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 Chapter 44. 원정 준비 - 3 >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 리스본은 숫제 세계초인회의라도 열린 듯했다.
어지간한 하이랭커 및 초인사회 관계자들은 모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1위부터 7위까지 다 왔다고?”
“레드 슈즈, 그 여자가 한국에 붙었다고 들었는데. 그 거짓말 사실이냐?”
“아프리카 정벌이라니, 과거 세우타에서 하이랭커 3천 명을 묻고 속수무책으로 물러났던 인류가?”
“하지만 당대 탑 랭커는 진짜 최강이니까......."
“인류가 뜻을 모아 아프리카를 정벌하다니, 가슴이 웅장해지는 광경이야.”
“신검이 살아있었더라면.”
“쯧, 꼭 이렇게 재수 없는 소리로 초를 치는 새끼들이 있다니까.”
초인사회에서는 이번 원정을 반쯤 축제 취급하고 있었다.
과거 인류는 대륙 하나를 통째로 포기하고 물러난다는 뼈아픈 상실을 겪었고, 그 일로 실추된 의지와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많은 세월을 날려야 했다.
그리고 이번 원정은 말하자면, ‘재활’을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그 산을 넘어선 후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장담은 할 수 없지만.
- 헤일로 님의 귓속말 : 영감, 오늘이지? 차분히 잘 하고 오시게. 어떤 세상이든 요르문간드와의 투쟁에서 서식지 절반을 빼앗기는 정도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야.
- 그거 응원이에요, 저주에요? 그리고 서식지라고 하지 마요.
- 헤일로 님의 귓속말 : 허허, 내가 실수했구만.
시기적절하게 날아든 헤일로의 질문에 자신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답변을 하고, 강신혁은 그래도 아직은 자신이 어리구나, 생각하며 웃었다.
“후배? 왜 웃어?”
“아, 보였어?”
분명 지금 그는 가면을 쓰고 있을 텐데.
당황하며 이리저리 가면 위를 더듬는 강신혁을 보고 신은아는 고개를 젓곤 말했다.
“가면 밑에서 미세하게 근육이 움직이는 게 보였어.”
"어...... 응."
역시 한계를 헤아릴 수 없는 여자다.
사실 그리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다.
“은혁."
“R, 왜?”
반대편에서 엘레노어가 부르는 목소리에 강신혁이 반말로 대꾸했다.
지금 그들은 둘 다 가면을 쓰고 있고, 서로의 나이를 드러내는 것도 금기였기에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반말을 쓰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선지 엘레노어는 그의 부름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역시 불편해?”
“아니.”
즉답하고 나서야 대답이 너무 빨랐음을 깨달은 건지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덧붙였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을 뿐이야.”
“그럼 다행이고. 그래서 왜?”
“어째서 리스본이야?”
그녀의 질문에, 초인 현대사 공부를 집중해서 하지 않았으면 그런 질문이 튀어나올 수도 있겠구나, 강신혁은 생각했다.
“아프리카 대륙으로 통하는 무수한 길이 있는데 어째서 굳이 리스본에서 출발하느냐는 말이지?”
“응. 리스본은, 그러니까…… 인도 항로의 시작이었잖아? 이 역사적인 날에 유럽이 전 세계를 비꼬려는 게 아니라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그 외의 길이 전부 막혔기 때문입니다, 레이디.”
강신혁이 답해주려던 찰나 유창한 미국식 영어로 대신 답변을 해주는 이가 있었다.
그들이 돌아보니 미국을 대표하는 탑 랭커, 세계 2위의 ‘스톤 그라운드’ 닉 할랜드가 그곳에 서 있었다.
“스톤 그라운드?”
“오랜만이다, 뇌제. 그리고 인형사…… 연금술사는 잘 지내나?”
“그렇게 노려보지 마. 누가 보면 내가 그녀를 협박이라도 해서 잡아두는 줄 알겠어.”
“칫……."
자국의 초인을 한국에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스톤 그라운드는 강신혁에게 반쯤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강신혁이 침착하게 대꾸하자, 그는 혀를 차더니 엘레노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부터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레이디. 마스크드 바커스의 활동은 워낙 인상적이었거든요. 혹시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 으, R이라고……."
