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 Chapter 46. 아프리카 개척 - 6 >
달도 별도 비치지 않는 칠흑 같은 밤하늘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요염하고 새카만 머리카락은 비녀로 묶어 단정하게 빗어 내렸으며.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검은 두 눈은 마주하는 모든 이를 끌어당겨 가둘 것처럼 요요했다.
흠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는 검은 머릿결과 선명하게 대비되어 눈을 부시게 했고.
연지 하나 바르지 않고 새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그를 바라보며 선명한 호선을 그렸다.
평생 욕망을 멀리하고 수련해온 고승이라도 단숨에 타락시킬 수 있을 법한 풍만하고 매혹적인 육신은 얇은 비단옷 한 겹에 가두어져 있어, 별 생각이 없는 이라도 그 너머가 궁금해지게 했다.
그녀는 바로 히어로 유니버스의 VIP 회원 츠쿠요였다.
"음?"
"는?"
“으아……!”
“꺅?"
강신혁은 츠쿠요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손을 붙잡고 대쉬했다.
다른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착해 간신히 그녀의 손을 놓고는 헉헉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에, 츠쿠요는 볼을 붉히며 즐거워했다.
“어쩜 모루, 과격하기도 하셔라. 저를 그리도 만나고 싶으셨다면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될 것을.”
“다짜고짜 인간들 앞에 나타나면 어떡해요!?”
강신혁이 고함을 빽 질렀다.
불과 조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공간은 한국의 난다 긴다 하는 초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장소.
그런 곳에 아무런 기척 없이 츠쿠요와 같은 절세의 가인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캠프가 통째로 뒤집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강신혁까지 이상한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네? 어머나, 그게 걱정이셨군요. 후후, 귀여운 모루.”
그러나 츠쿠요는 그 말을 듣고는 쿡쿡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 추방하고 싶군요.
관리자의 다크 사이드로 물든 메시지를 무시하며 츠쿠요가 자신을 가리켜보였다.
“지금 전 제 모습을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들에게만 보이도록 조절하고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모루.”
“네……?”
그 말을 듣고 그녀를 살피자, 과연 짙은 마나와 함께 붉은 기가 도는 영력이 그녀의 몸을 휘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근원을 해석할 것도 없이, 저것은 츠쿠요를 외부와 격리하는 간이 결계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영력을 구사하고 있으니 최소한 영력을 모르는 인간들에게는 결코 들킬 일이 없을 터였다.
“뭐야, 그런 거였어……?”
“후후훗, 저는 모루와 밀월을 즐기는 기분이라 아주 즐거웠지만요.”
- 죽었으면…….
“즐거웠다니 그것 참 기쁘네요. 하아.”
당장 걱정했던 것이 해결되자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 찾아왔다.
“지구에 차원 퀘스트가 발생한 건가요? 당신은 그걸 해결하기 위해 찾아온 거고?”
“조만간 지구가 차원 퀘스트의 대상 구역이 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조금 우습겠지만, 대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츠쿠요는 짓궂게 말하며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강신혁을 가리켜보였다.
“다들 모루의 세상에 가보고 싶어 하고 있으니까요. 실제로 지금 게시판을 보시면……."
살짝 자유게시판을 열어보았더니 그곳엔 로키를 시작으로 몇 명인가의 회원들이 대체 누가 모루에게 선택받은 거냐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강신혁은 게시판에서 난동을 부리는 이들 중 닉네임이 낯에 익은 몇몇을 무시하려 애썼다. 일단 나중에 클레어에게는 연락을 한 번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후훗, 다들 느려요. 차원 퀘스트의 발생을 보고 움직이면 이미 늦은 것인데. 느낌으로 움직여야지요.”
마치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올해 나훈아 콘서트의 티켓을 구매하는 데 성공한 딸내미처럼 자랑스럽게 말하는 츠쿠요.
그러나 관리자는 이를 북북 갈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 권능으로 시스템에 간섭해 차원 퀘스트 메시지가 발생하기도 전에 수락해버린 겁니다. 저 불여우는 치터입니다! 아니, 비터! 비터입니다!
