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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화. < Chapter 47. 비와 여우 - 3 >

프린세스 올리비아, 올리비아 시어도라 알렉시스는 자신의 지옥문 입구에 섰음을 인정했다.

‘아버지, 못난 딸을 용서하소서.’

무리인 줄을 알면서도 탐색을 강행했다.

이번 원정을 통해 초인사회에 두각을 드러내, 차후 지브롤터 수복 작전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최대한 많은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공동의 목표를 두고 그녀는 원수 같던 오빠와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다.

하지만 지금 보면…… 아마도 그는 처음부터 발을 뺄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리라.

‘게이트가 터지는 순간, 핵심전력만을 추려 도망쳤어. 그만한 단위의 공간이동을 가능케 하는 아티팩트를 어디서…… 아니, 이런 생각을 해도 소용없지.’

그를 단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자신은 아마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혼자만이라면 탈출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핵심 전력을 다 버려두고 홀로 살아나봤자, 불명예스럽게 도주해 살아난 왕족으로 낙인 찍혀 계승권 다툼에서 물려날 터.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나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 것이 나았다.

“----합!"

그리 생각하며 담담히 죽음을 각오한 그때,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힌 거창이 몬스터 무리를 찢어발겼다.

사방에 흩뿌려지는 검은 가시가 주위 몬스터들을 흩어놓는 것을 보고, 올리비아는 몸을 작게 떨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구원에 당황스러울 만도 한데, 어딘가 자연스럽게 납득이 갔다.

‘역시 엘레노어였구나.’

전신을 검은 코트로 감싼 데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어 확신하지 못했지만, 유난히 굽이 높은 부츠며 창을 다루는 솜씨를 보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렇게 필사적으로 그녀를 구하러 달려오는 것을 보며 확신했다.

어째서 인형사와 함께 움직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분명 자신의 막냇동생 엘레노어 로잘린 레드레이크였다.

‘바보 같은 것.’

자신을 나라에서 직접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는 언니를 구하러 오다니, 저런 무른 성격이 녀석의 목을 조일 것이다.

아니, 그럴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자신과 함께 죽게 될 것인가.

“죽을 자리를 찾은 나나 그곳으로 굳이 기어들어온 너나 참 닮은꼴이구나.”

올리비아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엘레노어의 활약에 정신이 팔린 가신들은 그녀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춘 그녀라고 해도 이들을 구원할 수는 없을 터.

대역류는 이제 막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에 SS랭크 이상의 몬스터가 넘쳐나고 있었고, 땅이 붉게 물든 순간 초인 전력의 절반 이상이 마나 밀도를 이겨내지 못해 쓰러지고 말았다.

“테일러, 괜찮나요?”

“물론입니다, 전하. 하지만 이대로는……."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세계랭킹 11위의 보이드 테일러가 끝까지 자신의 곁에 남았다는 것이지만, 그건 그의 약혼녀가 올리비아의 세력에 속해있는 탓에 어물쩍대는 틈에 도망칠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의 힘만으로는 이 사태를 타개할 수 없다. 그의 능력은 SS랭크의 몬스터를 막아내는 데에는 지극히 유효했지만 그 이상의 몬스터의 공격에는 회복할 수 없는 데미지를 받는다.

지옥으로 향하는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 캬오오오오오오!

- 구아아아아아!

올리비아의 동생이 이끄는 공중 몬스터들이 일대를 폭격하며 간신히 그들이 숨을 쉴 틈을 내어주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지팡이를 휘둘러 마법술식을 짜내며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떨어트리지 마라! 우리는 위대한 대영제국의 가디언이다! 몬스터들에게 맞서! 물러서지 마라!”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은 대영제국을 대표하는 공주다.

끝까지 고고하고 우아한 모습을 유지하리라!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붉게 물든 땅에서, 몬스터와 초인의 피를 받아먹고 태어난 악마들이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 캬하하하하하, 고귀한 핏줄이 한낱 장기판의 말로 희생당하다니 우스운 일이구나!

- 착각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절망도 깊은 법. 오늘 하루 가지고 놀기에는 적당하겠어!

- 그 분께서 오시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즐기려면 서둘러야 해!

악마들은 모든 면에서 초인들보다 우월했다.

그들을 막기 위해 나선 보이드 테일러는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가 발동한 보호막이 아직 자신을 뒤덮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나마 죽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전투를 속행할 수는 없을 터였다.

“뇌제, 뇌제가 왔습니다, 전하!”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악마들에게 완전히 쓸려나가기 직전 기적적으로 등장한 뇌제의 마법으로 마나의 흐름이 놀라우리만치 완화되었지만, 그녀라고 해도 이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릴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뇌제는 대역류가 이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자신의 능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즉 이미 발생한 몬스터 무리에 갇힌 올리비아까지 구해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이미 선택을 마쳤어. 저 여자는 우리를 희생해서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여자다!’

