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 Chapter 47. 비와 여우 - 4 >
- 크가가가가가!
번개로 몸을 이룬 용이 갑주의 겉면을 훑고 지나가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강신혁은 그것을 보며 작게 웃었다.
‘역시 되네.’
- 이 기운을 담아낼 아티팩트를 만들어두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쯧쯧, 자신의 것도 아닌 기운을 담아 증폭까지 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려거든 이 구슬을 재료로 써야 했겠지요. 두 가지 기운으로 즉석에서 무기를 제련하는 것, 모루의 진면모를 본 것 같아 저는 무척 기쁘답니다.]
신은아의 마력은 뇌기로 변환되었을 때 가장 큰 효율을 보인다.
그녀의 다른 특성이 뇌전의 지배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강신혁은 그것으로 순도 높은 번개를 뽑아내 황룡투기로 중심을 잡고, 영력으로 틀을 씌워 그 자체로 강한 파괴력을 갖는 무기로 재탄생시켰다.
무식한 에너지 낭비였지만 그 효과는 강렬했다.
황금의 뇌룡에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괴인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것만 봐도 확연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벌써 여기까지.
갑주의 일부분이 그슬리자 놈의 태도가 보다 진중해졌다.
하지만 직후 놈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주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막대한 권능의 일부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 설마…… 갑주의 힘을 지우신 겁니까?
“더 재밌어질 거라고 했잖아!”
아무렴 전생의 자신이 만든 물건인데 아티팩트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아티팩트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다면, 일시적으로라도 그 성능을 낮추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는 게 당연하다!
‘저 자식이 현계한도를 돌파한 데에는 갑주의 영향도 크다. 그러니 이대로 갑주를 무력화하면……!’
뇌룡의 형태를 한 번 흩어 수중으로 되돌린 강신혁이, 그것을 전신에 두르고 일직선으로 돌격했다.
그 속도는 괴인의 그것에 비해 그리 밀리지 않는 수준!
-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
괴인은 침착하게 대검을 내리쳤다.
현계한도를 돌파한 대검은 분명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그 궤적을 눈으로 읽을 수가 없었고, 내려치는 순간 목표물을 관통하는 이치에 어긋난 힘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그것이 대지를 강타하는 순간, 바닥에 수 미터 깊이의 구멍이 파이며 붉은 용암이 솟구치기까지!
‘음?’
--그래서 강신혁도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내리치는 순간 목표를 가르는 대검의 그 궤적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해낸 것이다.
워낙 그의 회피가 빨라, 적은 그의 잔상을 베고도 자신이 그를 베었다고 착각해 후속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순간 미약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는 그것이 황룡투의 공능에서 비롯된 반사신경의 효과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놈의 텅 빈 복부에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쾅!
황룡투기와 영력으로 감싸인 주먹이 갑주를 파고든 것이 일격이요, 팔을 타고 치솟은 뇌룡이 갑주를 깨트리고 그 내부에 타격을 집중 시킨 것이 이격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강신혁을 베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괴인은 그 즉시 검을 비틀어 내질렀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 궤적을 파악하고 물러선 강신혁은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어떻게 자신이 놈의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는지 깨달았으니까.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알고 있는 동작이다 싶었는데, 기분 엿 같네 진짜……."
- 크하아아아!
이번엔 괴인이 반격할 차례였다.
그의 대검에 용암이 솟구쳐 삽시간에 수십 미터 길이의 검을 이루더니, 강신혁이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전방을 휩쓸며 내질러졌다!
그것을 피하겠답시고 허공으로 도약하기라도 했다간 직후 보다 치명적인 일격이 덮쳐 오리라.
이번엔 그것을 피해낼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린 강신혁은, 과감하게 정면으로 그것을 받아냈다.
물론 맨몸으로는 아니었다.
- 콰아아아!
충돌 순간 그의 양팔을 휘감고 타오르는 백색의 불꽃!
그것은 라이트 마스터리와 파이어 마스터리의 힘을 조화시켜 만들어낸 성화(聖火)였다.
거기엔 그의 품에 있는 신염의 보주의 힘까지 일부 담겨 있었고, 괴인의 용암 대검과 부딪쳐도 그 열기를 이겨내게끔 해주었다.
더욱이 검의 궤적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기에, 그것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도 충격을 흘려내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충격을 완전히 이겨낼 수는 없어 몸이 뒤로 밀려나며 팔이 부러질 듯한 고통이 닥쳤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떨쳐냈다.
“기분 더럽다고 새끼야!”
성화가 폭발하며 놈의 검을 집어삼켰다.
강신혁은 그 틈을 뚫고 뇌룡을 길쭉한 창으로 전환시켜, 자신이 아까 구멍을 뚫어놓은 놈의 복부를 향해 있는 힘껏 내던졌다.
