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 Chapter 48. 황금용은 무적 군단의 꿈을 꾸는가 - 1 >
모든 것이 끝나고 복귀한 츠쿠요는 강신혁에게 뺨 한 대 정도는 맞을 각오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강신혁은 그녀에게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대로 보험이라도 하나 들어 줄 것 같은 든든한 반응에 츠쿠요가 외려 곤혹스러워할 지경이었다.
[모루……? 묻지 않으시나요……?]
“제가 알아야 할 만큼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제 탓에 인간들이 많이 죽은 것에 대한 대가를, 제가 모루에게…….]
“그 상황에서 제가 빠졌으면 더 큰일이 났겠죠. 그러니까 츠쿠요한테는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네요.”
새끼 여우는 신묘한 표정을 지었다.
강신혁은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고마워요, 츠쿠요. 하나부터 열까지 배려만 받네요.”
[아, 아아아아…… 캬아앙!]
새끼 여우는 미안함과 황송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더니,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견뎌 내지 못해 결국 선 채로 기절했다.
강신혁은 그제야 분이 조금 풀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불여우를 그렇게 쉽게 다루시다니 과연 회원님이십니다.
“음, 그러고 보면 관리자 님한테도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죠.”
-1,500,000HP 보너스!
불온한 낌새를 맡은 관리자는 역대급 HP 보너스를 토해 내고는 그대로 기척을 감추었다.
강신혁은 몇 번인가 관리자를 찾았지만 반응이 없었기에 아쉽게도 포기하고, 베이스캠프에 어수선히 널브러져 있는 용병들 틈에서 이진석을 찾아내 말을 걸었다.
“뭐 하냐?”
“아, 사망 인원 체크. ……나중에 보상을 지급해야 하니까.”
뒷맛이 굉장히 씁쓸한 업무를 하고 있었다.
강신혁은 순간 머뭇거렸지만, 과장되게 반응할 수도 없어 쓰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치곤 말했다.
“직급은 수직 상승해 놓고 하는 건 현장직 실무야?”
“제대로 된 실적이 없으니까 이런 거라도 같이 해야지……요.”
지금 이진석은 ‘제우스 길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거너즈 길드를 대표해 인형사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은 간부 포지션으로 강신혁을 대하고 있었다.
아까 게이트 안에서 가장 먼저 그에게 다가가 상황을 알렸던 것도 있고, 계속 동기들과 모르는 척하는 것도 귀찮았던 강신혁이 대놓고 그를 아는 척할 겸 거너즈 길드에게 요구한 것이다.
“혜나랑 운형이는?”
“짐 목록 체크. 그쪽이야말로 제법 간부다운 일을 하고 있지……요.”
“당분간은 업무 익히느라 정신없겠네.”
거너즈 길드의 기존 간부진은(이번에 그중 절반가량이 죽었다.) 무려 세계 랭킹 4위, 심지어 이번 원정에서 돌아가게 되면 무조건 랭킹이 상승할 것이 확실한 인형사와 커넥션을 갖게 된다는 것에 지나치게 흥분하여 이진석을 - 그리고 그의 동기들을 - 능력 여부와 관계없이 간부로 만들어 버렸다.
마침 동기 3인방이 모두 능력자로 각성했기에 딱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맞아, 실은 혼자서 능력 수련이나 하고 싶은데! 있잖냐, 운형이는 몰라도 혜나한테 지면 절대 안 되는데 혹시 한국 돌아가면 나 또 개인 과외……."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는 듯 강신혁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며 헛소리를 하는 이진석.
강신혁은 친구의 머리통을 상냥하게 내려치며 말했다.
“아주 다 뜯어먹으려고 하네, 새끼가. C++이나 공부해, 이진수야.”
“아오!”
이진석은 그를 째려봤지만 자신도 강신혁에게 지나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는지 미련 없이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그가 강신혁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 어디 하나둘이던가.
제아무리 능력을 각성했다고는 해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거너즈의 핵심 간부로 부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강신혁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번에 제우스를 완전히 말아먹었으니 거너즈가 업계 1위를 탈환하기까지 하겠지.’
