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 Chapter 47. 비와 여우 - 1 >
게이트가 연결되었다는 것은, 언제든 요르문간드의 ‘진정한’ 병력이 지구를 강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나마 다행한 점은 그 게이트가 아프리카 대륙 안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사실.
강신혁은 요르문간드의 게이트가 지구와 연결되는 것과 신은아의 헤어핀이 진동하는 것에 어떤 연결점이 있나 묻고 싶었지만, 신은아는 알아서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한테 위험할 정도라면, 확실히.”
“으음, 마음 같아선 지금 바로 대대적인 탐색을 진행하고 싶지만…… 게이트 밖에서 거대한 힘을 행사했다간 오히려 이 세상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 같네요.”
츠쿠요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생긋 웃으며 강신혁에게 다가왔다.
“게이트가 열리면 그때는 알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모루의 어깨를 빌리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어깨를 빌려?”
“후우.”
츠쿠요가 가볍게 숨을 불어낸 순간,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작은 강아지처럼 보이는 것이 튀어 올라 그의 어깨에 안착했다.
아니, 잘 보면 그것은 새끼여우였다.
설마 정말로 여우였다니!
이게 변신인 건지, 아니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건지 묻고 싶어 입술을 달싹이고 있자니 츠쿠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계속 영력을 두르고 있는 것도 귀찮은 일이랍니다. 바로 퀘스트를 해결할 수 없다면 중요한 순간이 올 때까지는 이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게 좋겠어요.]
동물의 입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나오니 움찔했지만 아마 이 목소리 역시 그녀가 원하지 않는 대상에게는 들리지 않을 터였다.
“그렇구나.”
“으으으으.......”
츠쿠요가 물러나는 바람에 뻘쭘해진 신은아는 이를 득득 갈았지만 애써 냉정을 되찾았다.
이 중차대한 시점에 아군과, 그것도 압도적인 힘을 가진 아군과 싸워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분을 미처 참지 못하고 끝내 한 소리 내뱉었다.
“당신이라고 다를 것 같아?”
저게 대체 무슨 소린가, 강신혁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새끼여우가 강신혁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대꾸했다.
[이래서 당신이 꼬맹이라는 거예요.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인 것을.]
“뭐……?”
[후후, 더 듣고 싶나요?]
"......."
신은아의 귀가 솔깃하는 것이 보였다.
강신혁은 직감적으로 불온한 기운을 감지하고 새끼여우의 입을 막았다.
“이상한 말 하지 마요.”
[우우움, 우으아아.]
츠쿠요는 단지 강신혁과 맞닿는 것만으로 좋은 모양이었다.
그의 방해에 가로막혀 뒷말을 잇지 못하는 츠쿠요를 본 신은아가 강신혁에게 성큼 한 발 다가왔다.
“후배, 나 그 여우랑 잠깐.”
“안 돼.”
"우......."
“그보다 차원 퀘스트에 집중하자. 아마도…… 제우스 길드랑, 요르문간드의 간부가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응."
차원 퀘스트라는 말에 딱딱하게 굳는 신은아.
츠쿠요는 그쯤에서 강신혁의 손을 벗어나 입을 열었다.
[둘 다 너무 긴장할 것 없어요. 그를 상대하는 건 제가 할 일이니까. 차원 퀘스트라는 건 그런 거예요. 그 세상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일이기에 조력자를 부르는 거랍니다.]
강신혁 본인도 지난 1년간 굉장히 많이 강해졌고, 신은아의 능력이라면 새삼스레 입 아프게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 둘의 힘을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는 츠쿠요는 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그는 무척이나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신은아 역시 그와 마찬가지 심정으로…… 아니, 그냥 츠쿠요에게 시비를 걸고 싶은 것으로 보였지만, 어떻게든 참아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는 한적한 곳에서 저와 다과라도 들어요, 모루.]
“아니, 그건 안 되지.”
“다과? ……할머니도 아니고.”
[뭐라고요!?]
- 불여우…… 번개여우한테 5 HP 보너스!
“마음에 든 거면 점수를 좀 더 주던가.”
전날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든든한 원군과 함께, 문명을 잃은 대륙에서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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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혁이 집음기를 통해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적들이 깨달은 이상, 집음기로 수집한 정보는 모두 폐기하는 것이 옳았다.
어쩌면 이틀 후라는 정보도 처음부터 더미로 흘려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체가 들킨 오닉스를 잠복시킬 수도 없으니, 강신혁은 대신 집음기를 베이스캠프 전체에 뿌리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번에 뿌린 집음기는 파괴되는 순간 그 위치 정보를 강신혁에게 발신하는 기능이 딸려 있었는데, 파괴된다면 그곳에 영력을 감지할 수 있는 적이 있다는 얘기이니 츠쿠요를 즉각 출동시키면 해결되는 얘기였다.
