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 Chapter 47. 비와 여우 - 2 >
진동은 곧 각국의 캠프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알 수 있을 만큼 커졌다.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끔찍한 마나의 격류가, 여태껏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몬스터의 수준과는 비교되지도 않는 농밀한 마나의 파도가 수십 겹으로 겹쳐 일대로 퍼져나가고 있었으니까!
“가, 가야 돼.”
“엘리!”
정신이 나간 듯 벌떡 일어서는 엘레노어를 강신혁이 본능적으로 붙들었다.
그녀는 강신혁을 뿌리치려다가, 공중을 순찰하던 헬이 강신혁의 부름을 받고 그녀의 눈앞으로 착지하는 것을 보며 멈칫했다.
“지금 흥분해서 좋을 거 없어. 가족은 무사할 테니까 침착하고, 진정됐으면 출발해.”
그는 그 말과 함께 엘레노어의 전신에 영사를 둘러 그녀의 스테이터스를 강화시켜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살그머니 황룡투기를 밀어 넣어주며 특성 수호황룡을 발동, 아군인 그녀에게 새로운 활력을 북돋웠다.
그녀는 자신이 강화되는 것을 느꼈는지, 아니면 강신혁이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진정됐어. 고마워.”
“어……."
곧 눈을 뜬 엘레노어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그에게 입맞춤하곤 곧장 헬의 등에 올랐다.
헬도 요 며칠 엘레노어와 호흡을 오래 맞춰와서인지, 강신혁의 명령이 없더라도 그녀를 기꺼워하는 느낌이었다.
- 불여우가!?
[어머, 제법 분위기를 아는 계집이네요.]
‘진지한 때니까 둘 다 좀…….'
강신혁은 헬이 날아오르기 전 서둘러 녀석에게도 엘레노어에게 해준 것과 같은 조치를 취해주었다.
녀석은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기뻐했다.
“그럼 먼저 갈게!”
- 쿠아아아아아아아!
헬이 날아오르자 녀석의 명령을 받는 공중 몬스터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사실 강신혁도 그녀와 함께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겠지만…….
‘젠장…… 일을 벌려도 이 따위로 벌려? 잘 되든 안 되든 절반 이상은 죽어나갈 텐데!’
그러지 못했다.
보나마나 놈들의 수작은 이쪽, 그러니까 캠프를 지키고 있어야 할 용병들을 대상으로 한 것일 테니까.
‘초인들을 밀어붙이고 그 사이에 캠프 내부에서 용병들을 먹어치우려는 수작인가. 하지만 알면서도 전장으로 가지 않을 수 없어.’
가슴 아픈 말이지만 능력이 없는 용병 백 명보다 초인 한 명의 가치가 더 크다.
더구나 대역류는 번지는 성질을 띠고 있고, 근원지에서 막지 않으면 점점 확산되어 끝내 캠프까지 집어삼킬 터.
사실상 가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엔 그의 고아원 동기들이 있다!
- 뀨?
“안 돼, 오닉스. 너도 위험해져.”
오닉스가 자신이 그 아이들을 지키겠다며 기특한 발언을 했지만, 강신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누구를 희생해 누구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다. 전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설마 자신이 이런 배트맨 같은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강신혁은 진지했다.
“이, 인형사 님!”
그러는 틈에 아까 엘레노어가 작은 언니라고 칭했던, 아마도 영국 왕족일 젊은 여자가 봉두난발을 한 채 성벽에까지 도달했다.
“왕위 계승 후보인 올리비아 공주가 위험해요! 영국 왕실에서 이 은혜를 잊지 않을 테니, 부디 그녀를 구해주세요……!”
그녀는 똑바로 강신혁을 바라보며 외치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날아오르는 것은 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는지.
생각해보면 도망치는 와중에 방향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고 해도 똑바로 한국 베이스 캠프를 향해 달려오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그렇다는 건 역시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는 건데…… 이렇게 되면 정말로 영국 왕실이 ‘신은혁’에게 관심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커진다.