“히어로 유니버스에 베타테스트도 있었던가……."
“모루, 갑자기 차원 퀘스트가 발생하고 제가 찾아와 당황하셨지요. 거기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해드릴게요.”
츠쿠요는 관리자와 강신혁의 만담을 무시하고 그들이 선 공터 한편에 팔을 뻗었다.
한순간에 무척 튼튼하고 편안해 보이는 벤치가 나타났다.
인벤토리에서 불러낸 걸까, 강신혁이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그녀는 거기 끄트머리에 조신하게 앉더니 그에게 눈웃음을 치며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두드렸다.
“자, 와서 누우세요. 얘기를 들으시는 동안 귀라도 파드릴게요.”
“아니, 여자 친구…… 애인이 있어서.”
“어머나, 전에 뵈었을 때보다 한층 매력적으로 보인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하지만 딱히 엉큼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랍니다?”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없이 담담한 눈빛이지만 그 아래 소용돌이치는 욕망을 그는 선명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귀 파기를 해준다는 명목으로 그의 몸에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강신혁이 끝내 거절하고 그녀와 거리를 두고 앉자, 츠쿠요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봉사를 해드릴 수 없다니 아쉬워라……. 그렇다면 차라도 한 잔 드시겠어요?”
귀 파주기 작전에 실패한 츠쿠요는 바지런히 품에서 다과가 담긴 접시를 꺼내 내려놓고는 찻잔에 적당한 온도로 식은 차를 따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저번 것보다 한층 품질이 좋은 차를 준비해보았답니다. 분명 입에 맞을 거예요.”
“아, 네.”
강신혁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녀의 움직임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이전에 만났을 때도 분명 이런 면에 홀렸던 것 같은데, 다시 봐도 묘한 매력이 있는 움직임이었다.
“왜 그러시나요, 모루?”
“아, 아뇨. 잘 마실게요.”
-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회원님! 불여우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남자를 홀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후, 일부러 한적한 곳까지 왔는데 날파리가 시끄럽네요.”
츠쿠요가 손을 휘휘 저어 관리자의 메시지를 털어내고는 방긋 미소 지었다.
사실 지금 둘이 있는 장소도 담소를 나누기에는 그리 적절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베이스캠프 바깥으로 나와 한참을 달렸으니,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나타나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어째설까, 강신혁은 츠쿠요가 원하지 않는 한 이 일대에 들어와 그들을 방해할 몬스터는 없을 것이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아, 맛있다.”
“후후, 다행이에요. 그러면 모루, 차원 퀘스트가 발생하는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 그 정돈 관리자도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방금 발생한 차원 퀘스트는…….
츠쿠요가 크흠, 헛기침을 한 순간 관리자의 메시지가 거기에 방해받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다.
강신혁이 눈을 깜박이고 있자니 츠쿠요가 은은한 미소와 함께 설명을 개시했다.
“차원 퀘스트란 해당 차원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처음으로 생성됩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아닌, 차원 자체의 유지력에 이상이 생겼을 때 히어로 유니버스가 처음으로 개입하게 되는 거죠.”
“그럼 지금 지구에서 그만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네요.”
“다만 퀘스트 발생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관측되었을 때에 한합니다. 이번에는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이신 모루께서 직접 현장에 있었기에 위기를 빠르게 알아채고 퀘스트를 발행할 수 있었던 거죠.”
“……역시 그런가.”
어쩐지 타이밍이 공교롭다고는 생각했다.
그가 제우스 길드의 협력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순간 차원 퀘스트가 생성되었으니까.
그가 모르고 넘어갔더라면 퀘스트는 언제 발생했을까? 그리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차원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그렇게 평할 정도의 문제라는 건가요.”
“네에, 얼마든지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이 차원에 잠입한 것이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여러 사람의 이름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적어도 오주영과 봄버걸은 아니리라.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건 지구의 규모가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답니다. 수준이 지나치게 낮은 세계에는 요르문간드의 고위 간부도 잘 들어올 수 없으니까요.”