[어쩜, 모루. 재주도 좋으시지.]
“츠쿠요는 그렇게 있어도 되는 거예요? 적한테 들키지 않을까?”
[적이 저를 감지한다면 들키겠지만, 그 순간 적 또한 제게 들키는 거랍니다. 그러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든든하네.”
[후후, 그렇죠? 모루에게 도움이 된다니 너무 기뻐요.]
그 후로 그는 이곳에 무슨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지 새까맣게 잊은 것처럼,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부지런히 탐색하고, 처리할 수 있는 게이트를 처리하고, 저녁이 되자 새까맣게 몰려드는 몬스터 무리를 상대로 마음껏 날뛰었다.
츠쿠요는 그러는 내내 가만히 그의 어깨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존재를 주위에서 눈치 채기까지 아주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어라, 그 새끼여우는 뭐예요?”
“길들였어요.”
“와, 완전히 테이머로 전환한 거야? 귀엽다!”
강신혁의 어깨에 올라탄 츠쿠요를 발견한 이들의 반응은 대부분 브리짓 폴센과 비슷했다.
다만 그가 앞서 길들인 헬 스파이크 와이번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하는지 다들 알고 있었으므로, 이 여우도 평범한 여우는 아니리라 생각했다.
“혹시 불 같은 거 뿜어요?”
“탐색이나 제대로 해요.”
“혹시 변신 같은 것도 해요? 아야!”
“일이나 하라고.”
브리짓 폴센의 쓸데없이 날카로운 질문에 강신혁은 그녀의 머리를 두들기는 것으로 대꾸했다.
살짝 마이너스 방향으로 기울기는 했지만 불과 며칠 만에 이렇게 친해진 것이니 브리짓 폴센의 친화력은 가히 가공하다 할 만 했다.
강신혁뿐만이 아니다. 한국 초인들 내부에서 브리짓 폴센은 완전히 아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번 원정에 앞서 드물게도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달려온 그녀는 상당히 열심히 싸웠고, 지닌바 능력만큼 활약했다.
신은아조차 그녀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 저 잘했죠? 잘했으니까 손 한 번만 잡으면 안 될까?”
“흥."
“아, 그거 알아! 촌데레라고 하는 거죠?”
“아니.”
“아, 이 싸늘한 대꾸가 정말 참을 수가…… 아야!”
수십 년 인생에서 클레어와 강신혁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친인이 없던 신은아를 상대로 저만한 반응이나마 이끌어내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정말로 둘이 사귀기라도 하면 강신혁도 조금 기분이 복잡하겠지만, 둘이 좋은 친구가 되는 것까지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오늘 EU에서 SS+급 게이트를 토벌했다고?”
“침식형이었다지. 게이트의 핵심을 부숴도 어차피 주위 환경 탓에 별 성과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영국은 오늘도 말아먹었다는 모양인데.”
“그놈의 브렉시트……."
“야야, 영국 들으면 울겠다.”
한편 헬과 함께 공중전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엘레노어는 잘 하다가도 주위에서 영국 얘기가 들려올 때마다 움찔거렸다.
이전 한 번 영국 진영을 살핀 후로는 일부러라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 같았는데, 강신혁은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충분히 이해했다.
“R, 우리 얘기 좀 할까?”
“응!? 으, 응!”
본래라면 제우스 길드가 일을 저지르기로 예정되어 있던 바로 그 날 저녁.
강신혁은 엘레노어를 성벽 위로 불러냈다.
“경계임무, 맡은 고야?”
“내가 신청했어. 요 며칠간 활약하니까 이 정도 월권은 용납되더라고.”
첫날만 해도 무지막지하게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대지에 피가 마를 때가 없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고 흙바닥이 드러나 있는 것이 섬뜩하게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이젠 저녁에 성벽을 지키는 인원을 최소로 줄이고, 나머지는 대륙 탐색에 매진하고 있었다.
강신혁이 성벽에 걸터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자 엘레노어는 가면 아래로 희미한 미소를 띠며 다가와 앉았다.
그것을 본 츠쿠요가 우습다는 듯이 가르릉거렸지만 엘레노어는 그녀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시야가 깨끗하네.”
“이제 이 근방의 몬스터는 모조리 정리됐으니까.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어때?”
“아직 멀어쏘. 조금만 넘어가면 몬스터로 새카매.”
“그렇겠지……."
지금까지 인류가 대륙을 개척한 영역은 불과 전방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경쟁에 불이 붙어 저마다 무리해가며 탐색을 진행하고, 게이트 및 필드의 몬스터를 쉼 없이 공략하고 있음에도 간신히 그 정도.
