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 Chapter 43. 그녀는 알고 있다. - 4 >
“저 새끼 좀 어떻게 해봐……."
“우리가 대신 저거 죽이면 괜찮지 않을까?”
“저거 병신인가?”
회의장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이진영도 뒤늦게 아차한 표정이었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
누구도 여태껏 공개적으로는 건드리지 않던 화제에 대담하게 돌진한 대가는 컸다.
회의장의 누구나가 죽음의 인형사든 뇌제든 둘 중 한 명이 이진영을 찢어죽이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신혁이 나중에 백인하에게 대신 따지려고 마음먹으며 입을 열려던 때, 신은아가 그의 손을 자연스럽게 놓으며 먼저 말했다.
“이 장소에서 개인적인 질문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또, 신은혁 씨는 어디까지나 절친한 후배일 뿐입니다.”
“아, 어, 네."
끝난 건가? 이대로 괜찮나? 저 새끼 목 붙어있는 거야? 등등 온갖 무례한 언사가 오갔으나 상황은 그대로 종료되었다.
신은아의 안색은 침대마냥 흔들림 없이 편안했다.
그런데 강신혁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 순간, 그녀가 재차 테이블 아래에서 그의 손을 붙잡아왔다.
강신혁이 부드럽게 손을 빼내려 했으나 그녀는 오히려 손에 깍지를 껴왔다.
그것을 대충 알아챈 회의장이 재차 얼어붙었다.
신은아는 그런 분위기를 모르는 체 시치미를 떼며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럼 회의를 계속하죠.”
회의장에 있던 누구나가 신은아의 사인을 알아차렸다.
그 후로는 무례한 질문이 나오는 일도 없이, 마치 여기 있는 누군가의 분노를 두려워하듯 실로 쾌속하게 진행되어, 원정일자와 길드당 지원 병력 선정까지 모두 정해지는 것으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 불여우의 상태가 점점 더 위험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불여우의 잘못이 큽니다만 빌미를 준 회원님의 잘못도 만만치 않다고 관리자는 어디까지나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평소엔 모루의 감성이 튀어나오지 않게끔 잘 단속하고 있는데, 어째서 신은아에게만은 조절이 되지 않는지.
그녀가 빨리 ‘할부지’를 떠나 독립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태도는 지양해야 했다.
강신혁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클레어를 위해서나 신은아를 위해서나, 더는 미적미적 늦출 수 없었다.
조금 아프겠지만, 강제로라도 ‘성장’해야 할 때가 왔다.
“은아 선배,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는데.”
회의가 끝나고, 회의장을 빠져나온 강신혁은 여전히 자신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있는 신은아에게 침착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응. 뭔데?”
“일단 손은 놓고.”
“응. 긴장하고 있었나봐.”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지만 지금은 태클을 걸면 안 된다.
신은아는 그의 손을 놓아주고는 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뭔데?”
“보는 눈이 있는 데서는 좀. 개인적인 일이라.”
“아…… 으음.”
어쩌면 그가 하려는 말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신은아는 난감한 기색으로 물러났다.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지금부터 또 스케줄이 있는데.”
“잠깐이면 돼.”
“바쁜데. 나중에 해.”
기껏 놓아준 손을 내밀어 신은아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에 땀이 난 것이 느껴졌다. 굉장히 드문 일이다.
"놔줘."
“지금 말을 해둬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이러고 있으면 진짜 치정싸움으로 보일 거야.”
그건 맞지.
그 생각에 순간 그녀의 손을 놔버렸더니, 황당하게도.
신은아는 텔레포트로 도망쳤다.
"......."
- 쫓아가시겠습니까? 공간조율로 루트를 추적하고 쫓는 것이 가능합니다.
“가면 붙잡혀줄까요? 제 생각엔 다시 도망칠 것 같은데.”
- 관리자의 생각도 같습니다.
관리자는 한숨이 묻어나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 알고 있던 것이 아닐까요.
“아니, 설마요.”
- 두 분은 모르고 계셨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사실 둘 다 초짜인지라 티가 상당히 많이 났습니다.
강신혁은 관리자가 말하는 두 분이 어느 어느 분인지도, 뭐에 초짜인지도, 무슨 티가 났다는 건지도 바로 알아들었다.
“……아니, 설마.”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건 이미 공포영화 수준이었다.
우선 강신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서 클레어에게 보고했다.
[♥클레어♥ : 미쳤어!]
[나 : 클레어가 이 자리에 있었어도 분명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은아 선배 상태가 이상했다니까. 어쩌면 오늘 제우스 길드의 끄나풀이 와서 떠들어대느라 심란해서 더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클레어♥ :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말하려고 하면 어떡해!]
