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 Chapter 49. 다시 봄 - 3 >
비룡기사단 부단장 강신혁이 신학기 첫날부터 1학년 수석입학생 오혜나를 기사단 멤버로 스카웃했다는 얘기는 빠르게 학교 내부로 퍼졌다.
그것 자체는 사실이었으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강신혁이 오혜나를 여러 가지 의미에서 노리고 있다는 굉장히 바람직하지 못한 소문도 함께 돌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이나희, 엘레노어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얘기도 여전했으므로, 졸지에 강신혁은 세 다리를 걸치고 있는 천하의 개쌍놈이자 능력남이 된 것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아니 대체 어떤 미친놈이 공개적으로 세 다리를 걸치냐고!”
“시뇩아, 너 이미지 왜 일케 됨.”
“바람둥이.”
“무게 10킬로 늘린다.”
“아, 아아! 아아아!”
강신혁과 백인하, 덤으로 오혜나는 새벽 단련을 함께 하고 있었다.
로열 클래스로 들어온 이후로는 아침 단련을 방에서 끝내는 그이지만, 오혜나에게 굉장히 진지한 부탁을 받은 겸 …… 덤으로 백인하까지 빠르게 성장시킬 겸 한데 모여서 수련하기로 한 것.
“무, 무서워. 내가 못 들어야 하는 무게를 들고 있어……!"
“버프를 받고 있으니까 당연한 거야. 그 상태에서 한계를 뛰어넘어야 원래 스테이터스가 성장한다.”
“죽어, 파, 팔 부러져!”
“안 부러져. 3회 추가.”
“아아아!”
“호흡 조절하고. 제대로 힘 줄 때 내쉬어.”
한데 모여서 수련한다고 해도 별 다를 것은 없다.
강신혁의 특성으로 셋을 보조하고, 신체단련과 대련, 특성 수련 따위를 할 뿐이다.
단 아무래도 강신혁과 가까운 곳에 있을수록 특성의 효과가 증폭되고, 강신혁도 혼자서 단련하는 것보단 백인하나 오혜나와 대련이라도 하는 쪽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시뇩아, 계약 말인데.”
그 옆에서 웨이트를 하고 있던 백인하가 한 세트를 마치고 불만스런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꼭 혜나한테 그런 마도구까지 써야했냐? 네가 요즘 고위 게이트에 들어간다고는 해도 그런 소모성 마도구를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잖아.”
그가 말하는 마도구란 물론,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판매하는 영혼의 계약서를 말하는 것이다.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영혼의 계약서까지 필요하지 않겠지만, 오혜나는 그렇지 않았기에 마스크드 바커스 활동과 비밀엄수에 관한 조건이 빽빽한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계약서가 뿜어내는 강력한 마력에 참관인인 백인하가 주저하는데도 오혜나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사인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방학중에 게이트에서 강신혁과 함께 수련을 하고 대련을 할 때 자신의 성장세가 좋았던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기에 더더욱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는 모양이었다.
“너, 내가 내 특성이 다른 사람 특성을 진화시켜준다는 얘기 했지.”
“그랬지.”
“이게 얼마나 뛰어난 힘이고, 동시에 위험한 힘인지도 이해하지?”
“그렇지.”
“그러니까 비밀엄수 계약서를 쓰는 거야. 애초에 다짜고짜 인원을 모집할 생각도 없고.”
"윽."
그는 지금 마스크드 바커스 인원 확충 계획을 멋대로 타인에게 털어놓은 백인하를 탓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혜나의 경우 이미 강신혁과 백인하가 마스크드 바커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했고, 백인하에게는 친동생 대신으로 여겨질 만큼 친한 아이였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특성에 관한 얘기는 아예 하지도 않았으니, 사실 그리 문제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이 이상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미안했어. 혜나는 특별하다니까……."
강신혁도 알고 있다. 백인하가 자신이 한 얘기를 줄줄 흘리고 다닐 놈 같았으면 애초에 그에게 진지하게 얘기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 내가 싫다고 할까봐 이렇게 되도록 선수 친 거지."
"응."
"그냥 결혼을 해라, 결혼을.”
"뭔 소리냐, 동생이라니까.”
백인하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는 순간, 운동을 하며 아닌 척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오혜나가 노골적으로 맥이 탁 풀리는 바람에 바벨을 놓쳤다.
강신혁은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바벨을 받아내며 선언했다.
“30회 추가.”
“악마!”
“운동할 땐 운동에만 집중해. 어어딜 으르신들 대화를 엿듣고 있어.”
“늙은이! 나쁜 놈아!”
“그럼 나도 운동해야겠다.”
