따위가 뒤덮어 틈을 가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 건물과 일체가 되었다.
마치 이 건물이 통째로 살아 숨 쉬는 가이아의 몸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하."
당연히 건물 안의 마기 밀도는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가 쏘아낸 광탄은 금세 힘을 잃어버리고 중간에서 소멸해버렸다.
심지어는 이미 박살이 난 천장까지 조금씩 복구가 되려는 듯한 모습에, 강신혁은 기겁하며 비타와 오닉스를 데리고 허공을 박차 급한대로 천장을 뚫어놓은 데까지 이동했다.
당연하지만, 빌딩을 가득 채운 마기 탓에 내부에선 공간이동은커녕 제대로 된 공간파악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쯧, 그래도 30층까지는 부쉈나? 은아 선배한테 한계가 오기 전에 어떻게든 저 위로…….'
만만치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짜증날 정도로 답답한 공간. 강신혁은 오랜만에 히어로 유니버스의 거래게시판에서 해답을 찾아봐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 그때였다.
- 뀨우우우우우!
30층까지 연달아 부수는 과정에서 쏟아져내린 기계를 모조리 흡수한 오닉스가 귀엽게 포효하는가 싶더니, 녀석이 등에 뀨우우웃, 하고 힘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금속을 먹어치운 주제에 여전히 자그마한 녀석의 몸. 그런데 어째 녀석이 힘을 줄수록, 녀석의 등에 난 가시가 길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녀석의 가시가 흐물거리며 길게 늘어나고 있었다!
“아니, 야. 잠깐.”
- 뀨우, 뀨우우우!
혹시 녀석이 심연을 지나치게 들여다본 나머지 저쪽으로 건너가 버린 것인가, 강신혁이 긴장하며 권총을 들어 올리는데.
마치 전선처럼 길게 늘어난 오닉스의 가시들이 일제히 벽면에 달라붙더니.
“허?”
“신혁 님, 이건 설마.”
돌연, 벽에 금이 그어지더니.
벽이 열리며, 감추어져 있던 엘레베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 뀨우웃!
오닉스가 자랑스럽게 울었다.
아무래도 녀석이 해킹 능력을 터득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