[나 : 언제가 됐든 은아 선배한테는 다짜고짜였을 거야.]
[♥클레어♥ : 먼저 손을 잡지나 말든가. 손은 왜 잡아?]
[나 : 선배가 걱정돼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마님.]
[♥클레어♥ : 돌아오면 죽었어.]
[나 : 미안.]
[♥클레어♥ : 그렇다고 안 돌아오면 울 거야.]
[나 : 응, 늦지 않게 갈게.]
[♥클레어♥ : 그리고 고마워. 사랑해.]
[나 : 사랑해.]
클레어와의 메시지 교환을 마치고 고개를 드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마 방금 회의에서 있었던 일은 빠르게 퍼질 테고, 삼각관계 의혹은 의혹 따위가 아닌 사실이 되겠지. 심지어 신은아가 강신혁 앞에서 텔레포트로 도망친 것을 본 사람도 있었다.
인생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특히나 이건 어려웠다. 클레어가 소중하지만 그렇다고 신은아도 상처를 주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기에.
그나마 상처를 주지 않고 해결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지금은 한 발 나아간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힘드네.”
“그래 보이더군요.”
혼잣말에 답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사실 그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은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 저쪽까지 신경 쓰기 귀찮아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냥 갈 길 가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만.”
“강신혁 씨에게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강신혁의 움직임이 순간 멈추었다.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했지? 신은혁이 아니라 강신혁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자신이 제대로 가면을 쓰고 있는지 일단 확인한 후,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 이강율을 주시했다.
“너 지금 나 협박하냐?”
“그런 의도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
“닥쳐.”
“예."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 때 어설픈 수작을 걸어오려는 놈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지는 않았다.
소울 커넥터에서 절로 영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곳이 초인협회 한국본부라는 사실이 그를 진정시켜주었다.
“어차피 내 연락처도 알고 있을 테니까 할 말 있으면 그쪽으로 해라. ……개수작 부리면 그땐 진짜 아무도 모르게 죽여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며, 명심하겠습니다.”
이강율이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몸만 부르르 떨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는 것이, 아무래도 상정하던 것보다 그가 강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초인들은 흔히 마력으로 기세를 뿜어낸다. 자신보다 마력이 적은 상대를 위축시키고, 심하게는 몸에 마비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다만 이것은 마력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에게는 큰 효과가 없는데, 강신혁의 경우는 영력이 기반이 되다보니 영혼을 갖고 있는 상대라면 누구나가 본능적으로 움츠리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럼 꺼져.”
“실례했습니다.”
강신혁이 기세를 풀자 이강율은 잽싸게 고개를 숙여보이곤 물러갔다. 그나마 목소리를 떨지 않는 것을 보면 제법 기개가 있는 놈이었다.
- 훌륭했습니다, 회원님. 소싯적에 껌 좀 씹어본 듯한 멋진 모습에 600,000HP 보너스!
‘글쎄 왜 보너스가 들어오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껌 안 씹었거든요?’
하지만 이강율이 띠꺼운 것은 사실이었다.
죽음의 인형사 신은혁의 정체가 강신혁이라는 사실은 신은아가 직접 감추고 있다.
그런데 그걸 알아내고 접근해올 정도라면, 설마 신은아가 직접 말을 했을 리는 없을 테니 그의 신분 위조에 관계된 다른 이가 입을 열었거나 혹은 누군가가 끊임없이 그의 뒤를 밟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걸리적거리겠죠?’
- 아마도 그렇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도 저들이 함께할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관리자의 말에 강신혁은 작게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금 그 자식의 몸에다 도청기라도 붙여놨어야 하는 건데.
여태껏 그럴 일이 없었다고 해서 무구 외의 아티팩트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의 실책이었다.
강신혁은 우선 방금 이강율과 나눴던 대화를 신은아와 클레어에게 공유했다.
하는 김에 신은아에게는 뭔가 말을 더 할까 고민했지만, 나중에 얘기하자는 말로 일단 정리했다.
‘그나저나 은아 선배랑 같이 움직이려던 며칠이 붕 떴으니 어쩐다.’
저렇게 도망쳤으니 만나자고 해서 순순히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고.
아마 그녀와 다시 만나는 것은 아프리카 원정 당일날이 되어서가 아닐까, 강신혁은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렇지.
[나: 클레어,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는데.]
[♥클레어♥ : 응? 하지만 며칠간 은아랑…… 아, 그렇구나. 우리 불쌍한 은아.]