더구나 아직은 나타나는 몬스터의 수준도 SS랭크, 가끔가다 SS+랭크가 나타나는 정도로, 아프리카 대륙이 품고 있는 끔찍한 마나 밀도를 고려하면 이 정도는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국가가 이 사실을 알고 있거나, 대충이나마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애써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아 선배는 아프리카 본토 공략보다는 절대적인 몬스터의 숫자를 줄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나도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
“영국은 생각이 다른가보네.”
침묵하는 엘레노어를 보며 강신혁이 툭 내뱉자, 그녀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브롤터라는 아픈 손가락이 있으니까…… 다들 필사적이야. 무리하고 이쏘.”
“혹시 이번 원정에 가족이…… 그러니까, 왕족도 참여해?”
“웅."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명 더 있지만 큰 언니랑 큰 오빠가 대표. 둘 다 하이랭커야.”
“나이는?”
“큰 오빠는 30대, 큰 언니는 20대 후반.”
“과연.”
“영국인 출신으로 가장 랭킹이 높은 사람은 현 세계랭킹 11위의 보이드 테일러. 그 능력 덕에 방계 왕족과 결혼해서 왕가의 사람으로 삼기로 했어. 이번 원정에도 참여했고.”
강신혁은 왕가의 사정이 줄줄 흘러나오자 한숨을 내쉬었다.
보이드 테일러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다. 저번 탑 랭커 선정 당시 이름이 짤막하게 나왔었는데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너무 약한데다 나이도 많아 잠재력이 낮게 평가되었고, 금세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큰 언니 약혼자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큰 언니는 눈이 높아. 큰 오빠와 왕위를 두고 경쟁 중이라 아무 남자나 만날 수 없어. 그리고 보이드 테일러는 나이가 너무 많아.”
하긴 랭킹이 아무리 높아도 중늙은이와 결혼하긴 싫겠지.
하지만 강신혁은 그런 이유로 남자를 안 만나는 여자가 노처녀로 늙어죽는 모습을 제법 보았기 때문에 그녀가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후, 너도 후보야.”
그런 강신혁에게 남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엘레노어.
강신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나? 무슨 후보?”
“큰 언니 약혼자 후보.”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츠쿠요 역시 부드러워 보이는 여우꼬리를 살랑이며 그 얘기에 흥미를 표했다.
“나이도 어린데 탑 랭커. 뭣보다 지금 큰 언니와 나이대가 비슷한 서양 여성과 사귀고 있잖아.”
“단순히 몇 가지 조건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클레어를 그 여자랑 비교하는 거야? 좀 불쾌한데."
“내가 아니라, 왕가에소.”
입술을 삐죽이며 덧붙인 그녀가 추가설명을 했다.
“강한 초인을 왕가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영국 입장에선, 가장 탐나는 인재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전형적인 케이스네……."
“그래서 조만간.”
엘레노어가 망설이며 말했다.
“그쪽에서 접촉해올지도 몰라.”
“정체를 감추고 활동하는데 무슨 수로? 아…… 여기에 있을 때?”
"응."
고개를 끄덕이며 더더욱 긴장하는 엘레노어.
하지만 강신혁은 어리둥절했다.
분명 영국을 걱정하는 엘레노어에게 상담을 해주려고 자리를 마련한 건데, 어째서 영국 왕실이 강신혁을 사위 삼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로 넘어온 거지?
“어차피 응할 생각도 없지만.”
“정말? 언니, 예쁜데. 나랑 닮았어.”
“클레어가 더 예뻐.”
"......."
엘레노어는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방금은 강신혁도 잘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한 엘레노어에게도 책임이 상당하다고 보았다.
“엘리도 예뻐. 올해 미스 신영은 무조건이다, 무조건.”
“늦었어.”
그녀는 말과는 달리 제법 기분이 괜찮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성벽 밖에서 누군가가 기승용 마도구를 타고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고귀한 품격마저 느껴지는 찬란한 금발을 휘날리는 여성.
무척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굉장히 아름답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엘레노어가 어, 소리를 냈다.
“작은 언니……?”
“뭐야, 설마 정말로 나한테 접촉……."
쿠우우우웅.
둔중한 진동이 울려 퍼져 강신혁의 입을 다물게 했다.
[시작됐네요.]
여태껏 얌전히 있던 츠쿠요가 그의 어깨에서 몸을 쭉 펴며 중얼거렸다.
“지, 지원을! 대역류입니다! 곧 밀려올 거예요! 왕족이, 왕족이 한복판에!”
작은 언니라는 사람의 고함소리를 듣고 엘레노어가 벌떡 일어섰다.
강신혁 역시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아프리카의 진정한 시련이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