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 Chapter 49. 다시 봄 - 2 >
싸움이 일어난 곳은 학교에 조성된 작은 숲, 블랙우드.
그 외의 모든 장소는 실습장이 되었든 체육관이 되었든 시종 사람의 눈이 닿는 곳이니,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들이 한 판 붙으려면 그곳만한 장소가 없기는 했을 것이다.
도우진이 정보를 빨리 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는 요즘 훈련소에 내내 머물며 빡세게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훈련소에서 나와 바로 등교하던 중 숲 안으로 들어오는 흉흉한 분위기의 신입생들을 발견한 것이다.
“카렌이 말려보겠다고 남긴 했는데…… 힘들 듯."
“카렌이 남아? 너 카렌이랑 같이 등교한 거야?”
“그야 그 녀석도 요즘 훈련소에 머무르니까.”
어라? 방금 그가 한 말에서 오묘한 감정이 느껴졌는데?
블랙우드 숲을 향해 걸으면서도, 강신혁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우진은 아주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뭐, 새꺄. 얼굴 안 치워?”
“둘이 사귀지?”
“미쳤냐, 내가 왜 그런.”
“그럼 아직은 너 혼자만 좋아하냐?”
“좀 닥쳐.”
맞네.
강신혁은 히죽 웃으며 도우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난 응원한다. 그런데 걔네 집 생각보다 빵빵해서 인정받으려면 네가 더 잘 나가야 돼.”
“뭐? 전에 그냥 평범한 일반가정이라고…… 아니, 안 좋아한다고!”
도우진은 굉장히 속내를 읽기 쉬운 녀석이었다.
유준만 같은 놈들을 상대하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녀석과 서로 미워했던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짜식, 힘내라. 형은 너 밀어준다니까.”
“형은 무슨 형이야, 아 치우라고! 느끼한 눈빛 안 치워!? 게다가 걔는 지금……."
도우진이 울컥하며 뭐라 말하려던 때, 그들은 마침 현장에 도착했다.
“컥……."
“끄윽, 끄으……."
“오혜나, 진정하라고!”
“놔, 오빠, 놔아……!”
그곳에는 남학생 네 명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멀쩡해 보이는 오혜나가 백인하에게 붙들려 씩씩거리고 있었다.
“힉."
“왜 난리래, 거, 거짓말도 아닌데.”
반대편에는 아직 맞지 않은 여학생 두 명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카렌의 등 뒤에 숨어 있었는데, 지닌 능력과는 정반대로 이글거리는 오혜나의 두 눈이 여학생들에게 똑바로 꽂혀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것만 보는데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마 저 녀석들이 오혜나의 뒷담을 까다가 그녀에게 걸려 여기에서 한 차례 푸닥거리를 한 것이겠지.
인류의 배신자 오주영을 아버지로 두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주홍글자처럼 남아, 아무런 죄도 없는 그녀를 계속 괴롭힐 터. 어쩌면 오늘 일어난 일은 그 예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까놓고 말해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척 넘어갈 수도 없지.’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아직 안 오셨냐?”
“아, 신혁아!”
강신혁을 발견한 카렌이 눈에 띠게 밝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서 도우진이 그것보라며 강신혁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지만 그게 아닌데.
자신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중에 도우진에게 가르쳐주기로 마음먹으며 그는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백인하, 괜히 교사 와서 일 커지기 전에 걔 반에 좀 데려다줘. 내가 얘들이랑 얘기할게.”
“아직 남았어!”
말은 백인하에게 했는데 대답을 한 것은 오혜나였다.
뾰족하게 외친 그녀는 곧장 손을 뻗어 카렌의 뒤에 있던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능력을 발현하려 했으나, 강신혁이 빠르게 손을 내젓자 중간에 기화해 소멸했다.
냉기 속성의 마나인지라 조금의 열기로도 간단히 없앨 수 있었다.
“어떻게……!?”
“야, 빨리 데려가.”
“어!”
백인하가 오혜나를 들쳐 업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백인하의 등에 매달린 채 온갖 저주를 토해내는 오혜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강신혁은 녀석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쓰러진 남자애들의 상태를 살폈다.
“오, 그래도 깔끔하네.”
“별로 안 다쳤어?”
오혜나가 사라지자 여학생들을 지키던 것을 멈추고 강신혁에게로 다가오며 묻는 카렌.
강신혁은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깔끔하게 뼈를 부러트렸어."
"......."
“쟤 신학기부터 벌 받는 거 아냐?”
“괜찮아. 여기선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강신혁은 품에서 작은 페트병을 꺼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붉은 액체였는데, 그것을 보며 여학생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포션!?”
“맞아.”
구라였다.
