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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화. < Chapter 47. 비와 여우 - 6 >

지극히 좁은 전장의 한 구석에, 푸르고 붉은 비가 내렸다.

생명과 맞닿는 순간 격렬한 폭발을 일으키는 에너지로 구성된 눈과, 그것을 강제로 중화시키는 불꽃이 충돌한 결과물이었다.

츠쿠요는 비로소 모든 공격성을 잃어버린 빗물을 뺨에 맞으며 활짝 웃었다.

“이만하면 차원 퀘스트 대성공이로군요. 모루에게는 조금 혼나겠지만, 그도 또한 즐거움이네요.”

- 관리자는 불여우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틱틱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직접 울리는 듯하다.

츠쿠요는 귀를 쫑긋거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설마 이 자리에서 희생된 생명의 가치를 논할 생각인가요? 농담이겠지요?”

- 하루에도 수천억씩 피어나고 죽는 생명 하나하나를 되새길 생각은 없습니다. 관리자는 그저 이번 일로 상처 입었을 그분의 섬세한 마음에 대해 논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휴, 이년이나 저년이나 역겹기는 매한가지라니까.”

츠쿠요는 철선을 펼쳐 휘둘러, 자신의 몸을 적시려 드는 빗물을 휘저어 떨쳐냈다.

그녀의 날렵한 콧등 위로 떨어져 탐스러운 입술을 지나 미끄러지며,

깎아낸 듯 매끄러운 턱을 타고 목선을 따라 흐르던 물방울이.

철선이 만들어낸 바람에 튕겨나 허공에서 증발했다.

“이런, 부채의 날이 조금 상하고 말았네요……. 저와 모루의 사랑의 결정인데.”

- 불여우!

“시끄럽기도 해라. 내게 대답을 요구하는 건가요?”

- 관리자에게 무분별한 욕설을 내뱉은 대가는 적지 않습니다.

“쯔, 어리석은.”

그녀는 겉이 조금 상한 철선을 안타까운 눈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모루는 강인한 사람이에요. 처음엔 비록 그의 본질이 훼손되었을까 저어되어 감히 그를 의심했지만, 지금이라면 확신할 수 있어요. 오히려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기에 그는 모든 자격을 얻어, 세상을 지탱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아아, 모루. 나의 모루……."

- 미친년의 말장난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불여우, 차원 퀘스트가 완수되었으니 당신의 심장처럼 어둡고 축축한 당신의 세계로 꺼지도록 하세요.

“하."

츠쿠요는 코웃음을 치며 관리자의 메시지에 대꾸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이 지대에서 마기를 걷어내기까지는 차원 퀘스트가 끝났다고 할 수 없지요. 아직 인류의 힘으로는 마기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 하지만 그분께서도 얼마든지…….

“모루는 제 철선을 다시 단련하느라 바쁠 예정이에요. 그분께서 직접 약속해주셨답니다? 후후, 후후훗. 어쩜 모루는 상냥하기도 하지......."

- 미친년.

관리자는 그녀와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여겼는지 더는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다시 찾아온 적막 아래, 츠쿠요는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은 조각난 용암 대검의 검날을 보며 작게 웃었다.

“모루에게 줄 선물이 생겼으니 다행이네요. 가능하다면 그녀를 직접 데려다 무릎 꿇리고 싶었지만…… 아무튼 물리쳤으니.”

검날을 주워들어 품에 챙기며 그녀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제법 유쾌한 변수였다.

모루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인지 직접 보살피고 있는 여아가, 감히 자신과 그녀의 전투에 끼어든 것이니까.

더욱 놀라운 점은 그 깜찍한 돌격을 감행하고도 둘이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루의 권능이었지.’

충격의 여파에 휩쓸리는 것만으로 소멸되었어야 할 여아와 몬스터.

둘은 모루로부터 받은 황금의 기운과 영력으로 인해 필사를 각오한 순간 한 단계 나아가는 데에 성공했다.

두 존재를 감싼 눈부신 빛, 실시간으로 성장한 근원과 싹을 틔운 가능성.