물론 거너즈도 이번에 제우스의 계략에 휘말리며 상당히 많은 숫자가 죽음을 맞이했지만, 아예 기둥뿌리가 뽑힌 제우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저번 해상에서와는 달리 확실하게 제우스 길드가 요르문간드와 연결되어 있다는 물증이 나왔기에, 이미 한국 초인 협회에 연락해 제우스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잡혀 들어가고 있었다.
‘……은아 선배의 부모님이 순순히 잡혔다는 게 가장 불안한 요소지만.’
그들도 과거 랭킹이 상당히 높았던 전직 랭커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작전이 실패하자 제대로 된 도주 시도나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경찰의 오라를 순순히 받았다는 것이 역으로 수상했다.
어쩌면 딸의 힘으로 풀려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일까?
……정작 그 신은아가 가장 먼저 협회에 보고를 했는데.
“신…… 인형사 님? 그래서 무슨 일? 얼굴 심각한데.”
“아. 아냐. 수고.”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그를 떠나 성벽 쪽으로 향했다.
어쩐지 그의 기운의 흔적이 느껴져서 무의식중에 발이 그쪽으로 향한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성벽 밖에 엘레노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그녀에게 버프를 걸어 주기는 했지만 그건 이미 한참 전의 일인데, 여태까지 버프가 지속되고 있는 것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려는데.
그녀와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여, 그는 다급히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미련하구나, 로즈.”
그녀를 다짜고짜 비난하고 있는 이는, 얼굴을 로브의 후드로 덮어 감추고 있기는 했지만 분명 영국의 공주 올리비아.
강신혁은 그제야 이 일대에 결계가 쳐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력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강신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계를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뒤늦게나마 그것을 깨달았기에 그녀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육친을 구하려 하는 것이 미련한 일인가요?”
강신혁 앞에서 살짝 혀 짧은 듯한 한국어를 구사하던 때와는 달리, 언니를 상대하는 엘레노어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고 냉정했다.
그녀의 귀족적인 악센트를 들으며 강신혁은 새삼스레 엘레노어가 영국의 로열패밀리였음을 되새겼다.
“미련하지. 왕위를 위해 나를 적진에 버려두고 도망친 나의 오라비보다 훨씬.”
“……그는 이제 끝났군요.”
“그래.”
엘레노어가 탄식하며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에, 올리비아가 짓궂은 말투로 대꾸했다.
“네가 거기에 일조했지. 네가 날 돕지 않았더라면 결국 그가 왕이 되었을 테니까.”
“전 누가 왕이 되든 관심 없어요. 언니가 위험해서 도우러 갔을 뿐이에요.”
“아직 학교 방학이 좀 남았지?”
갑자기 화제를 돌리는 그녀에게 엘레노어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금 영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냐. 단지 네가 내 지지 선언을 해 줬으면 좋겠어.”
엘레노어가 코웃음을 쳤다.
가뜩이나 왕가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던 그녀에게 지지 선언을 부탁한다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비웃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한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마스크드 바커스의 R이라는 신분을 드러내고 말인가요?”
“그래.”
“거절합니다.”
엘레노어는 단호히 말하며 돌아섰다.
그녀의 등에 대고 올리비아가 외쳤다.
“인형사는 네 신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네?”
“너, 그를 사랑하잖아? 멀리서 봐도 알겠던데.”
어째서 지금 그의 얘기가 나오냐는 듯 어처구니없어하며 돌아서는 엘레노어에게, 올리비아는 제 딴엔 굉장히 큰 인심을 썼다는 투로 제안했다.
“내가 공작위까지는 준비해 줄 수 있어. 네가 그와 결혼해서 돌아온다면 말이야. 너와 그의 앞으로 각각, 만족스러울 만큼의 땅도 마련해 줄게. 초인의 무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나머지 모두를 내가 챙겨 줄 수 있어.”
“그는 내 것이 아니에요.”
“네가 싫다면 내가! 제안할 생각이야. 너를 배려해서 먼저 얘기를 해 준 건데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정말로……!”
생각보다 담담한 엘레노어의 반응에 놀랐던 것일까, 다소 발작적으로 외치는 올리비아.
