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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화. < Chapter 43. 그녀는 알고 있다. - 2 >

“흥흥…… 흥……."

강신혁은 자신 옆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콧노래에 반신반의했다.

지금 그의 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은아였으니까.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응."

신은아는 어차피 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차 안을 새삼스레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긍정했다.

“후배가 내 옆에 있잖아.”

“같이 일하러 가는 건데.”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을 해, 후배.”

신은아는 잡고 있던 운전대를 놓고는 강신혁을 돌아보며 무척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과연 초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초인협회에 투신해 계속 일만 했던 한국의 자동인형다운 말이었다.

아, 지금 그들이 타고 있는 차량은 자동운전 기능이 있는 마도구였기에 그녀가 운전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특이하네. 운전은 언제 배웠어요?”

“얼마 전에.”

다시 운전대를 잡고는 시선만 힐끗, 강신혁에게 주었다.

“배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매번 워프로 이동하다 보니 이런 여유가 그리워졌거든.”

이런 여유라.

강신혁은 입 안에서만 그 말을 굴려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지금 서울 시외를 달리고 있었다.

한국에 게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한 이래, 물론 수도 서울의 도로도 굉장히 복잡해졌다.

끝끝내 제 시간에 막아내지 못한 게이트의 침식으로 인해 자연환경이 완전히 뒤바뀐 곳도 있고, 지울 수 없는 게이트의 존재로 인해 차량이 빙 둘러가야 하는 곳도 생겨났으니까.

“차 타고 돌아도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면 안 될지 몰라도, 내가 있으니까.”

“그건 그렇죠.”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정기순찰이었다.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진, 혹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게이트의 인근 지역에 이변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업무였다.

이미 변화된 환경에서는 얼마든지 몬스터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모든 감지계열 능력자를 이 감시 업무에 돌릴 수 없는 한, 정기순찰은 필수 업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그걸 세계랭킹 1위와 4위가 같이 하고 있는 건 좀 꽁튼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은아는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빴다.

그러나 반년 전부터 폭주하던 게이트 발생률이 다행히도 최근 들어 눈에 띌 만큼 줄어들기 시작했고, 뭣보다 이레귤러 게이트의 발생이 줄어들고 있어 신은아에게도 조금의 여유가 생겨났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불안한 마음이긴 한데. 그래도 당장은 인류에게 숨 돌릴 시간이 주어졌으니 다행이지. ……이때 제대로 쉬어둬야 하는데, 은아도.’

강신혁은 아예 휴가를 내고 쉬라고 권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그녀의 일중독 기질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게 만든 것인지 이런 간단한 업무라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는 운전을 하는 신은아의 옆얼굴을 살폈다.

끝없는 마력의 주인답게 그녀의 육체에는 여전히 힘이 가득했고, 피로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스크 돌이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은 매끄럽고 새하얀 피부 위로 미미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건강 그 자체지만, 그녀의 정신은 필시 바쁜 업무 속에 조금씩 마모되어갈 터였다.

“흥, 흐흥, 흐흐응.”

“……아니, 그것도 아닌가?”

정말로 즐거워하고 있는 듯한 신은아의 모습을 보며, 강신혁은 혹시 그녀가 정말로 이 업무를 좋아하는 것인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녀가 일 핑계를 대고 강신혁과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터였다.

강신혁도 곧 그것을 깨달았다. 관리자의 지적 덕분에.

- 정말이지 불여우의 증세는 나날이 심각해져만 가는군요…….

‘뭐 어때요. 매일 힘든 아이인데 제 덕분에 마음에 여유가 돌아온다면 좋은 거죠.’

- 부디 여자친구의 당부를 잊지 마시길, 회원님.

관리자가 구사한 여자친구라는 표현, 그 뒷면에 뭔가 숨어있는 느낌을 받은 강신혁이었으나 관리자를 추궁할 수도 없었기에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 순찰이 끝나면 같이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 협회 본부인데.”

“네, 신은혁으로 활동하기로 했으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강신혁은 신은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사실 신은혁의 대외활동은 본업을 따로 두고 활동하는 브리짓 폴센과 비교해도 딸리는 감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초인으로서의 대외활동도 자신의 본업에 플러스가 되는 요소로서 활용하는 느낌이 강했지만, 아무튼 그것을 위해 그녀가 시간을 내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조금 불쾌한 일이 있을 수도 있어.”

“누가 시비를 걸어온다거나? 협회 안에 절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있나요?”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상기했다시피 강신혁은 탑 랭커‘다운’ 활동을 별로 하지 않으니까.

마스크드 바커스로서 활약하고 있긴 하지만 그나마도 정말로 바쁘게 움직이는 협회 소속 초인들과는 비교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마스크드 바커스부터가 정식 활동이 아니다.

