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 Chapter 50. 러스티드 랩소디 - 1 >
“이상하다, 전에 왔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강신혁은 제대로 된 건물이라곤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도시 네오러스트를 둘러보며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이곳은 이전 네오러스트의 빈민가가 위치해있던 장소였는데, 아무리 빈민가라고 해도 최소한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살 수는 있는 건물들이 있던 곳에 지금은 썩어 무너져가는 폐허만이 남아있었다.
빈민가만 이랬더라면 그나마 납득이 가능했을 텐데, 그보다도 문제는 빈민가를 넘어 대로에 시선을 주어도 풍경의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멀쩡한 것은 오직 하나, 과거 거대한 스크린이 걸려 있던, 도시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뿐이었다. 그나마도 스크린이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그 얘기는, 즉.
“클레어, 내가 잘못 보는 거 아니지?”
“응. 도시가 그냥 싹 무너진 것 같아.”
“여기…… 마기가 어마어마해.”
클레어의 대답에 이어 신은아마저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 클레어가 본능적으로 신은아를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강신혁과 클레어 둘만이었더라면 상당히 위험했을지도 몰랐다.
“아빠!”
그때 잔해 속에서 뛰쳐나온 무언가가 강신혁을 덮쳤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기에 저항하고 자시고 불가능했는데, 뒤늦게 분노하며 손을 들어 올려 뇌전을 뿜어내려는 신은아를 클레어가 붙들었다.
“얘 적 아니야!”
“엄마!”
강신혁을 한 차례 ‘껴안았던’ 그것은 뒤이어 클레어에게도 덤벼들었다.
클레어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것, 비타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오랜만이네.”
“정확히는 10년하고도 2개월 17일 53분 48초 만이에요. 보고 싶었습니다.”
비타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많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젊은 미모와 깨끗한 흑발, 금안을 비롯해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본디 그녀가 입고 있던 바텐더 복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웬 세기말 여전사가 입을 듯한…… 이정현 말고, 게임 속 여전사가 입을 듯한 옷을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바텐더 복장이 맞았는데, 치마는 가뜩이나 짧았던 밑단을 더 잘라내고 옆트임을 주어 쉽게 움직일 수 있게 했으며 허리에 는 수류탄, 권총, 장검이 매달려 있었고, 정장 상의는 전투 조끼로 탈바꿈해 있었다.
유일하게 그 안의 레이스 셔츠만이 그대로였는데 그것도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 섹시한 느낌을 더했다.
“그렇게 보시면 부끄러워요, 아빠.”
“아니, 아빠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10년만이니 허용해주시지 않을까 했는데……."
“여기서 10년이 흘렀대도 우린 고작 몇 달…… 10년!?”
강신혁은 뒤늦게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경악성을 토했다.
생각해보니 그 정도 시간이 흐른 것이 맞았다.
원래부터 이곳은 지구와의 시간비율이 굉장히 차이나는 곳이었으니…… 그는 뒤늦게 죄책감이 들었다.
“미안, 중간에 오려고 했었는데 이쪽에도 제법 다른 일들이 쌓여 있어서……."
“이해합니다. 이제라도 와주셨으니 괜찮아요.”
비타는 클레어의 품에서 나와 다시 강신혁에게 안기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견은 어딜 봐도 훌륭한 성인여성(+세기말 여전사)인데 그의 품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으니!
어색해야 할 터인데 이상하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이전에 신은아가 자주 하던 짓이었다.
“뭐, 뭐야. 엄마, 아빠…… 둘이 낳은 애? 여기서 아이 낳았어!?”
바로 그 신은아가 더는 참지 못하고 드디어 격렬한 분노를 터트렸다. 그것을 예상하고 있던 클레어가 재차 그녀를 붙들며 말했다.
“은아야, 진정해. 얘 안드로이드야.”
“거짓말, 이렇게 사람 같은 안드로이드가…… 정말?”
“당연하지. 우리가 애를 낳았을 리가 없잖아. 낳았어도 이렇게 클 리가 없고.”
뒤늦게 비타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깨닫고 조금 침착한 신은아.