그러나 엘레노어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는, 언니의 것은 더더욱 아녜요.”
“너……?”
“저와 그는 지금의 관계에, 위치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언니의 제안에는 저와 같은 반응을 보일 거라 확신하고요. 얘기가 그뿐이라면, 가 볼게요.”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게 될 언니를 상대로 엘레노어의 태도는 지극히 당당했다.
약 1년 전, 영국의 정치적 암투에 휘말리기 싫다며 무턱대고 자신을 감추려 들던 어린 소녀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장을 거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흥…… 어려서 그런가? 아직 남자를 모르는구나, 로즈.”
“적어도 언니보다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우리 많이 친하거든요.”
“너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얘기니? 그렇다면 그도……."
엘레노어가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음을 간파한 올리비아는 온갖 수단을 이용해 그녀를 흔들어 보고자 했다.
아까 전장에서 그녀가 보여 준 힘은 영국 외부에 놔두기엔 너무나 아까운 것이었다.
인형사와 함께 데려올 수 있다면 최상, 설령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그녀만을 거둔다 해도, 자신의 곁에만 놔둘 수 있다면 큰 힘이 될 터였다.
하지만.
“언니.”
엘레노어는 싸늘한 목소리로 올리비아의 말을 끊었다.
“그에 대해서는 너무 궁금해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이것 아니? 네 정체를 내게 들킨 시점에서 이미 그의 신분을 알아낼 가능성이 커졌다는 걸?”
“알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엘레노어는 차분히 말하며 자신의 창을 바닥에 꽂았다.
두부를 가르듯 자연스럽게 깊숙이, 붉게 물든 게 볼그가 대지를 가르고 파고들었다.
“저는 그의 사람이고, 그에게 위해가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특히 저 때문에 그의 신분이 노출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전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몰라요.”
“설마 나를 협박하는 거야? 대영제국의 여왕이 될 나를,”
“이제 슬슬 현실을 보세요, 언니.”
엘레노어가 바닥에 박았던 자신의 창을 뽑아 올리며 피식 웃었다.
“영국을 전부 털어도 초인 한 명의 이름값만 못한 세상이 됐어요.”
“너! 그게 왕족으로서 감히!”
“더 할 말이 없으니, 가세요.”
축객령을 내린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자신을 노려보는 올리비아를 보며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지브롤터 수복에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받고 싶으시거든, 오늘 일은 언니 가슴에만 묻어 두는 게 좋겠네요."
"......."
왕족의 긍지도, 영국 여왕의 권위도 그녀에게 먹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올리비아는 입을 떡 벌린 채 경악하다가, 엘레노어의 단호한 태도를 자신이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힘없이 돌아섰다.
"후......."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엘레노어가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강신혁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걸까, 강신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못난 모습 보여서 미안해.”
“당당해 보이고 좋던데 왜.”
“부끄러워……."
언니를 상대로 당당하게 대꾸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오징어처럼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강신혁은 그녀를 보며 나직이 웃었다.
“여기 올 때만 해도 엄청 신경 쓰고 있었잖아, 영국.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거야?”
“그건, 지금도 많이 신경 쓰여. 명예를 걸고 지브롤터도 되찾고 싶어. 하지만……."
엘레노어는 그 부분에서 말을 멈추더니, 조금 더 분명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굳이 내가 굽히고 들어갈 필요 없으니까.”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건 중요한 일이지.”
“네 덕분이야.”
엘레노어가 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대로 껴안으려는 걸까 움찔하며 피하는데, 엘레노어가 한 손을 뻗어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아 왔다.
“내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된 건, 모두 네 덕분이야.”
“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난 앞으로도 쭉 너와 함께할 거야.”
마스크드 바커스가 되었든, 마스크를 벗고 앞으로 나서든.
엘레노어는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선언했다.
“네 곁에서 싸울 거야.”
강신혁은 그 후 엘레노어의 특성이 개화하며 SSS-랭크까지 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헬 스파이크 와이번, 헬이 종족 진화를 겪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비로소 자신의 특성이 단순히 무능력자를 각성 시키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