언제나 초연한 엘레노어이지만 세계 랭킹 2위가 이렇게 들이대는 데에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본명을 감추는 것을 잊지 않으니, 실로 훌륭한 마스크드 바커스 일원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R, 필시 본명도 무척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내 팀원 빼가려고 하지 마.”
“흥, 난 네가 아냐. 단지 차기 탑 랭커 후보에게 얼굴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지.”
그는 강신혁에게 으르렁거리더니 표정을 싹 바꾸어 엘레노어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아까 했던 설명을 이었다.
“어째서 길이 다 막혔다고 하는지 궁금하시죠?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프리카와의 접경에 있는 다른 모든 구역은 지금도 매일같이 몰려드는 몬스터를 막기에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곳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우리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길을 택하기로 한 것이죠.”
“덤으로 다른 해로는 전부 막혔어. 침식형 게이트가 집중됐거든.”
“아……."
스톤 그라운드는 자신의 설명을 빼앗아간 강신혁을 째렸지만 그는 코웃음을 쳐주었다. 특성을 각성하기 전에는 이론 분야의 전문가였던 것이 바로 강신혁이다!
“더구나 과거 인류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퇴각할 때, 육로는 전부 봉쇄되고 간신히 도망쳐 돌아온 곳이 리스본이었거든. 그래서 그때 다짐했던 거야. 다시 아프리카로 들어갈 때는 리스본에서 출발하기로.”
“감동적이야.”
“응, 그때 하이랭커 가운데서 요르문간드로 돌아선 자들이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더욱 감동적이었겠지.”
"후......."
엘레노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이야기가 좋게 끝나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 레이디,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우리 미국은 초인의 신분이나 출생에 전혀 연연하지 않고, 오직 실력과 인성만으로 평가하고 대접합니다. 가면 뒤에 숨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저희가 모조리 해결해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꼭 기억……."
“역시 꼬시러 온 거잖아, 빨리 꺼져!”
“칫, 그럼 다음 기회에 다시.”
강신혁이 화를 벌컥 내자 옆에서 신은아까지 번개를 파지직 튀겼다.
스톤 그라운드가 혀를 차며 퇴각하는 것을 보며, 엘레노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탑 랭커가...... 왜?”
“그야 네 실력이 뛰어나니까. 여태 외부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니 다급해져서 일단 들이대고 보는 걸 거야.”
마스크드 바커스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집단 중 하나였다.
다만 그들의 대표격인 인형사와 연금술사는 이미 출신이나 소속이 분명한 것에 반해, 나머지 세 명의 신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인형사, 연금술사라면 몰라도 그들의 팀원이라면 혹시 자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스톤 그라운드를 비롯한 초인 관계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
‘다만 우린 명성은 높았어도 활동은 지역구 급이었으니까.’
서울, 끽해야 경기.
이마저도 한바탕 날뛰고 나면 곧장 증발해버리니, 접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드디어 멤버 중 한 명이, 그것도 이렇게 초인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래도 클레어 온니나 너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데……."
“이런 말하면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지만, 기준점이 너무 높은 거야. 지금도 어지간한 하이랭커 이상으로 강한 데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이상하지.”
이번 원정이 엘레노어의 기이하리만치 낮은 자기 평가를 수정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엘레노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지나치게 억압받고 살았다.
그녀가 무려 자신과 동일한 SS급 특성을 갖고서도 재능의 개화가 느렸던 것도 아마 그 탓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그때 쭈욱, 그의 옷깃이 잡아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신은아다. 한참을 엘레노어와만 대화하고 있으니, 그녀가 자신에게도 신경을 써달라고 투정부리는 것이다.
‘이래서야 정말 독립은 멀었네.’
- 여러 의미로 한숨이 나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7위의 탑 랭커, 레드 슈즈 브리짓 폴센까지 도착했다.
리스본 항구에 모인 이들은 나라별로 진영을 짰고, 그들을 나르는 대형 선박만 무려 10척이 넘었다.