강신혁은 하이랭커 용으로 특별히 개발된 초고중량 바벨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에게 너무 무겁다며 따질 생각이었던 오혜나는 무려 이백 킬로그램 단위로 무게가 올라가는 최신식 마력바벨을 보며 이를 악물고 자신의 운동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백인하는 그 모습을 보며 지그시 웃었다.
자신이 오혜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음을 확신하며.
@@@
비록 아프리카 정벌은 실패했지만, 내란으로 인한 용병들의 피해가 심각했을 뿐 사실 이번 원정에서 초인 세력은 그렇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히려 아프리카에서 수거해온 무수한 몬스터의 사체를 바탕으로 벌일 수 있는 사업이 대호황을 맞이해, 초인 무구가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은 물론 A랭크 이상의 인공 아티팩트도 시장에 대량으로 풀렸다.
이는 각국의 초인 전력 향상을 낳았고, 슬금슬금 등급이 높아져가는 게이트 발생에도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게끔 되었다.
따라서 신영의 학생들도 비로소 온전한 학교의 커리큘럼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학생들은 드디어 학생다운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고 있었지만, 그런 기쁨은 정확히 이틀 만에 깨졌다.
“아, 수업 지루해. 게이트 실습 나가던 때가 좋았는데……."
“나도 정식 초인만 되면 신은혁처럼 활약하면서 여자들 매달고 다닐 텐데.”
“올, 미래의 세계랭킹 2위.”
“뭐? 신은혁 벌써 세계랭킹 2위임?”
“아프리카에서 쩔었다든데. 영국은 아예 왕실에서 나와 엎드리고 모셔갈 기세더라.”
신영 기사학과에서 제일가는 인재들을 모아놓았다는 A 클래스도 학생들의 정신연령은 마찬가지다 .
강신혁이 뒤에서 들려오는 얘기에 피식 웃고 있는데, 점점 더 그와 관련되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레드슈즈 이번에 국제초인랭킹 4위로 뛰었잖아. 그런데 그래놓고 한국 온 거 뭘까.”
“뭐긴, 걔도 신은혁한테 꽂힌 거라니까. 마스크드 바커스 들어간다잖아.”
“세계랭킹 1,2,4위가 모두 한국에 있는 거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마스크드 바커스 하니까 생각났는데, 그 R이란 여자 뭐임? 왜 갑툭튀해서 세계랭킹 7위 되냐?”
“마스크드 바커스면 갑툭튀가 아니라 족히 반년은 활동한 거지 멍청아. 마스크드 바커스 자체가 한국 초인협회가 작정하고 기른 애들이라니까. 분명히 나중에 나머지 애들도 하이랭커 오른다.”
“근데 걔도 신은혁 좋아한다던데.”
“미친 거 아니냐 신은혁? 뇌제랑 연금술사 양다리 걸칠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강신혁은 인상을 참혹하게 구겼다.
양다리는 물론 네 다리도 아니고 명확히 사귀고 있는 대상이 있는데, 그걸 자신이 나서서 해명할 수가 없다니!
“근데 그거 우리 반에도 비슷한 놈 있잖아.”
“아아, 미스 신영과 영국 공주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걸로도 모자라 입학 첫날 1학년 여학생 외모 탑을 접수해버린 우리 ‘킹신혁’을 말하는 것인가?”
“킹갓혁……."
하지만 이거라면 자신이 나서서 해명할 수 있다.
강신혁은 떠들고 있는 남학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새끼들아.”
“아니긴 뭐가 아냐 새꺄 소문 다 났는데! 너 오늘 걔랑 같이 등교했잖아!”
“체력단련하고 같이 나오는 거라고. 아니, 백인하도 같이 있었잖아.”
“백인하는 아닐 거야.”
“백인하는 우리 편일 거야. 우리 편이라고 말해!”
이 자식들, 그저 어그로를 강신혁에게 집중시키고 싶었던 것뿐은 아니었을까.
강신혁은 한숨을 내쉬곤 자신의 왼손을 들어보였다.
그의 약지에서 찬란히 빛나는 은색의 반지를 본 학생들이 순간 굳었다.
“어……."
“뭐냐, 패션링이냐.”
“커플링.”
강신혁의 당당한 대꾸에 어째선지 그와 대화를 하고 있던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실에 있던 학생들 모두가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더 월드 - 시간정지의 힘을 개방해버리고 말았는가 하고 생각했지만, 모두의 시선이 그의 반지에 꽂히는 것으로 보아 시간이 멈추진 않은 모양이다.
유감이었다.
“커플링?”
“강신혁이?”
“누구랑?”