그 순간 전장의 모든 괴물이 그 둘을 주목했음을, 정작 그 아이는 깨닫지 못했으리라.

놀랍게도 여아는 그 순간 자격의 일부를 얻었고, 목표하던 바를 이루었다.

마력폭풍의 핵심을 꿰뚫어 무산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육친과 애꿎은 초인들을 구해냈다.

‘어쩌면 그 아이는…… 히어로 유니버스에 들어올지도 모르겠어. 역시 모루의 손길이 직접 닿는 세상이라 그런지 후보가 많아지는걸.’

만약 그대로 놔두었더라면 분노한 ‘그녀’의 검에 갈기갈기 찢겨나갔을 터이나, 공교롭게도 츠쿠요는 그 순간 그녀에게서 빈틈을 포착했고 서슴없이 공격했다.

결코 모루에게 우습지도 않게 꼬리를 치는 여아를 구해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피해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암, 결코 아니었다.

단지 그 순간, ‘그녀’에게서 가장 큰 빈틈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째서 주춤한 것인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츠쿠요였기에, 더더욱 망설이지 않았다.

그 일격으로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납득하고 물러갔으며, 지나치게 빠르게 퇴각한 탓에 회수해야 할 파편까지 하나 남기고 말았다.

츠쿠요가 방금 주운 것이 바로 그 파편이었다.

“자, 그러면 우선 결계를 치고.”

마기에 짙게 물들어 인간을 변화시킬 위험이 있는 대지에 임시로 결계를 두른다.

물론 그 위에 몬스터들이 많이 남아있었으나, 그들까지 처리해줄 마음은 없었다.

저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이고, 애초에 ‘은아’가 그녀의 힘을 이용해 날뛰는 바람에 숫자가 대폭 줄어들기까지 했다.

“저 아이도 정말 극성이라니까.”

아직까지도 전장의 한복판에서 눈을 부릅뜨고 마력을 휘두르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지그시 째리며, 츠쿠요는 성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래서야 아직 멀었네, 멀었어.”

@@@

제우스 길드가 착각한 것이 있다면 두 가지.

그들이 요르문간드와 대등한 거래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이 첫 번째다.

요르문간드는 단지 제우스가 흥미로운 실험을 한다 여겨 그것을 조금 들여다보고 자그마한 힘의 파편을 던져줄 마음을 먹었을 뿐, 그들과 주기적으로 거래하며 그들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지켜줄 마음은 없었다.

자신들이 얻은 힘으로 지구의 초인들 따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두 번째다.

물론 마기는 섬뜩한 힘이었고 마력에 비해 보다 파괴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힘이었지만, 지구에는 마기를 상대할 때 우위를 갖는 능력자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표적인 이가 바로 강신혁이었다.

“이거,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강신혁을 모르는 척 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진석이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강신혁은 하나같이 심장을 꿰뚫려 쓰러진 제우스 길드의 버러지들을 한데 모으며 간략히 대꾸했다.

“마기를 쫓는 탄환을 쐈어.”

바로 얼마 전, 초월포션 하나를 무의미하게 마셨을 때.

그가 만들어둔 비장의 탄환은 암탄 하나가 아니었다.

에너지를 빛의 기운으로 화하여 가장 강력한 광탄이며 동시에 성탄을 단 한 발, 빚어낸 것이다.

에너지가 쇠하지 않는 한 모든 악한 기운을 추적해 깔끔하게 영혼까지 ‘태워버리는’ 빛의 탄환.

만약 신은아의 마력으로 만들어낸 뇌룡으로 괴인을 꺾을 수 없었더라면, 그땐 이 탄환을 놈에게 쏘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빛의 탄환 없이도 놈에게 이길 수 있었고, 그 덕에 강신혁과 조우한 제우스 길드가 미처 도주를 꿈꾸기도 전에 모조리 묻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따위 놈들에게 쓰기는 조금 아까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 저들은 요르문간드와 결탁해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도주하기 전 한꺼번에 모아 정리한 것은 큰 소득입니다.