그냥 음료수였지만, 강신혁은 그것을 정말 포션인 것처럼 조심스레 들고 남학생 네 명에게 나누어 먹였다.
녀석들을 치료하는 것은 포션과 색만 똑같은 음료수가 아닌, 그의 황룡투기였다.
그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속여두기 위해 언젠가 준비해둔 것인데 이렇게 써먹게 될 날이 오다니, 역시 준비성은 투철하고 볼일이었다.
“자, 이렇게……."
“와……."
황룡투기는 신체를 활성화하고 재생하는 힘을 지닌다.
워낙 뼈가 깔끔하게 부러져서, 그것들을 이어놓는 것도 정말 간단했다.
오히려 어지간한 포션보다도 빠르고 뛰어난 효과에,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정말 어지간히 비싼 포션인가보다, 하고 감탄했다.
그는 순식간에 네 명을 멀쩡한 상태로 고쳐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것 봐. 아무 일도 없었지?”
“네? 하지만 선배……."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강신혁은 다시 한 번 조금 더 강한 말투로 말했다.
“그치?”
“네, 넵!”
“넵!"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여학생들이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이자, 강신혁은 미소 지으며 기절한 남학생들을 가리켰다.
“얘네들한테도 잘 말해줘. 혹시 납득이 안 가거든 나중에 날 찾아오라고 말하고.”
“으음 그건......."
“걔네가 저희 말을 들을지……."
딱 봐도 뒷담을 먼저 깐 건 여학생들일 것 같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하는 대신 차근차근 말을 늘어놓았다.
“아까 저 여자애 데리고 간 2학년, 눈에 익지? 걔 올해 학생회 부회장이야. 백양 길드 후계자기도 하고. 쟤네 둘이 친해. 덤으로 나는 이래봬도 비룡기사단 부단장이고.”
“그, 그건 알아요.”
“그럼 괜히 일 키울 필요 없다는 것도 알지?”
"우......."
그는 신입생들에게 한 번 더 웃어주고는 조용한 말투로 덧붙였다.
“앞으론 절대 안 걸릴 만한 곳에서 뒷담을 하거나, 아예 뒷담을 하지 마. 정 오혜나가 맘에 안 들거든, 다 보는 앞에서 실력으로 꺾어. 그게 옳은 초인의 방식이야. ……알아듣지?”
짙은 영력에, 특성의 힘도 조금 담아 상대에게 주입하듯이 선언했다.
결과는 무척 효과적이었다.
“네……."
“네!”
“좋아, 그럼 얘네 깨워서 가.”
“넵!"
강신혁은 두 여학생이 남학생들을 깨워, 얼 타는 녀석들을 쿡쿡 찔러가며 후다닥 숲 밖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배웅했다.
순식간에 일이 정리되자 카렌과 도우진은 멍하니 그를 보았다.
“신혁이 너, 방금 좀 이상했어.”
“어떻게 그렇게 서슴없이 권력을 휘두르냐?”
“무력을 휘두르는 것보다 편하잖아. 더구나 난 아무것도 모르는 저것들을 오히려 지켜준 거야.”
만약 저 학생들이 오혜나와 있었던 일을 교사에게 이른다면 처벌당하는 것은 누가 될까?
바로 저들이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뱅가드는 오주영이라는 머리를 잃었음에도 여전히 초대형 길드였고 오혜나는 그들의 공주님이었다.
보나마나 오혜나에게는 생색내듯이 벌점을 조금 부여하는 선에서 끝내고, 오히려 먼저 그녀의 욕을 했으며 똑같이 폭력으로 맞섰다는 이유로 뒷담을 한 학생들을 더 크게 혼냈으리라.
강신혁이 교사들의 얘기까지 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저들을 배려해서였다.
‘학생들의 일은 학생들 사이에서 끝내는 게 제일 깔끔하니…… 말이 안 나왔으면 좋겠네. 아마 안 나오겠지만.’
남학생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여학생들의 마음은 영력으로 대략적으로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적어도 저것들은 먼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약간의 부작용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여학생들에게서 덤으로 읽어냈던 감정을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스틱을 확인하던 카렌이 어, 하며 멍청한 소리를 냈다.
“신혁아, 학교 게시판에 너 멋지다는 글 막 올라오는데?”
“응, 요즘 애들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나보네.”
강신혁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우리도 가자. 수업 시작하겠다.”
“가방은 다 자리에 놔뒀으니까 지각 처리는 안 될 거다.”
“오, 도우진 내 가방까지 가져간 거 그래서였어? 센스 쩔어!”
“이 정돈.”
도우진이 짝사랑하는 소녀 앞에서 가볍게 우쭐거리는 모습에 강신혁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이건, 결코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겠지.