-큿!
괴인의 전신이 용암으로 화했다.
아마도 특정한 조건을 바탕으로 신체를 용암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모양이었지만.
- 쿠과아아아!
- 크학!
뇌창이 용암의 한가운데를 꿰뚫자 놈에게서 고통을 참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그것은 뇌창을 뒤덮고 있는 강신혁의 영력 때문이리라.
츠쿠요의 조언이 있든 없든, 강신혁의 모든 공격에는 충만한 영력이 담겨 적의 본질을 직접 공격한다.
용암으로 변하든 공기로 변하든, 그가 쏘아낸 뇌창은 그 핵심을 찔러 터트릴 힘을 갖추고 있었다.
“이게 어디 영력도 모르는 게 아들이라고 까불……."
- 아버지이이이이이이!
- 회원님!
놈의 괴성과 그에게 주의를 촉구하는 관리자의 메시지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직후 강신혁의 발밑에서 용암이 솟구쳐 그의 하반신을 집어삼켰다.
“큭!?”
강신혁이 다리를 잃지 않았던 것은 관리자의 메시지가 적절하게 날아든 것과 영력으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던 것, 끊임없이 차오르는 황룡투기가 그의 육신을 보조한 것,
그리고 공간조율을 숨 쉬듯 발휘할 수 있도록 연습해두고 있던 덕분이었다.
- 공간조율(SSS) 스킬의 숙련도가 C-랭크로 성장합니다!
“허억, 하아아……!”
- 크으으윽!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피해를 완전히 면할 수는 없었다.
하반신을 보호하고 있던 장비와 옷이 완전히 날아가고, 피부도 타버려 죽은 피가 맺혔다.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근육까지도 용암의 독기가 밀려 들어왔다.
영혼독 스킬이 아니었다면 용암에 담긴 독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근육이 가닥가닥 끊어져, 그 자리에 쓰러졌으리라.
강신혁은 곧장 슬롯 기능을 발동, 하반신에 다른 장비를 소환해 착용하며 이를 갈았다.
‘잘 막아내고 있었는데 고작 한 방에…….'
[감히 모루의 육신에 상처를 입히다니……. 후, 후후후후. 제가 직접 저것을 찢어죽이고 싶은 걸요……!]
초월 포션의 약효가 남아있어 빠르게 회복되고는 있었지만, 이제 신체능력에 의지한 고속기동은 힘들어졌다.
공간조율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겠지만 적의 근처에서 공간능력을 구사하는 것은 반격의 위험성이 너무 컸다.
그렇다면……!
“역겨운 검술 흉내는 관두기로 했냐!?”
강신혁은 독기를 담은 외침과 함께 뇌룡을 쏘아냈다.
놈은 아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예 자신의 전신을 용암으로 만들어 그것을 사방에 흩뿌리려 했지만, 놀랍게도 뇌룡은 쏘아진 순간 공간을 격하고 놈에게 도달해 성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 카학!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재차 강신혁의 발밑에서 용암을 터트려 반전을 꾀하려 했으나 그는 같은 기술에 두 번 당해줄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미리 준비해두고 있던 공간이동 능력을 발동, 허공으로 솟았다.
그의 두 눈에 대지에서 꾸물거리며 형태를 이루는 거대한 대검이 보였다.
어느덧 대지는 일부분이 통째로 용암지대로 화했는데, 놀랍게도 곳곳에서 땅을 뒤엎고 솟구친 용암이 한데로 모여 대검의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아예 몸통이 통째로 대검으로……?’
- 재밌는데, 이거.
그의 생각에 대꾸라도 하듯이 들려온 것은 오주영의 목소리였다.
직후 그것이 허공중의 강신혁을 노리고 일직선으로 내쏘아졌다!
분명 거기엔 엑스칼리버를 다루던 오주영의 검리(劍理)가 녹아 있었지만, 한편으론 또 분명히…….
‘신살검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기분 나쁘다고…… 했잖아 이 개새끼야!”
강신혁은 드물게도 원초적인 욕설을 내뱉으며 뇌룡을 검으로 빚어내 휘둘렀다.
어째서 자신의 기분이 이렇게도 가라앉았는가, 더럽고 짜증나는가.
부정하고 싶었던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살검무를 그 따위로......!"
강신혁의 정순한 영력을 담아낸 뇌검이, 수십 미터 높이로 치솟은 용암의 검과 맞부딪치며 굉음과 섬광을 토해냈다.
“다루지 말라고!”
극천신주에 담겨있던 기운을 모조리 끌어내 빚은 뇌검이 용암 대검의 첨단에 맞닿는 순간, 마치 뇌제 신은아가 직접 쏘아낸 벼락처럼 그것이 대검을 반으로 토막 냈다.