놀라운 것은 목숨이 오가는 경황에도 이런 계산을 해가며 움직일 정신이 있다는 것.
하지만 그녀에게는 미안하게도 강신혁은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동기들을 지키려면 욕을 먹는다 해도 내가 여기 남아야 해. 캠프를 지킬 사람도 필요하니까 마냥 부자연스럽게 보이지는…….'
[그러실 필요 없답니다, 모루.]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붉은 꼬리가 그의 사고를 순간적으로 끊어놓았다.
"응?"
[모루가 이곳에 남으면 저들의 행동을 끌어내는 것이 힘들어져요. 그러니 이렇게 하지요.]
그녀는 자신의 털을 한 가닥 뽑더니 후, 불었다.
그러자 그것이 그녀와 똑같이 생긴 새끼여우로 변하여, 까르륵 웃더니 붉은 바람으로 화하여 베이스캠프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자, 이제 이 베이스캠프는 안전해요. 더욱이 오고 싶을 때면 언제든 바로 올 수도 있죠. 안심하고 출발해도 된답니다.]
‘츠쿠요…… 고마워요.’
[저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이 삶의 보람인걸요. 후후.]
어쩌면 그녀의 차원 퀘스트는 지금 이미 시작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순간, 수 싸움에서 이기고 있는 것은 확실하게 이쪽이다!
고민을 해결한 강신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도움을 청하는 여자에게 대꾸했다.
“알았으니까 당신은 안으로 들어가서 현재 상황을 정확히 알려. 신은혁이 먼저 출발했다고도 말하고.”
“네, 네!”
그는 영국의 공주를 베이스캠프로 들여보내고 곧장, 자신이 착용중인 귀걸이에 손을 올렸다.
‘은아 선배는…… 이미 현장인가. 그렇다면 가능하겠네.’
과거 탑 랭커끼리 나누어 가졌던 통신기 겸 장거리 공간이동 능력을 갖춘 아티팩트.
상호동의하에 서로가 있는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기능이 갖추어져 있었다.
강신혁에겐 공간조율 능력이 있으니 그걸 이용해도 되지만, 자력으로 장거리 공간이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불필요하게 노출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귀걸이를 작동시켜, 신은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콰아아아아앙!
그곳은 이미 지옥의 한복판이었다.
침식된 지형이 겹치고 겹쳐 이미 대지라기보단 붉은 늪에 가까워진 바닥이 끊임없이 열기를 토해냈고.
몬스터들은 한꺼번에 많은 게이트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겹치고 뒤섞여, 보기만 해도 끔찍한 형태의 괴물이 되어 날뛰고 있었다.
- 쿠에에엑!
- 쿠욱, 크가아아…….
“저게, 뭔……."
[아아, 그리워라. 그래요. 많은 변종이 이런 곳에서 태어나곤 하죠.]
- 최악의 산실입니다. 역시 지구는 이 아프리카 대륙에 한해 다른 멸망해가는 세계와 맞먹는 수준의 침식률을 자랑하고 있었군요……!
뭣보다 끔찍한 것은 마나의 압력이 너무 짙은 나머지 일정 랭크 이하의 몬스터는 태어나자마자 곧장 죽어버리고 있었다는 점.
그렇게 죽은 몬스터는 마나의 격류의 일부분이 되어, 보다 많은 몬스터를 탄생시키고 강화시켰다.
[이래서야, 약한 인간들은 이미 다 죽었겠네요.]
"큿......."
“후배!?”
츠쿠요의 냉정한 말에 강신혁이 입술을 짓씹고 있던 그때 신은아가 그를 발견하곤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그보다 한 발 앞서 현장에 도착해 미친 듯이 날뛰는 마나를 어떻게든 길들여보려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대역류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지 않는 것도 그녀의 덕분이었다.