아마 앞으로는 이보다 훨씬 귀찮은 일도 벌어질 것이다. 까딱하면 철없는 교사 중에도 오혜나에게 반감을 품는 이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것들을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덜 피곤하기 위해선 무조건 오혜나를 피해야 하는 건데…….
“야, 우리 비룡기사단 신입은 언제 받냐?”
“아마 이번 주?”
“오혜나 받지 말자고 하면, 안 받을 거냐?”
“상식적으로 걔가 들어오고 싶다고 하면 엎드려서라도 받아야지 않겠어?”
“부단장 권한으로 밀어붙이면?”
“단장님하고 상담해봐. 뽀뽀 한 번 해주면 들어주시지 않을까?”
“뭐? 뽀뽀?”
강신혁은 진지하게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비룡기사단을 나갈까 생각해봤지만, 이건 더 오바인 것 같았기 때문에.
역시 오혜나와 한 번쯤 진지한 대화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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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강신혁은 백인하와 함께 약속장소인 운유관의 1층 카페로 향했다.
카렌과 도우진도 적잖이 오혜나를 만나보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으나 오늘은 조금 내밀한 얘기가 될 수 있었기에 둘은 물려두었다.
아무리 백인하가 함께라고는 해도 강신혁이 있는 만큼 오혜나가 도망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는 다행히도 먼저 나와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그리곤 강신혁을 발견하자마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과연, 애초에 강신혁이 함께 올 줄 몰랐다는 얘기다.
“너!”
이젠 당신조차 아니고 ‘너’라고 부르다니.
강신혁은 공기를 콩알만 하게 뭉쳐 튕겨 녀석의 마빡을 때렸다.
“아야!”
“선배님이라고 불러야지, 선배님.”
“선배는 무슨, 선…… 아야!”
연속으로 공기 탄에 얻어맞은 오혜나가 이마를 붙잡고 끙끙 신음했다.
강신혁은 카운터에서 받아온 카페모카(휘핑크림 많이많이)와 버터 크루아상 세 개, 시나몬 롤 두 개, 스콘 세 개에 미니잼 다섯 개와 클로티드 크림 큰 병 하나, 커스터드 크로칸슈, 생크림 크로칸슈, 초코크림 크로칸슈, 소시지빵 두 개, 쿠키 다섯 개가 담긴 트레이를 내려놓고는 가장 먼저 스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왜 이렇게 많이 산 건데.”
“원래 단련 전후로는 이렇게 먹어주지 않으면 몸이 못 버텨.”
강신혁은 방금 구워 따끈따끈한 스콘에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잼을 발라 크게 깨물어먹으며 대꾸했다.
사실 이젠 황룡투기가 성장하여 조금 굶는 정도로는 아무 문제없지만, 바로 그 황룡투기를 회복시켜주기 위해서는 뭐가 됐든 많이 먹어줄 필요가 있었다.
“아, 단련……."
방학 중에 그와 함께 게이트에 들어갔던 오혜나는 강신혁의 단련 수준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 선배는 왜 왔어? 나랑 인하 오빠 데…… 방해하러?”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스콘 세 개를 순식간에 해치운 강신혁은 카페모카를 쪽 빨아 마시며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선데.”
“시비 걸어와서 눕혔어. 그게 끝이야.”
“뱅가드 빽 있으니까 세상이 우습냐?”
“뭣, 아니……."
강신혁의 날카로운 말에 오혜나는 순간 움찔했다. 강신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앞으로도 시비 걸릴 때마다 교칙 다 무시하고 두들겨 패고 다니면 뱅가드 이미지가 참 좋아지겠다. 그렇지?”
"......."
“아니, 어쩌면 네가 산증인이 될지도 모르지. 명예도 권위도 없이 자존심만 남아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고 다니면서, 인류수호의 최전선이었던 뱅가드가 완전히 망해간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너!”
“앉아.”
강신혁의 짧은 한 마디가 오혜나를 주저앉혔다.
강신혁은 소시지빵을 한 입에 우겨넣곤 우물우물 씹으며 옆에 앉은 백인하를 살폈다.
무력하게 주저앉은 오혜나는 백인하를 보며 구해달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백인하는 단장의 심정으로 그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화낼 거 없어. 사실이잖아. 백인하가 너한테 잘해달라고 해서 이런 말이라도 해주는 거야.”
“꼰대……!”
- 저년을 지금 죽이겠습니다.
‘참아요.’
사실 자신도 조금 꼰대 같다고는 생각했다.