올리비아는 이를 득득 갈았으나 그녀에겐 뇌제를 좌지우지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대영제국의 왕위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인가!

이대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괴물 주제에 인간의 말을 내뱉는 저 놈들에게 유린되어야 한단 말인가?

“전하!"

수하 중 누군가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인형사입니다!”

인형사?

올리비아는 고개를 들었다.

사실 엘레노어가 나타난 순간, 그도 혹시 그들을 도와주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인형사라고 뭘 어쩔 것인가?

보이드 테일러보다 강한 것이야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뇌제조차 자신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에 그라고 무얼 해낼 수 있단 말인가?

- 카드드득!

그런 생각은 자신의 부하들을 한 입에 집어삼키며 그녀의 면전에 닥쳐온 악마가 반으로 갈라져 죽는 것을 보며 함께 잘려나갔다.

“도와주러 왔어요. 쯔, 포션도 없나?”

세계랭킹 11위인 보이드 테일러가 일격조차 막아내지 못하고 튕겨나간 그 괴물을 어렵지 않게 죽이고, 무섭지도 않은 것인지 몬스터들이 형성한 포위망 안으로 대뜸 들어온 남자.

인형사 신은혁은 삽시간에 사방에 보이지 않는 실을 둘러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간이 결계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것은 악마들의 힘을 얼마 버텨내지 못하고 금방 소실되겠지만, 지금은 부상자를 추스르고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그 수초간의 여유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버프를 걸어줄 테니까 거부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버, 버프? 그런 능력까지 있단 말입니까……?”

영국의 왕족이라 해도 믿을 만큼 고급스러운 영어로 의사를 전달해오는 그에게, 올리비아의 수하 중 한 명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러나 그는 대꾸해주지 않고 마스크 너머로 드러난 황금의 눈을 번쩍였다.

그 순간 자신의 내부에서 차오르는 새로운 활력을 느낀 올리비아는 경악하고 말았다.

아니, 상태가 회복된 것이 아니다. 그저 스테이터스가 벽을 뚫고 성장했을 뿐이다.

물론 일시적인 변화겠지만, 여태껏 그 어떤 보조 능력자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버프에 올리비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무슨!?”

“오케이, 포션 먹였으니까 잠시만 보호하고 있어요. 전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까 지금부터는 알아서들 살아남으시고.”

신은혁은 보이드 테일러에게 포션을 먹이고는 일으켜 다른 초인에게 맡겼다.

올리비아는 그가 돌아서며 두 개의 대낫을 휘둘러 악마들을 막아서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살 수 있어……!?’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악마들이 하나둘 남자가 휘두르는 대낫에 목이 베여 쓰러지고 있었다.

짙은 마나 밀도를 버티지 못하고 헉헉대던 그녀 휘하의 초인들도 신은혁의 버프에 힘입어 어떻게든 일어서 싸우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뇌제보다도 극적인 변화를 신은혁 한 명이 불러일으킨 것이다.

“저, 전하! 무사하십니까!?”

“전 괜찮아요. 테일러, 당신의 상태는 어떻죠?”

“놀랍게도 양호합니다. 저 자는 대체 어떤 포션을……."

“연금술사의 지원이겠죠. 유명하잖아요.”

이전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요르문간드의 테러 당시, 신은혁이 연금술사의 보조를 받아 날뛰었던 사건은 아주 유명했다.

다들 그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자를 잘 만난 운이 좋은 하이랭커 수준이라며 깔보는 시선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감히 그 누구도 그런 망발을 입에 담을 수 없으리라.

그는 연금술사의 도움 없이도 완전했으며, 연금술사는 단지 원래부터 날개를 지니고 있던 그에게 부스터를 달아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연금술사의 보조를 받지 않는 그라고 해도 데려올 가치가 충분하다는 거야.’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기이한 열기를 품고 활활 타올랐다.

문득 고개를 드니, 신은혁의 등장 이후로 더욱 기세에 물이 오른 와이번과 그 위에서 창을 휘두르고 있는 자신의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뇌리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아니, 반드시 살아나갈 수 있다.

뇌제가 대역류를 지연시키고, 그 사이 인형사가 적의 주력을 모두 때려잡는다면.

그의 지원을 받아 강해진 영국 초인들만으로 남은 적을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자리의 모든 초인이 그 얼간이의 도주를 목격했어. 이들이 모조리 살아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오빠가 설 자린 남지 않겠지.’

한 남자가 지원군으로 참전했을 뿐인데 상황이 이렇게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올리비아는 열기를 띤 눈으로 신은혁의 뒤를 쫓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곤 레드레이크 가문의 문장을 새겨 넣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힘차게 외쳤다.

"살아라! 우리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간다!”

"우오오오오오오오!"

활기를 얻은 가디언들이 그녀의 목소리에 힘차게 호응했다.