다만 제아무리 그녀의 마도가 위대하다고는 해도 결국은 원거리 직군인지라, 몬스터들이 폭주하는 중심으로 돌진하지는 못하고 외곽에 머무르는 실정이었다.
“캠프는 어쩌고!”
“츠쿠요의 분신이 있어. 일단은 여기부터 해결하고!”
“하지만…… 윽, 그럼 저기!”
강신혁은 신은아가 가리키는 곳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대역류의 중심에 휘말린 영국 초인들이 왕가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것이 보였다.
엘레노어를 태운 헬을 비롯한 공중 몬스터들이 연달아 대지를 내려찍으며 그들에게 접근하는 몬스터들의 숫자를 줄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희생자가 나고 있었다.
전장을 이루고 있는 몬스터의 수준이 기본적으로 너무 높았다.
최소한 SS랭크에, SSS랭크의 몬스터까지 심심치 않게 보였으니, 제아무리 강신혁의 버프를 받은 엘레노어와 헬이라도 쉽게 놈들을 쓸어버릴 수는 없을 터였다.
‘엘리가 핵심인물만 빼내서 도망칠 수는…… 역시 없겠지.’
저들이 그렇게 이성적이었으면 다른 나라보다 처지는 전력으로 이렇게 깊숙한 구역까지 탐사하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신혁은 초인 무리의 중심에서,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연히 고개를 젖히고 서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엘레노어가 큰 오빠라고 했던 다른 왕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초인들의 지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왕족이 맞을 터였다.
“대열을 흐트리지 마라! 지원군이 올 때까지 조금만 버티면 된다!”
“예, 전하!”
“전하를 보호해라!”
귀족적인 금발, 차분한 분위기의 녹안.
엘레노어의 말마따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그녀와 무척 닮았는데, 키는 엘레노어보다 20센티미터 가까이 커보였다.
‘이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이거지. 능력도 없으면서…….'
- 벌벌 떨고 있는 것보다는 부하들의 사기에 도움이 되겠지요. 물론 저들의 사기가 높아져봤자 상황이 그리 달라지지는 않겠습니다만.
츠쿠요에게 옮은 것인지 관리자도 시니컬한 말투였다.
관리자의 말마따나 조금만 더 있으면 아무리 엘리가 이끄는 공중 몬스터들이 분투해도 소용없이 저들의 대열이 무너지고 말리라.
[죄송해요, 모루. 저는 아직 나설 수 없답니다.]
‘알고 있어요, 괜찮아.’
지금 이 끔찍한 상황조차 아직 최악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르문간드의 지휘부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아직은 강신혁을 비롯한 인간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얘기다……!
“하아아압!”
강신혁은 그로잉 사이드와 폴링 사이드를 꺼내 한 손에 하나씩 쥐고는, 잔뜩 기합을 넣으며 돌진했다.
전신에 황룡투기를 두르고 돌진하는 강신혁의 기세는 마치 탱크와도 같았다.
사방에서 몬스터의 독이 섞인 체액과 날카로운 발톱, 짓누르는 살점, 불꽃과 번개가 날아들었지만 모두 황룡투기의 방어막 앞에 가로 막혔다
수호황룡은 지키는 힘이며 그것은 자기자신을 대상으로 할 때 가장 견고하다.
황룡투기를 성장시켜 특성의 힘을 한계까지 발휘할 수 있게 된 지금, 강력한 신체 특성을 지닌 랭커들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근접 돌파력을 강신혁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 캬아아아악!
- 키이잇!
그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이 사방을 휘젓는 대낫에 의해 갈가리 찢기고 분쇄되었다.
무기 자체의 등급만으로도 SS랭크, SS+랭크에 달하는 두 대 낫은 수호황룡 특성으로 인해 한 번 강화되고, 소울 컬렉터에서 뻗어 나온 영사로 다시 한 번 강화되어 가히 현계한도에 이르는 수준의 내구도와 절삭력을 자랑했다.