츠쿠요는 그렇게 말하곤 수줍게 웃었다.
“그래도 제가 있으니 안심하세요, 모루. 그를 쫓아내기 전까지는 제가 당신 곁에 붙어있을 테니까. 덩치가 큰 자들은 한 번씩 움직이는 데도 큰 부담이 있으니, 이번 퀘스트를 해결하고 나면 당분간은 괜찮을 거랍니다.”
- 바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 여자도 지금 추방해버리면 다시 지구로 돌아오기 힘들어지는 것이죠. 추방! 추방!
강신혁은 자신이 누군지 모를 존재에게 영력을 읽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속으로 굉장한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츠쿠요가 자신의 옆에서 은은한 웃음을 뿌리며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런 걱정을 했던 것도 부질없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역시 신살검을 빼앗겼던 그 날, 자신을 내려다보았던 이는 츠쿠요가 아닌 다른 존재였다고.
“……고마워요, 츠쿠요.”
“전 모루와 만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 이 퀘스트의 보상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랍니다. 그러니 제가 더 고마워해야지 않겠어요?”
그녀는 보는 이에게도 행복함이 전해져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빈 찻잔에 다시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어머나, 또 불청객이.”
"응?"
쾅!
츠쿠요의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하지만 츠쿠요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그것을 털어냈다.
“후배, 떨어져. 그 여자 위험해.”
“어쩜, 야만적이기도 하지.”
아니나 다를까 난데없이 나타난 신은아가 똑바로 츠쿠요를 노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달려 나갔다는 얘기에 뭔가 싶어서 와봤더니 이런 위험한 존재랑 독대하고 있었다니. 요르문간드랑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 후배, 당장 이리와!”
“괜찮아, 선배. 이 사람이 츠쿠요야.”
“뭐……?”
신은아 역시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이니 츠쿠요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을 터.
그런데 츠쿠요에 대해 알게 된 그녀는 어째선지 더더욱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강신혁은 어느덧 부채를(강신혁이 만들어준 바로 그 철선이었다.) 펼쳐 입가를 가리고 있는 츠쿠요를 돌아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이 ‘은아’예요, 츠쿠요. 같은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
“그 정돈 보자마자 알았답니다. 저 꼬맹이는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큭!? 꼬맹이?”
“그러믄요. 나이를 무기로 늘 모루를 귀찮게 했던 파렴치한 꼬맹이. 어려서부터 모루를 독점하려고 했던 앙큼한 계집…… 그 머리장식, 예뻐 보이네요.”
“내 거야.”
신은아는 츠쿠요가 빼앗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자신의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헤어핀을 한손으로 덮어 가렸다.
노란 보석의 파편이 박힌, 전생에 남긴 두 유작 중 하나.
츠쿠요는 그런 신은아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고는 강신혁에게 물었다.
“설마 지금 교제중이시라는 여성이 저 아이는……."
“아니.”
“다행이네요. 그렇다면 아마도 바텐더라는 별명을 지닌 그 아이겠지요? 지금도 게시판에서 애써 침착한 척 견제구를 날리는 게 귀엽네요.”
신은아가 그렇게나 듣지 않으려고 했던 진실을 서슴없이 까발리며 고소하는 츠쿠요!
고스란히 그것을 듣게 된 신은아는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고, 눈가에 찔끔 눈물이 맺힌 채 츠쿠요를 쏘아보고 있었다.
“후배, 잠깐 자리 비워줘.”
“아니, 절대 안 돼.”
“후배!”
“어머, 저는 사양하지 않는답니다. 지금 이 귀찮은 계집을 치워놓으면 모루와 좀 더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요?”
두 여자 사이에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어갔다.
어째서 지구에 존망의 위기가 닥쳐온 지금, 쓸데없이 아군끼리 부딪치며 힘을 빼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강신혁이 좀 더 큰 소리를 내서라도 둘을 진정시켜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정말로 오랜만에, 신은아의 헤어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응......?"
“어머나……."
츠쿠요가 만들어낸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요르문간드의 게이트가 연결된 모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