[나 : 그러면 나 혼자만.]
[♥클레어♥ : 그건 그거고 데이트는 데이트야.]
강신혁은 클레어의 솔직한 대꾸에 씩 웃고 말았다.
이강울 때문에 잡쳤던 기분이 말끔하게 복구되었다.
함께 가고 싶은 곳에 대해 얘기하니, 그녀는 그의 생각 이상으로 기뻐해주었다.
정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하며, 그는 그녀에게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
“안녕하세요!”
“우와……."
“헐!”
“오, 오빠들 나와 봐! 대박 예쁜 언니 왔어!”
“신혁이가 여자 데리고 왔다!”
강신혁이 클레어를 데리고 별빛 고아원을 방문하자 난리가 났다.
밖에서 놀고 있던 꼬맹이들이 강신혁을 보곤 달려오다가 그 옆에 하늘하늘한 흰색의 레이스 블라우스와 연분홍색의 플레어스커트를 차려입고 조신하고 단아한 컨셉…… 포즈를 취하고 있는 클레어의 모습을 보곤 깜짝 놀라 날뛰었다.
“저번에 왔던 누나다!”
“이 언니가 고아원 뚝딱뚝딱 해줬어!”
“와아아아!”
꼬맹이들이 클레어의 주위를 둘러싸곤 의식이라도 치르듯이 펄쩍펄쩍 뛰었다.
그녀는 일일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반가워해주니 고맙네, 얘들아. 오늘은 오빠랑 같이 왔어.”
“신혀기 오빠랑 친해?”
“형이랑 무슨 사이야?”
“사겨? 사겨?”
“저리 가라, 이 누나 요즘 한창 핫한 거 모르냐. 쓸데없는 스캔들 만들지 마라.”
딱히 둘의 관계를 감출 셈은 아니었다.
단지 요즘 신은혁과 사귀는 것으로 유명한 그녀가 이번엔 강신혁과 사귄다는 루머라도 돌면, 강신혁과 신은혁의 연관성을 따지려는 사람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애초에 클레어가 강신혁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시점에서 이미 상당히 수상쩍기는 했지만. 어쩌면 제우스 길드도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강신혁의 뒤를 캔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 안에 계시지?”
“응!”
“혜나 언니가 오빠 엄청 기다렸는데!”
“혜나 누나도 안에 있어!”
혜나? 다른 여자의 이름에 그를 바라보는 클레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신혁은 쓸데없는 오해가 탄생하기 전에 짧게 그녀에게 설명해주었다.
“용병으로 활동하는 애야. 걔랑 다른 남자애 두 명까지 해서 총 세 명을 은아 선배 통해서 용병 길드에 추천해준 적이 있거든.”
“아하.”
클레어는 안심했는지 그의 팔짱을 끼려다가, 그들의 대외적인 관계를 의식하고는 참았다.
“실은 그래서 온 거기도 해. 그 녀석들이 활동하고 있는 용병 길드도 상당히 유명하거든. 제우스 길드에 대해 얻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노련해, 아주 노련해.”
칭찬이겠지? 흡족한 표정을 보면 칭찬인 모양이었다.
둘은 알아서 뒤를 따라오는 꼬맹이들 여럿을 뒤에 달고 응접실로 향했다. 에스델 수녀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 사귄다더니?”
꼬맹이들을 쫓아내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에스델 수녀가 대뜸 던진 말이었다.
강신혁은 거짓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통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땐 아직이었죠.”
“그래, 그랬겠지. 어서 와요. 또 보니까 반갑네요.”
에스델 수녀가 클레어를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클레어 역시 비슷하게 웃으며 답했다.
“앞으로 자주 올게요. 제 방도 있으니까.”
“항상 청소해두고 있으니까 부담 없이 와요. 우리 아들이랑.”
“방음은 되나요?”
“그럼, 확실하지.”
“이 사람들이 진짜!”
두 여자가 교환하는 외설스러운 손동작에 강신혁이 버럭 외치자 둘이 동시에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죽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그래, 자주 볼 사이니까 죽이 맞는 건 좋은 일이지.
“오늘은 자고 갈 거냐?”
“네, 그러려고요. 이진수랑 할 얘기도 있고.”
“그럼 마침 잘 왔다. 진석이 곧 바빠진다고 했거든.”
“바빠져요?”
조금 불안한데.
강신혁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에스델 수녀 역시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곧 원정을 나간다지 뭐니. 해외는 아무래도 국내보다 위험할 것 같은데 걱정이야.”
강신혁은 씁,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여기로 만나러 올 것도 없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