“야, 누구랑?”
강신혁은 감회를 느꼈다. 작년 이맘쯤에는 항상 학생들에게 이런 시선을 받고 있었지, 그야 물론 경멸과 짜증이 담긴 시선이었지만.......
“누군지 말해줘도 몰라. 학교 바깥 사람이니까."
“헐!?”
“이나희 선배 아니고?”
“알제 선배도 아니고!?”
“아니라고. 여친 따로 있다고 몇 번 말해.”
그래, 이거지.
자연스럽게 여자친구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자신과 클레어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것이 걱정되어 감추고 있었지만, 말이 끝도 없이 나오는 것이 짜증나기도 하고 클레어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결국 이런 수단을 택한 것이다.
참고로 이 반지에는 단순한 기능이 있는데, 바로 지정된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색뿐만 아니라 디자인까지 완벽하게 변하는데, 이로써 클레어와 같은 커플링을 하고 있으면서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진짜로?”
“이나희 선배보다 예쁨?”
“당연히 예쁘지.”
“진짜로 다른 여자랑 사귄다고? 하……."
“그럼 선배들은?”
“이미 알고 있어.”
강신혁은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왼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헛소리하고 다니지 마라.”
“이나희 선배 내가 꼬셔도 되냐 그럼?”
“그건 내가 아니라 나희 선배한테 물어봐야지.”
“이건 말도 안 돼.”
모두가 듣는 앞에서 선언한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또 학교 커뮤니티를 강신혁의 이름이 점령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여자친구의 존재가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학생들이 쓸데없이 그의 여자관계에 관심을 갖는 일은 사라지리라, 강신혁은 안심했다.
“그래서 강신혁 여자친구가 누군데?”
“현역 초인이라든데?”
“일단 일반인은 아닐 듯."
“아 쓸데없이 관심 갖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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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초부터 떠들썩한 일이 여럿 발생하기는 했지만, 1학년 때보다 빡센 수업과 실습은 곧 학생들의 지나치게 들뜬 마음을 적당히 가라앉혀 주었다.
자신이 원한 대로 학생회와 비룡기사단에 동시에 가입한 오혜나는 문제를 일으키는 일 없이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다.
오혜나가 본신의 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기사학과에서 제일 짱짱한 집단에 속하고, 심지어는 학생회까지 겸임한다는 것을 알게 된 다른 1학년생들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겠지.
학교 밖의 뱅가드는 두렵지 않아도 학교 안의 학생회와 비룡기사단은 두려웠던 그들은 소극적으로 변했고, 오혜나는 소극적으로 변한 놈들을 차례차례 대련장으로 끄집어내 박살냈다.
강신혁은 제자가 자신의 지시대로 일을 처리하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했다.
비룡기사단은 작년보다 훨씬 활기차게 출발했다.
엘레노어는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강하고 당찼기에 무척이나 독보적인 존재이자 리더였고, 실력 좋은 신입생들을 다른 동아리에 뺏기는 일 없이 순조로이 확보한 비룡기사단은 아이돌 팬클럽과 중세기사단의 중간 즈음에서 타협한 듯한 모습으로 화했지만 그래도 작년도 보다 훨씬 강한 모습을 보였다.
마스크드 바커스 활동은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들 전원이 강신혁의 수호황룡 효과를 누리고 있었던 만큼 그들은 눈에 띄게 빨리 성장하고 있었고, 그 성과가 활동에도 반영되어 초인사회에서의 그들의 입지는 나날이 커져만 갔다.
오혜나는 여기에도 빨리 참여하고 싶은 모양인지 언제 자신의 가면을 구해줄 것이냐며 은근히 강신혁을 채근했지만 그는 최소한 모든 스테이터스가 S랭크는 되어야 한다는 말로 오혜나의 기대를 일축시켰다.
한편 레드슈즈 브리짓 폴센은 정말로 마스크드 바커스에 참여하고 싶은 모양인지 계속 신은아와 강신혁, 그리고 클레어를 졸라댔는데, 처음 만났을 때라면 몰라도 이젠 그녀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강신혁도 긍정적으로(스스로도 놀라웠다.) 검토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학생회는-- 사실 신학기에는 별로 활약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봐야 벽에 신영의 여러 소식과 공지를 담은 신문을 게시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는데, 학기 초 엘레노어의 약혼자 정정 보도나 ‘신인왕 강신혁의 여자친구는 누구인가’ 따위의 특집 기사가 화제가 되었을 뿐(강신혁은 백인하를 반쯤 죽여 놓았다.) 별일도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학생회가 바빠질 때가 왔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순식간에 찾아온 5월…….
체육대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