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 Chapter 49. 다시 봄 - 4 >
“레드슈즈 브리짓 폴센의 마스크드 바커스 입단을 축하하며 건배에! 예이!”
허공에서 여덟 개의 잔이 부딪쳤다. 마스크드 바커스의 일원은 모두, 그야말로 아직은 예비 단원인 오혜나까지 한 자리 끼어든 기념비적인 자리였다.
“앙, 다들 고마워요! 귀엽고 깜찍하고 섹시한 브리짓을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이 모임이 열리게 된 원흉, 브리짓 폴센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곤 맥주가 든 잔을 단숨에 비우며 푸하,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본인 입으로 말해 그걸?”
강신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잔을 기울였다.
그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은 가면을 벗고 있었는데, 이전 계약서를 작성한 오혜나는 물론이고 브리짓 폴센 또한 입단 과정에서 영혼의 계약서를 작성하며 비밀이 노출될 우려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원래 자꾸 예쁘다고 해줘야 더 예뻐지는 법이거든? 그나저나 우리 인형사 씨는 역시 실물도 엄청 잘생겼……."
“추파 던지지 말고 저리 가.”
“어, 어어?”
맨 얼굴을 드러낸 강신혁에게 고개를 들이미는 브리짓을 그의 옆에 붙어 앉아있던 클레어가 밀어냈다.
“에이.”
“칫."
“후.”
“어머나아아아아.”
살짝 밀려난 브리짓을 그 옆의 신은아가 다시 한 번 밀어내고, 이어서 이나희와 엘레노어가 은근슬쩍 밀고 들어오며 결국 브리짓과 강신혁과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생겨났다.
브리짓은 강신혁을 수호하는 사천왕의 기세에 밀려나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와, 나 방금 스모 당한 기분이에요.”
“참신한 표현이네. 하지만 여긴 한국이니까 씨름이라고 바꿔서 표현해줘요. 일본 문물이 한국에 들어올 땐 전혀 안 비슷해보여도 로컬라이징 작업이 필수거든요.”
“오사카 사람이 부산 사람이 되는 그런 거 말이지.”
“태연하게 대꾸하는데, 내가 보기엔 인형사 씨 앞으로 엄청 고생할걸.”
강신혁과 클레어의 왼손에서 반짝이는 커플링의 존재가 참으로 맹랑하다.
하지만 더욱 맹랑한 것은 아직까지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신은아와, 어디까지나 동료인 척 하며 은근슬쩍 그와의 거리를 좁힐 기회만 노리는 두 불여우의 존재였다.
그야 그녀가 일하던 모델 업계나 할리우드에선 연인 있는 남자랑 자거나 양다리를 걸치거나 불륜을 하는 등의 사건사고가 매일같이 일어나긴 했지만, 설마하니 임자가 있는 남자를 다른 여자가 셋이나 동시에 노리는 일은 어지간하면 없었다!
“으으으응, 이렇게까지 인기 있으면 나도 슬슬 오기가 나는데……."
“치워둬요, 죽고 싶지 않으면.”
“브리짓 누님, 쌀쌀맞은 놈은 버려두고 우리랑 놀죠.”
싸늘하게 밀어내는 강신혁의 뒤에서 백인하가 언제나처럼 가벼운 투로 말을 걸었으나 브리짓은 시무룩한 얼굴로 대꾸했다.
“으응, 인하도 잘생겼지만 내 타입이 아니니까 좀 텐션이……."
“컥.”
“인하 오빠가 어디가 어때서!”
오혜나가 울컥해 외쳤지만 그건 백인하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하지만 백인하가 학생회 하렘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강신혁은 더 이상 놈의 연극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인형사 씨는 진짜 미성년자였구나.”
“이제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진짜 대박이다, 나는 학생 때 뭐했더라……."
“놀러 다니기나 했겠지.”
클레어가 흥,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에 지극히 희귀한 특성을 각성하는 바람에 청춘을 초인시설에 갇혀 지내야 했던 클레어에게는 청춘에 대한 동경과 함께, 자신이 즐기지 못했던 청춘을 만끽하는 이들에 대한 열등감이 아주 약간이나마 있었다.
강신혁을 만나기 전까지 이상형은 연상이라고 떠들고 다녔던 것도 어쩌면 거기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땡! 모델하고 있었어요!”
“아, 미안. 내가 잘못했어.”
“모델 하면서 많이 놀았으니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쿠후후.”
“우리 쟤 때리자.”
“그러면 브리짓 누님은 각성을 언제쯤……."
“아, 그건……."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만 의외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브리짓과 백인하 모두 분위기를 띄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고, 신은아와 오혜나, 엘레노어는 기본적으로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만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의 주역이 브리짓이었던 만큼 대부분의 화제는 그녀에게서 나왔다.