클레어가 피식 웃으며 덧붙이는 말에, 신은아는 미처 녹여내지 못한 분노의 눈물을 찔끔 흘리며 그녀를 째렸다.
“낳을 만한 짓은, 했어……?”
“……자, 그러면 비타. 상황설명 좀 해줄래?”
“말 돌리고 있어!”
“밖은 위험하니 우선 이쪽으로.”
강신혁과 클레어를 차례로 끌어안은 비타는 만족한 얼굴로 떨어지더니 일행을 폐허 속으로 안내했다.
신기하게도 무질서하게 널브러진 폐허에 사람이 다닐 만한 틈이 있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 얼마간 걷다 보니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나타났다.
“흠……. 후, 후흐……!”
“진정해, 클레어.”
“엇!? 으, 응!”
다 무너진 세상의 비밀통로라니, 너무나도 흥분되는 상황에 달아오르고 있던 클레어를 강신혁이 적절하게 진정시켰다.
평소라면 그 모습에 질투심을 폭발시켰을 신은아는, 그러나 지금은 이 통로를 뒤덮고 있는 폐자재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전부 마기에 뒤덮여 있어.”
“네, 이모님.”
신은아는 이모라는 말에 역시 비타를 폭발시켜버릴까 고민했다.
“뇌제님이라고 불러.”
“그러면 뇌제님, 이 마기가 통로의 존재를 그들로부터 안전하게 감추어주고 있습니다.”
“그들…… 마기를 다루는 자들? 마족?”
“마족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기를 다루는 자들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은신처에서.”
지하통로를 상당히 오래 걸어야 했지만 그들은 모두 초인. 순식간에 거리를 단축해 불과 2분여 만에 탁 트인 공동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그곳도 여전히 지하였지만, 그나마 천장에 매달린 할로겐 조명이 인공적인 빛을 퍼트리고 있었다.
그 빛이 닿는 곳을 이리저리 둘러보면 솜이 터진 낡은 소파, 겉장이 떨어진 책 몇 권이 꽂힌 책장, 마구 흔들리는 침대 따위가 있었는데, 강신혁의 시선은 어느 순간 벽에 마련된 테이블에 꽂혔다.
어째 바텐더 테이블처럼 보이는 그 테이블 위에 병 여러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대체.”
“저항군의 은신처 중 하나입니다. 몇 달 전까지는 이곳에도 동료가 있었습니다.”
"......."
비타의 말은 여러 가지를 암시했다.
비타가 저항군으로 활약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녀가 이곳의 다른 외계인들과 함께 움직였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그 동료들이 없다는 것.
“아까 보낸 구조요청은, 그러면.”
“아까? ……역시 그랬나요. 세 달 전에 보낸 것이었는데.”
“세 달?”
- 급격히 시간비율이 흐트러진 모양입니다. 역시 좌표 설정을 해두고 오길 잘했군요.
비타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강신혁이 기가 막혀있자니 관리자가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비타는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이며 한 손을 뻗어 강신혁의 손을 붙잡았다.
“세 달 전, 동료들이 놈들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저는 그들을 구하고 싶어요.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동료들이라면 혹시 빈민가의……?”
“반반입니다. 저를 비롯해 빈민가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원래부터 활동하던 저항군과 합류했죠. 그들은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마기의 주인을 추적해, 놈이 이곳 네오러스트에 있음을 알고 찾아온 것이었죠.”
점점 더 아포칼립스에 어울리는 설정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동안 많은 고생을 했을 비타를 보며 안타까워져 말했다.
“이런 세기말 모험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일찍 도와주러 왔을 거야.”
결코 빈말이 아니다. 단지 그동안 지구에서도 억수로 바빴을 뿐이다.
간신히 게이트 사태가 안정되었을 무렵엔 또 아프리카 원정 탓에 죽어라 포션을 만드는 신세가 되었으니.
다만 그때 이곳의 시간비율을 활용해 포션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기라도 했더라면 보다 빨리 비타의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차원 퀘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괜찮습니다, 클레어 님. 저도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가이아 시스템의 해킹에 시간이 걸려서……."
“지금 뭐라고 했어?”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을 해킹해서 히어로 유니버스와의 접촉방법을 알아내고 그 라인을 빌려 메시지를 드린 겁니다. 상당히 어려웠어요.”