신은아의 마력과 강신혁의 영력을 모두 담아낸 벼락은 마물의 혼을 동력원으로 삼아 움직이던 대검을 완전한 무생물로 만들었고, 섬뜩한 괴음과 함께 그것이 박살난 순간 강신혁의 눈앞을 메시지가 가득 메웠다.
- 황룡투(SS+) 스킬의 숙련도가 대폭 올라 SS랭크로 성장합니다!
- 영력이 SS+랭크로 성장합니다. 힘이 SS+랭크로 성장합니다.
- 파이어 마스터리(SSS) 스킬의 숙련도가 S+랭크로 성장합니다!
- 영혼독(SSS) 스킬의 숙련도가 SS-랭크로 성장합니다!
- 질서에 해를 끼치는 거대한 존재의 파편을 성공적으로 소멸시켰습니다! 회원등급에 보너스! 320,000,000HP를 얻었습니다! VIP 보너스로 보상의 50%에 해당하는 HP를 추가로 얻어, 총 480,000,000HP를 얻었습니다!
격렬하고도 위대한 전투의 업적이 한순간에 사람을 성장시켜준다는 것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강신혁은 츠쿠요의 조언대로 자신이 적의 혼을 깔끔히 지워냈다고 확신하며 그녀에게 확인했다.
“이거면 어때요.”
[아주 잘하셨어요, 모루. 역시 제가 사랑하는 분이셔요.]
- 추방…… 아니, 회원님!
[그러니 이제 나머진 제게 맡겨주세요.]
"응?"
츠쿠요가 그의 어깨에서 폴짝 뛰어올라, 허공에서 깔끔한 1회전을 하며 새끼여우로부터 동양풍 미인으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용암 대검이 부서진 자리에 자그마한 게이트가 열리더니, 그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손에 들린 것을 보며 강신혁은 눈을 크게 떴으나, 다음 순간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어둡고 피비린내가 나는, 죽음으로 제사를 바치는 공간으로.
“신…… 은혁!?”
“인형사 님, 제우스 놈들이!”
“초인들이 캠프를 떠나자마자……!”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긴장이 풀린 얼굴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제야 강신혁은 자신이 어떤 게이트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국의 베이스캠프가 게이트에 통째로 집어삼켜졌음도 알았다.
츠쿠요가 만들어낸 분신은, 처음부터 강신혁을 공간이동 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를 ‘진짜’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 당신은 분명히,”
제우스의 서브 마스터 이강율의 목소리가 귓가를 두들겨, 고개를 돌려 놈을 찾았다.
놈은, 아니 놈을 비롯해 제우스 길드의 면면이 착용하고 있는 것은 파워드 슈트라고 불러도 믿을 법한 두터운 갑주였는데, 그 갑주로 부터 느껴지는 것은 명백한 마기였다.
더욱이 사방에 몸통이 반쯤 사라져 꿈틀거리는 반시체들이 널려있었는데, 대부분 마기에 침식되어 제대로 된 의식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상황은 강신혁의 막연한 상상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게이트로 끌려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2, 20분.”
그의 혼잣말에 대꾸한 것은 그의 동기인 이진석.
다행히도 유혜나와 조운형 역시 아직 무사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이 무사할 뿐, 이미 거너즈의 3분지 1에 달하는 인원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츠쿠요…….'
그녀의 기준이 자신과는 제법 달랐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에게 다른 인간의 안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강신혁의 동기인 셋에게만은 특별히 신경을 쓴 것으로 보여서, 더욱 기가 막혔다.
이번 차원 퀘스트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애 취급을 당했다.
이 끔찍한 굴욕감을, 그러나 그녀에게 따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분했다.
“이 게이트에는 제아무리 당신이라도 들어올 수 없을 줄 알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요.”
이강율보다 한층 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유준만이 입가에 시원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분께서 제압해주겠노라 약속하셨었는데, 어쩔 수 없이 저희 손으로 하는 수밖에요.”
“그분이라 이거지……. 잘 아나보네.”
“오, 만나셨습니까? 그런데 대체 어떻게 탈출하신 겁니까?”
강신혁은 그저 웃고 말았다.
강신혁과 제우스 길드의 간부가 대치하는 사이, 살아있는 용병들은 전부 그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한편 제우스 길드의 움직임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다.
가장 먼저 움직이는 사람부터 표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저, 저 자식들. 마력과 다른 기운을 다뤄.”
이진석이 저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으며 강신혁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빌어먹을, 끔찍해. 이 게이트도 이상하고, 차라리 게이트를 어떻게든 파괴하는 게 제일,”
“괜찮아.”
친구의 걱정 어린 제안을 일축하며 강신혁은 품에서 포이보스를 꺼내 쥐었다.
그가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제우스 길드 역시 움직였지만.
빛으로 물든 탄환이 발사된 순간 상황이 종료되었기에,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