“뭐? 한국 드라마에 나온다고?”
“한국에 왔으니까 해봐야죠. 후후, 열심히 챙겨봤던 것도 그 때문이란 말씀. 영화도 하나 찍는 중인데?”
“도전정신이 넘쳐나네.”
“은아 언니가 초인을 그만둬도 제가 일해서 부양할게요!”
“돈 많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저리 가.”
“아앙.”
강신혁은 브리짓에게 이성적인 관심은 없었지만, 다방면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긍정적인 기운을 뿌리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간에 클레어가 뾰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쿡 찔렀으므로 감탄하는 눈으로 브리짓을 보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이번 체육대회, 내용은 어떻게 되냐?”
그가 화제를 은근슬쩍 돌리자 백인하가 마침 잘 물어봐줬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고 대꾸했다.
“악습폐지가 선결이지. 고리타분한 경기를 전면폐지하고 리뉴얼할 거야.”
“강하게 나오는데.”
“야, 솔직히 이어달리기나 기마전이 말이냐? 초인이면 초인답게 좀 더 비주얼 폭발하는 화끈한 경기를 해야지."
“작년도 기마전에서 오빠가 제일 신나서 날뛰었다고 들었는데?”
“그건 시뇨기도 마찬가지였어.”
“그건 말하지 마, 부끄러우니까.”
강신혁이 대뜸 백인하의 말을 자르는데, 문득 오혜나가 선언했다.
“나 투왕전에 나가고 싶어.”
“안 돼.”
“그래, 안 돼.”
강신혁과 백인하가 입을 맞춰 반대하자 오혜나가 울컥하여 외쳤다.
“왜 안 된다고 하는 건데!”
“그러면 신인전에 못 나가니까.”
강신혁은 엄숙하게 선언하더니 살짝 아련한 말투로 덧붙였다.
“작년에 신인전을 포기하고 투왕전에 나갔다가 이도저도 못하고 떨거지가 된 한 소년이 있었지……."
“헤이 시뇩. 그거 설마 내 얘기냐? 어? 내 얘기냐?”
“그러니까 도전정신이든 패기든 접어둬. 지금은 네가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성적을 얻어놔.”
“끄으으…… 네에.”
이것 또한 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권력 중의 하나.
특히 강신혁은 신인왕이라는 별 것 아닌 배지 덕에 신영에서의 입장이 판이하게 달라진 당사자였다.
강신혁의 말에 오혜나는 끝내 승복하여 고개를 숙였다.
학기 초 형성된 기묘한 사제관계는 두 달여가 흐른 지금 어느 정도 정착되어 있었다.
“시뇩이 넌 어떻게 할 건데? 기사왕전이랑 투왕전 둘 다 나가냐?”
“아니, 엘리랑 나눠서 나가기로 합의 봤어. 난 투왕전만.”
“내가 기사왕전.”
엘레노어가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받아 마무리했다.
사실은 기사왕전과 투왕전에 동시에 나가는 경우가 더 드물다.
수업 중에 하는 대련도 아니고, 한 경기 한 경기에 힘을 쏟아 부어야 하는 중요한 대회이니만큼 하나만 골라서 집중하는 것이 좋았다. ……작년도 기사왕을 달성하고 투왕전에 나갔다가 백인하에게 져버린 더글러스 페인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던 셈이다.
“아주 그냥 나가기만 하면 우승하는 건 당연하다는 투네? 둘이서 기사왕이랑 투왕 나눠먹겠다고?”
"당연하지. 꼬우면 너도 탑 랭커 찍든가."
당당하게 대꾸하는 강신혁의 옆에서 엘레노어가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이나희는 마치 두 사람이 굉장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배알이 꼴려 이를 갈았다.
백인하 역시 만만치 않게 약이 올랐지만 그렇다고 엘레노어에게 성질을 낼 수는 없었기에, 강신혁을 타겟으로 정하고 선언했다.
“뒤졌다, 시뇨기. 투왕전에서 발라준다 내가. 로열 클래스에서 짐 싸서 나갈 준비나 해라.”
“아니, 비룡기사단 부단장이라 방은 안 빼도 되는데.”
“오, 오빠. 그냥 나가지 말자……."
“야! 오빠 못 믿어!?”
언제나 백인하의 아군이 되어주는 오혜나조차 그를 뜯어말렸다.
강신혁이 그것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자니 이나희가 불만스레 말했다.
“싸우는 것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 슬슬 경연대회도 나가야 돼.”
"응?"
강신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을 들은 탓이었다.
“우리 작년에 나갔었잖아요.”
“그건 루키고. 이제 나도 너도 루키는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강신혁의 야금술은 빠른 동화율 상승에 힘입어 어느덧 SS랭크에 이르러 있는 상태.