“관리자 님, 이게 대체 뭔 소리예요?”
- 어머니 능력을 잘 물려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두기로 했다.
관리자가 태평한 것을 보면 해킹에 따른 다른 문제도 없는 것 같고…….
“그 과정에서 가이아 시스템에 제 위치를 감지 당했지만, 그땐 이미 긴급상황이었기에……."
“이판사판이어서 그런 요청을 했던 거구나. 그럼 그 후로는 어떻게 피한 거야?”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과의 통로는 끊어버렸습니다만, 아까까지 있던 곳은 추적되었을 겁니다.
비타의 말을 관리자가 이어받아 설명했다.
그들에게 구조요청을 보낸 이후로 줄곧 추적을 당하던 비타는 강신혁 일행과 합류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리자의 도움을 받아 꼬리를 떼어낼 수 있었다는 것.
망설임 없이 그들을 은신처로 데려온 것을 보면 그녀도 그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물론 별 의미는 없는 일입니다만.
“왜요?”
- 지금 셋이 모여 뿜어내는 기운의 양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가이아 시스템은 추적을 못할지 몰라도, 이곳을 돌아다니는 순찰 부대가 있다면 곧 적발될 것입니다.
“괜찮아.”
강신혁 대신 신은아가 답했다. 그녀의 손아귀에 황금의 뇌전이 뭉쳐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정면으로 돌격할 거니까.”
“진정해, 은아야.”
“아니, 은아 선배 말이 맞아.”
강신혁이 고개를 저으며 신은아의 편을 들었다.
“동료가 붙잡혔다며? 보나마나 그곳으로 끌려갔겠지?”
“네, 신혁 님.”
그곳.
모든 건물이 삭아 무너진 와중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선 마천루.
하늘을 긁어낼 기세로 솟은…… 아니, 문자 그대로 하늘과 이어진 도시의 가장 거대한 빌딩.
“저항군 역시 그곳을 최후의 목표로 삼고 있었어요. 마기의 근원은 그 빌딩이에요.”
“그럴 줄 알았어.”
사실 과거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부터 언젠가 그 빌딩에 개돌하는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 강신혁의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강신혁 - SS+랭크](동화율 75.5%)
[특성]
수호황룡(守護黃龍 )(SS)
[신체능력]
힘 - SS+
민첩 - SS+
체력 - SS+
[특수능력]
영력 - SS+
황룡투기 - SSS-
[스킬]
황룡투(SS+) - SS
윈드 마스터리(SS+) - S+
라이트 마스터리(SSS) - S-
파이어 마스터리(SSS) - S+
영혼독(SSS) - SS
공간조율(SSS) - B-
야금술 - SS
감정 - SS-
수리 - S+
지난 두 달 동안 신체 스테이터스는 고작 하나가 올랐을 뿐이지만, 이로써 모든 스테이터스가 SS+랭크에 도달했다.
물론 두 달 전과 비교해서 이런 것이고, 처음 이 도시에 찾아왔을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여기에 클레어의 초월 포션을 복용한다면 모든 스테이터스가 현계한도(SSS+)에 이를 테고, 그 정도라면 저 끔찍한 마기를 피워내고 있는 빌딩에 정면으로 돌격해도 승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수준이다.
- 아마 회원님의 작품 또한 그곳에 있을 겁니다.
관리자의 말이 강신혁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여태껏 뇌리 한켠에 가만히 놔두고 있던 가능성이었다.
어쩌면 과거 자신이 만들어낸 물건이 이 세상의 참상에 관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도 일찍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저 빌딩 안에 있다면……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되겠지.
“그러면…… 이곳에 있는 작품은 뭐죠, 관리자님?”
- 그것은, 검.
바로 돌아온 관리자의 말에 강신혁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관리자는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 전생의 회원님께서 미처 팔지 못하고 내버리셨던, 검입니다.
어째서 기껏 만든 무구를 팔지 않은 걸까.
대충이나마 그 이유를 짐작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문득 둔중한 진동이 울렸다.
- 쿠웅
“우리를 찾고 있군요.”
비타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신은아가 양손에 번개의 구체를 만들어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움직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