그중 다섯 척은 능력이 없는 용병들의 것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저렇게 많은 용병들이 참여할 만큼 이번 원정의 성공률을 높게 보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번에도 유럽연합 애들 찡찡거리는 거 조용히 시키느라 고생했다니까요. 은아 언니, 저 아예 한국으로 귀화할까요?”
“그러지말자.”
“요즘은 한국 영화가 대박이잖아요. 귀화하면 많이 불러주겠죠?”
“그러지말자.”
“생각해보니까 진짜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한국은 동성 결혼은 금지라지만 전 평생 은아 언니만 보고 살기로 결심했거든요!”
“그러지말자.”
브리짓 폴센이 합류한 이후로 신은아는 강신혁에게 간섭할 틈이 사라졌다.
세계랭킹 7위가 아군으로 붙어준다니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녀의 노골적인 대시에 긍정적으로 응해줄 수도 없고, 신은아 입장에선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다만 저번에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워프로 사라진 이후로 그녀와 계속 서먹서먹한 상태였던 강신혁 입장에선 브리짓 폴센이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한국 초인 전력은 대단해.”
“영국이랑 비교하면 어때?”
“나빠.”
두 가면 콤비는 출발을 앞두고 속속들이 모여들어 대열을 이루는 용병과 초인들을 살피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제우스랑 싸운다고 했지.”
“아마 그렇게 될 거야. 오히려 저쪽에서 선빵을 갈겨올 수도 있으니까 대비해둬.”
“응…… 나, 영국 쪽 잠깐만 살피고 올게.”
“들키지는 말고.”
“응. 고마워.”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떠났다.
신은아는 당분간 브리짓 폴센에게 붙들려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강신혁이 거너즈 쪽에 있을 친구들의 모습이라도 보러 갈까 생각하던 중에.
“만나서 반갑습니다, 신은혁 씨.”
드디어 제우스에서 그를 건드리러 왔다.
“이미 강율이와는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강율이와 같이 용병 길드 제우스의 서브마스터를 맡고 있는 유준만이라고 합니다.”
그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선한 인상의 남자였다.
이강율과는 다르게 상당한 마력이 느껴졌다.
종합적으로 따져 A랭크 이상은 되는 것 같았는데, 그 외에도 조금 짜증나는 기운이 섞여있었다.
뭘까, 지금 당장은 답이 안 나올 듯했다.
강신혁은 그의 전신을 훑어보곤 고개를 까딱이며 대꾸했다.
“폰으로 연락하라고 할 땐 가만히 있더니.”
“하하, 강율이는 이미 제가 많이 혼냈습니다. 철없는 짓이었죠.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어디까지나 그놈이 알아서 나대고 알아서 짜졌다 이거지.”
“물론입니다. 저희가 세계랭킹 4위에 계신 죽음의 인형사 님의 심기를 거스를 일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정중한 척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를 툭툭 치는 뉘앙스가 있었다.
강신혁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뭔데.”
“실은 저희 마스터께서 신은혁 씨에게 큰 호감과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언제 한 번 만나 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만나봐야지.”
강신혁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미소를 띠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이쪽에서 다시 연락을 드려도……?”
“응. 근데 지금은 일단 서로 원정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어?”
“하하, 물론이지요. 다만 저희 제우스는 어디까지나 후방 담당이다 보니……."
“후방이라고 긴장을 풀었다간 한순간에 쓸릴 거야. 아프리카 우습게 보지 마.”
“허, 과연 탑 랭커답게 신중하시군요. 고언 달게 듣겠습니다. 그럼 이만……."
음, 역시 패버리고 싶은데.
강신혁은 유준만이 뒤돌아 가는 모습을 보며 눈을 지그시 가늘게 떴다.
그로부터 가늘게 뻗어난 영력의 끈이 유준만의 옷깃에 자그마한 장치를 붙여놓는 것이 보였다.
‘이번 원정에서 무조건 사고가 일어나겠죠?’
- 그간 회원님께 일어났던 일들을 되새겨볼 때, 감히 100%라고 단언합니다.
‘뭘 하려고 하든 미리 파악할 수 있겠지만……."
- 미지의 몬스터로 가득한 공간입니다. ……저들이 요르문간드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을 경계하세요.
관리자의 말에 강신혁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때 마침 모든 이의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제 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