대지에서 검은 용암이 솟구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자신에게 버프를 받은 영국 초인들이 기세 좋게 내지르는 기합에 강신혁은 귀를 막고 싶어졌다.

사람들을 죽게 놔둘 수 없어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쓰지 않았던 수호황룡의 버프 능력을 구사한 것인데, 저러는 걸 보면 괜히 썼다 싶었다.

"머저리 짓으로 자국 초인들을 전부 사지로 몰아넣은 주제에 기세는 좋네."

- 저 머저리에게서 새로운 불여우의 기척을 느꼈습니다만…… 설마 주제를 안다면 감히 그런 꿈을 꾸지는 않겠죠.

[모루. 제 2진이 올 거예요. 아직 제가 나설 수 없지만, 그냥 맞서기엔 조금 힘든 적이 될 것 같네요.]

“저기 보이네요.”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용암이 솟구치고 있었다.

강신혁은 그 안에서 강대한 힘을 가진 생명이 뚜렷한 형태를 갖고 태어나려 함을 간파했다.

현계한도, 즉 SSS+랭크를 뛰어넘는 수준의 적이었다.

‘초월 포션을 마셔야 해.’

뒷일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남겨두고 싶지만, 제아무리 자신이 랭크에 비해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현계한도를 뛰어넘은 적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신은아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녀는 지금 이 일대의 모든 마력을 통제하며 대역류를 억누르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런 적이 펑펑 솟아나지 않고 있는 것이 모두 신은아의 노력 덕분이라는 얘기다.

그 말은 이번엔 초월 포션을 허공에 날리는 일이 없을 것이란 얘기다. 그는 거침없이 포션을 마셨다.

“후우.”

순식간에 모든 스테이터스가 현계한도에 이르렀다.

SSS랭크의 악마들을 처단하고, 영국 초인들을 도와주고 강화시켜주느라 소모되었던 영력과 황룡투기까지 단숨에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적을 쉬이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용암으로 빚어진 그 놈은 강신혁의 눈에 많이 익은 갑주를 두르고 있었다.

강신혁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오주영이 입고 있던 건 레플리카였구나.”

신은아의 번개에 갈라져 원형을 찾아볼 수도 없게 파괴되어, 설마 모루의 역작이 그렇게 쉽게 깨진 건가 내심 억울했는데.

지금 저놈이 입고 있는 게 진짜였던 것이다.

아니, 오주영과 결합한 놈의 육신이 통째로 가짜였던 것이겠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기분 더럽네. 왜 계속 진짜 가짜 놀이야? 결국 그때 나타났던 게 다 가짜였던 거잖아?’

봄버걸은 물론이고 오주영, 심지어 놈과 결합했던 괴인까지 전부!

이래서야 그 당시 오주영을 맞이하며 결전을 각오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 태생이 가짜인 요르문간드에겐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기만이지요.

[진짜와 완전히 똑같은 가짜라면 그것을 감히 가짜라 부를 수 없겠지만요. 모루, 눈을 똑바로 뜨세요. 요르문간드의 간부에게는 육신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아요. 부숴야 하는 건 저들의 ‘영혼’이랍니다. 모루라면 잘 할 수 있겠지요?]

츠쿠요로부터 구체적인 조언이 날아왔다.

강신혁은 황룡투기로 신체 내부를 가득 채우고, 영력으로 그 위를 두르는 갑옷을 만들어냈다.

그로잉 사이드와 폴링 사이드를 품에 집어넣고, 극천신주를 허리춤의 벨트에 끼웠다.

신살검이 있었다면 지금 그것을 들었겠지.

그 검을 빼앗긴 것이 못내 분해 견딜 수가 없다.

그 분함을 담아 두 주먹을 꽉 쥐며, 그는 괴인에게 고개를 까딱여보였다.

“덤벼라, 불효자야.”

-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모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물러설 생각은 없으신 것 같군요.

괴인은 혀를 차며 검은 용암으로 빚어진 대검을 들어올렸다.

강신혁은 놈이 들고 있는 대검에 오주영의 일부가 깃들어있음을 파악하곤,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좋은 트레이드를 했네.”

- 아버지께서도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놈이 바닥을 박차고 돌격해왔다.

거의 3미터를 넘기는 육신이지만 그 순간가속력은 음속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끔찍한 덩치와 끔찍한 속도를 모조리 파괴력으로 전환한 대검이 강신혁의 정수리를 노리고 일직선으로 휘둘러져왔다.

“하!"

강신혁은 그에 맞서 주먹을 휘둘렀다.

영력과 황룡투기.

그리고 극천신주에 담긴 뇌제 신은아의 마력으로 빚어진 번개의 방패가 솟아나 그것을 막아냈다.

- 이것은……?

“재밌지. 더 재밌어질 거야.”

강신혁의 눈이 황금으로 빛났다.

방패가 번개의 용으로 화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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