그것도 이제 갓 2학년이 되어서는 1학년 신입생에게 훈계를 하고 있다니, 꼴이 우스운 것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백인하는 오혜나에게 너무 무르고, 일이 커지기 전에 그녀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교내에선 적어도 자신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아? 세상 사람 누구나가 오주영을 떠받들 땐 좋았겠지, 이젠 그게 반대로 돌아올 뿐이야.”
"큭......!"
입술을 깨물며 분해하는 오혜나의 모습을 힐끗하며 강신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껏 기를 죽였으니 이젠 북돋워줄 차례였다.
“나도 계속 참고만 살라는 게 아냐. 학교면 학생답게 싸워야지. 가장 대표적인 건 성적, 대련도 있겠네. 가장 가깝게는 4월 체육대회에 펼쳐지는 신인전도 있고. 교칙에 맞춰 합법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두들겨 팰 수단은 무궁무진해.”
“......응?”
그 순간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오혜나의 눈이 반짝였다.
대신 백인하가 눈을 지그시 뜨며 그를 째렸다.
“야, 강신혁.”
“왜, 맞는 말이잖아. 내 말의 요지는 뭐냐면.”
생크림 크로칸슈를 파삭, 깨물어 먹으며 강신혁은 말했다.
“앞으론 뱅가드 이름 더럽힐 생각하지 말고, 교내에서 통용되는 너만의 힘을 쌓으라고.”
“어……."
“권력도 좋은 수단이 되겠네. 학생회 임원 같은 거 좋잖아? 그러면 아무도 너 무시 못해. 뒷담도 무서워서 못 깔 걸. 냠.”
말을 마치고 카페모카를 한 모금 마시며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이어서 시나몬 롤을 세 입에 나누어 해치우곤 손가락을 핥는 강신혁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마치 CF를 보는 것 같아, 백인하도 오혜나도 조금 홀리고 말았다.
물론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그가 품은 상큼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사회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야. 너 자신만의 가치를 키워나간다면 다른 사람들도 개인으로서의 너를 존중하게 되겠지. 극단적으로 말하면, 네가 네 아버지를 뛰어넘는다면 더는 아버지를 들먹이며 널 욕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될 거란 얘기다.”
“진짜 좋은 거 가르친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지.”
백인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해주고 싶었던 얘기도 다르지 않아, 혜나야. 아침엔 좀…… 널 화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냐, 오빠.”
과연, 아침에 이미 오혜나의 설득을 시도했다가 뭐가 잘 안 되었던 모양이지.
그러나 오혜나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이제 아침에 오빠가 뭘 말하고 싶었던 건지 좀 알겠어. 나대고 싶으면 생각 좀 하고 나대라는 거.”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나, 학생회 들어갈래.”
오? 강신혁의 귀가 팔랑거렸다.
그녀가 알아서 학생회로 들어가 준다면 강신혁과의 접점도 적어질 것이고, 자연히 그가 귀찮아질 일도 적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이 그의 표정을 썩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룡기사단도 들어갈래.”
"뭐? 우리 겸임 안 된다.”
“우리 학교 그런 교칙 없다, 시뇩아.”
정색하며 말하는 강신혁의 머리를 두드리며 백인하가 정정했다.
그러든 말든 이미 마음을 굳힌 오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신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길게 기른 머리가 폭포처럼 아래로 쏟아져 그녀의 얼굴 표정을 가렸다.
“고마워…… 선배. 선생님들 귀에 안 들어가게 막아준 거…… 애들, 설득해준 거.”
“오.”
“우리 혜나 좀 봐, 다 컸어……."
“너 좀 깬다.”
눈물을 찍어내는 백인하의 모습에 강신혁이 그와 거리를 조금 벌렸다.
“선배.”
오혜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리도록 푸른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단련, 같이 하고 싶은데.”
“싫은데.”
즉답하는 강신혁을 본 오혜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덧붙였다.
“선배가 만든다는 비공식 길드, 들어갈게.”
“야, 백인하.”
“중요한 건 얘기 안 했어! 그냥, 길드를 초월한 공익집단을 만들고 싶다는 얘기만......."
“이 자식……."
백인하와 오혜나가 아무리 친해도 결국은 경쟁 길드. 즉 백인하는 마스크드 바커스로 오혜나를 끌어들여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진짜 목적은 강신혁의 능력으로 오혜나도 성장시키고 싶었던 것이겠지만, 오혜나는 내막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훌륭히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었고…….
“그러니까 절 강하게 만들어주세요.”
오혜나가 재차 고개를 꾸벅 숙였다.
거의 90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자신의 부친을 죽였던 사람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다니, 강신혁은 오혜나를 다시 보게 된 기분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젠장……."
카페 안에 있는 사람은 족히 수십 명은 되었고, 지금 그들 전원이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신혁은 아무래도 조만간 새로운 소문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