이나희 역시 특성이 진화해 룬이라는 새로운 인챈트 체계에 입문한 덕에, 강신혁만큼은 아니더라도 극적으로 능력이 진보했다.
“이제 세계대회에 나서야지. 안 그래도 이름값은 슬슬 알려지고 있잖아?”
“세계대회라.”
그런 대회에 아직 학생인 자신들이 나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응, 다른 학교에서도 3학년쯤 되면 싹이 보이는 애들은 성인들과 경쟁시키지. 물론 입상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제한이 아예 없는 거예요?”
“그저 그런 실력으로 도전했다간 매장당할 테니 아무나 덤벼들지는 못해. 안 그래도 올해 큰 거 하나 열린다고 할아버지가 준비한댔어.”
가만히 있었으면 이만우가 알려줬을 것을 이나희가 선수를 쳤다는 얘기였다. 그녀가 귀여워 괜히 쿡쿡 웃었더니 이나희가 얼굴을 붉히며 그를 때리려 들었다.
그때였다.
- 신혁 님.
그의 시야에 굉장히 이질적인 방식으로, 굉장히 낯선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순간 웃음을 멈추는 강신혁의 모습에 클레어가 무슨 일이냐며 말을 걸다가, 직후 강신혁과 같은 모습으로 굳어졌다.
- 위험한 상황입니다. 구조를 요청합니다.
“신혁아, 이거……."
“클레어도 받았어?”
“무슨 일인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자 소외감을 느낀 신은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강신혁은 대답을 해줄 겨를이 없었다.
생각을 하다 말고 드디어 떠올렸기 때문이다.
둘에게 공통되게 구조요청 메시지를 보낼 만한 존재를.
“비타?”
이전 시간을 벌기 위해 들렀던 세상 사이제논에서 클레어가 강신혁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낸 안드로이드, 비타가 그들에게 구조요청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어떻게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몇 달간이나 연락이 없던 그녀가 돌연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장 가봐야 될 것 같은데.”
“학교는?”
“오늘 목요일이잖아. 금요일만 결석하면 설마 주말 안에는 해결할 수 있겠지.”
“야, 뭔 얘기야? 결석? 뭔데?”
둘의 대화를 따라잡지 못한 이들의 발언에 강신혁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우리 둘이 어디 가봐야 될 것 같은데.”
“지금 커플 티 내냐? 게다가 결석이라니, 뭔."
"......."
백인하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신은아의 표정은 얼음장 같았다.
그때 클레어가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아도 같이 가주면 좋겠어.”
“어!? 나, 나도?”
얼음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괜찮아!?”
“응.”
“시, 싫은 건 아닌데, 너무 갑자기, 아니, 진짜 싫은 건 아닌데…… 마, 마음의 주, 준비를.”
신은아의 얼굴이 순간 확 달아오르며 영문을 모를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기회를 놓칠세라 브리짓이 벌떡 일어섰다.
“그럼 나도, 나도 같이! 같이 해요, 드디어 내가 꿈에도 그리던 3, 아니 무려 4P를…… 으븝!"
“아니거든?”
“후배……."
“아니라고!”
강신혁은 자신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보는 엘레노어와 자기도 일어설까 말까 고뇌하는 이나희에게 결코 그녀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일러준 후, 신은아와 클레어의 손을 잡고 마이 룸에 들어섰다.
신은아는 처음 들어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쭈뼛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저번 차원 퀘스트를 끝내고 보상으로 방 한켠에 자리 잡은 소박한 침대를 보며 볼을 붉히곤 물었다.
“여, 여기서…… 해?”
“아니라니까.”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들만 남게 되자 비로소 사정을 설명해줄 수 있었다.
한 3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설명을 들은 신은아는 샐쭉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 몰래 둘이 다녀왔어.”
“응, 너 몰래 데이트했어.”
“클레어!”
클레어의 솔직한 고백에 신은아가 눈썹을 치뜨고, 강신혁은 기겁해 외쳤다.
하지만 클레어는 신은아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끝내 신은아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미워…… 그래도 도와줄게.”
“고마워, 은아야.”
- 출발이 정해졌으면, 우선 기점 설정을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관리자가 갑자기 설명을 시작했다.
강신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기점?”
- 그렇습니다. 현재 회원님께서 향하려는 세상 사이제논은 언제 히어로 유니버스의 연결이 끊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완전히 무너져도 탈출할 수 있게끔 공간이동 좌표를 설정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회원님과 저 불여우에게 공간이동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방법입니다.
신은아가 끼어드는데 어째서 관리자가 태클을 걸지 않나 했더니, 그녀가 있어야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강신혁은 신은아와 눈을 마주치곤,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좌표를 설정했다.
마이 룸에 강신혁과 신은아의 기운을 상당량 담은 기물을 설치하고, 셋이서 함께 차원이동을 실시했다.
그곳은 아포칼립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