대낫의 날을 타고 흐르는 영력은 혼을 녹이는 독이 되어, 몬스터의 방어력을 무자비하게 꿰뚫고 놈들의 본질에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더욱이 여기에.
“오닉스!”
- 뀨!
오닉스가 두 대 낫과 ‘동화’하며 여태껏 녀석이 먹어온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금속의 힘을 부여했다.
오닉스의 금마력은 금속의 성질을 띠는 마력.
금속을 강화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능력인데, 이것이 녀석의 동화 능력과 맞물려 그의 무기의 능력을 전반적으로 진화시키고 있었다!
- 크하, 우리가 기다리던 인간인가……!
그때 불쑥, 붉은 늪의 밑바닥으로부터 거대한 몬스터가 솟아올랐다.
황동색의 근육질 육체, 유황의 숨결, 구부러진 염소의 뿔까지 놈을 이루는 모든 것이 악마를 상징하고 있었다.
놈이 솟아나는 순간 일대의 몬스터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 어쩌면 놈들의 마력을 빨아먹고서야 비로소 나타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 본진에서 왔군요. 크림슨 솔져, 평균 SSS랭크의 병사입니다. 몸통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아티팩트의 성질을 띠고 있어 돌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머, 벌써 이런 것들까지 지구에.]
놈을 본 관리자와 츠쿠요가 동시에 반응했다.
다만 말하는 투로 보아 이 정도 녀석은 요르문간드의 본진에는 많은 모양이었다.
- 우습구나, 인간.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심정은…… 하!
강신혁이 내던진 폴링 사이드를 놈이 팔뚝을 들어 가볍게 받아냈다. 경악스러운 방어력이었다.
그와 동시에 반대쪽 손을 뻗어 내질러오는 일권에 뭉친 검은 빛의 마력!
강신혁은 그것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며 이번엔 그로잉 사이드를 던졌다.
- 똑같은 수, 카학!?
놈의 주먹에 뭉친 마력이 강신혁의 황룡투기와 맞닿기 직전, 공간조율로 인해 공간을 격하고 날아든 그로잉 사이드가 놈의 안면에 박혔다.
SS랭크 이하의 공격력은 모조리 튕겨내는 황동 피부를 단숨에 꿰뚫고 들어간 그로잉 사이드는 영혼독을 퍼트리는 동시에 그 안에서 ‘증폭’하고 ‘분열’해, 한순간에 놈의 머리통을 터트렸다.
- 질서에 해를 끼치는 존재를 제압했습니다! 회원등급에 보너스! 25,000,000HP를 얻었습니다! VIP 보너스로 보상의 50%에 해당하는 HP를 추가로 얻어, 총 37,500,000HP를 얻었습니다!
적의 능력을 파악할 겸 폴링 사이드를 던졌을 땐 그 방어력과 마력에 식겁했지만, 간단한 페이크도 간파하지 못하고 걸려드는 것을 보면 지능이 그리 높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강신혁이 구사한 공간조율이 흔적을 읽어내기도 힘들 만큼 고위의 기술이었든가.
“이 정도는 이제 초월 포션 없이도 상대할 만하네.”
강신혁은 놈의 머리통에서 피어나듯이 사방으로 퍼지는 초승달 형태의 칼날들을 모조리 대낫으로 수렴시키며 중얼거렸다.
[훌륭해요, 모루.]
츠쿠요가 앙증맞은 두 발을 들어 박수를 쳤다.
그리곤 그 발을 들어 전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저들은 그렇지 못하니, 구하고 싶다면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네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 영국의 공주를 지키고 있던 초인 몇 명의 몸통을 반으로 찢어 가르고 있는 크림슨 솔져의 모습이 보였다.
족히 열 마리 이상은 되어 보이는 놈들의 모습에, 강신혁은 재차 이를 악물고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