하긴 관리자의 말도 옳았다.

그는 게이트를 이루던 마력의 핵심이 무너져, 곧 붕괴될 것이 뻔한 게이트 내부의 환경을 한 번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다 죽었겠지만, 확실히 해야 하니까 시체를 모아주세요.”

강신혁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발한 목소리는 죽음을 앞두고 벌벌 떨던 모든 용병들의 귓가에 쏙쏙 박혔다.

“아, 알겠습니다!”

“당장 움직여!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물증도 확보해! 제우스 이 자식들이 요르문간드랑 확실하게 붙어먹었다는 증거를!”

“이제 이것들은 끝장이다!”

제우스 길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이진석을 비롯한 강신혁의 동기 3인방은 어쩔 수 없이 능력을 드러내야 했고, 살아남은 거너즈의 단원들은 자연스럽게 그 셋을 중심으로 뭉쳐 움직였다.

비록 제우스 놈들에게 휘말린 탓에 끔찍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번 일로 입은 상처가 아물 즈음이면 세 명의 유망한 능력자를 중심으로 보다 높이 비상할 수 있으리라.

- 저쪽도 마무리되었습니다, 회원님.

사체를 모조리 모아 게이트 밖으로 끌고 나온 시점에, 문득 관리자가 그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강신혁은 이강율과 유준만의 시체를 확인하고, 놈들의 몸뚱이에서 마기로 이루어진 갑주의 파편을 뜯어내며 대꾸했다.

“츠쿠요는 무사한가요?”

- 모두 무사합니다.

“모두.”

- 예, 모두 무사합니다.

관리자의 대꾸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공간이동을 하기 직전 자신의 눈에 들어왔던 그 검을 떠올린 강신혁은 관리자에게 한마디 톡 쏘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졌으나, 이윽고 그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츠쿠요나 관리자나, 그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을 가장 배려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를 그가 아니었다.

“츠쿠요는 저를 속였어요.”

- 그렇습니다. 아주 괘씸한 불여우죠. 앞으로 두 번 다시 얼굴을 맞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었겠죠. 그녀가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아요.”

- 아뇨!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관리자가 보증합니다!

“보상을 해줘야겠죠.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과도한 스킨십은 안 되겠지만……. 클레어의 허락을 받을 수 있다면 한 번 끌어안아주는 건 괜찮겠지.”

- 끌어안아……!? 침이나 뱉어주시는 게 어떨까요! 1,000,000HP 보너스!

“글쎄 미션 걸지 말라고요.”

하지만 츠쿠요라면 그것마저 기꺼워할 것 같아 조금 두려웠다.

“응......?”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차가운 것이 떨어져 그의 이마를 두드렸다.

고개를 드니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지극히 무해한, 어쩌면 마시는 것만으로 몸을 회복시켜줄 것만 같은 생기 넘치는 물방울이.

투둑, 투두둑, 인간을 잡아먹는 게이트에서 풀려나 현실로 돌아온 베이스캠프 곳곳을 두드리며 생을 연주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은데, 여우비네.”

그래, 하늘이 투명하게 맑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짙은 마기와 몬스터들로 뒤덮여 시커멓게 물들었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는 하늘이, 그야말로 여우의 장난처럼 느껴져 조금 우스웠다.

어쩐지 모든 소란이 끝난 듯하여 강신혁은 묘한 감회를 느꼈다.

‘아프리카 정벌은 역시 일렀어요.’

- 하지만 이번 대역류는 아프리카의 기운을 상당히 소모시켰죠. 결국 불여우가 바라던 대로 되었습니다.

‘그래요. 인류는 유예를 얻었네요.’

그 너머에서 요르문간드라는 거대한 적의 실체와 싸웠던 이가 있었음을 인간들은 알 것인가.

아니, 아직은 모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관리자님,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면 여우가 시집을 간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 안돼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

언젠가는 모두가 알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잠시, 이 맑은 하늘에 속아줘도 괜찮을 것이다.

강신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짧고도 길었던 아프리카 원정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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