협회 내부에 ‘어째서 저 사람이 협회의 사람인가’, ‘협회 소속이라면 응당 그에 걸맞는 일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게 다 임시 신분으로 삼을 셈이었던 신은혁이라는 이름이 지나치게 커진 탓이긴 한데.’

당시엔 그저 게이트에 쉽게 들어가기 위한 신분이 필요했을 뿐인데.

배보다 배꼽이 커진지 너무 오래 되어, 처음 신은혁이란 신분증을 만들었던 이유를 떠올리니 새삼스레 경악스러웠다.

“아니, 협회 사람들은 아냐.”

슬슬 협회를 탈퇴해야 하나, 고민하던 강신혁을 신은아가 멈추었다.

“사실 탑 랭커가 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협회는 이득이야. 마스크드 바커스가 협회의 의뢰를 많이 맡아주는 것도 있고. 협회 쪽은 문제없어. 오히려 마스크드 바커스를 협회 소속 정식 팀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으니까.”

“그건 클레어가 싫어하겠는데요. 클레어는 마스크드 바커스가 어디까지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로 구성된 비밀조직으로 남기를 원하니까…… 응?”

"......."

어라, 방금 사소한 실수를 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신은아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저렇게 얼어붙은 표정을 지을 리가 없다.

물론 그 직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동체시력이 뛰어난 강신혁이 거기에 속아줄 리 없었다.

"왜 그래요, 혹시 클레어랑 싸웠어요?”

“아니. 안 싸워. 클레어랑은 계속 친해. 이제와 화낼 수도 없어.”

신은아는 툭툭 내뱉듯이 대꾸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노골적으로 삐진 티를 냈다.

클레어가 같은 짓을 했더라면 거기다 대고 뽀뽀라도 해줬을 텐데.

- 잘하셨습니다, 회원님. 그렇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자친구 어필을 하는 것이 불여우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회원님의 나이스 가드에 감탄한 관리자의 500,000HP 보너스!

‘아, 그것 때문이었구나.’

난감해져 있는 와중에 신은아가 대뜸 말했다.

“요즘 클레어한테 반말하네. ……이름도 그냥 부르고.”

“아, 그게 편하다고 해서요.”

“그런데 나한테는 여전히 존댓말하잖아.”

“그야 선배니까……."

"......."

강신혁은 세기의 기적을 목도했다.

신은아의 볼이 불만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녀를 아는 이 중 얼마나 많은 이가 이런 진귀한 광경을 보았을까?

귀엽다.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예쁘고 사랑스럽고, 솔직한 아이였다.

공기바람이 찬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눌러주고 싶은 것을 참으며 강신혁은 말했다.

“원하는 거 있으면 말로 해요.”

“내가 말로 안 해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런 말은 또 입 밖에 내는구나.”

신은아가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느낀다면 강신혁의 착각일까.

- 불여우! 불여우가! 불여우우우!

아니, 관리자의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강신혁은 한숨을 쉬고, 이것이 클레어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한참 생각해보고서, 하지만 동기화가 진행될수록 커져가는 ‘은아’에 대한 걱정과 사랑을 감추지 못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반말이면 되는 거지?”

“……흐, 히이.”

그렇게 좋은 것일까, 신은아의 입가에서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오늘 정말 드문 모습을 많이 본다고 생각하면서도 강신혁은 단호히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름으론 못 불러.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니까.”

“불러도 되는데. 클레어도 부르면서.”

“클레어는 미국인이잖아.”

“나도 그런 거 신경 안 쓰는데.”

신은아는 투정부리듯이 말하고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신은혁 나이도 공개 안 했으니까 이름으로 불러도 문제도 없고.”

“뇌제보다 어리다는 공식 발표 있었잖아.”

“아……."

어떻게든 최연소 탑 랭커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정부와 협회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겠지.

그 점을 고려하지 못한 신은아는 탄식하며 그들을 원망했다.

“게다가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다 보면 선배가 또 할부지 타령할까봐 걱정돼서 안 되겠어."

“할부지 타령, 안 하는데.”

“아직까지 헷갈리잖아.”

“안 햇갈리는데.”

“안 돼.”

신은아는 재차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렸으나, 그 뺨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불쑥, 그녀의 입에서 한 마디가 더 튀어나왔다.

“나도, 이제 아는데.”

강신혁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순찰을 하는 동안, 둘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관리자의 메시지가 그나마 그 침묵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관리자가 회원님을 위해 특별히 불여우를 사전에 알아차리고 제지할 수 있게 해주는 특강을 실시하겠습니다. 우선 제1강, 불여우의 정의에 대해서…….

아니, 역시 취소다.

@@@

순찰이 끝나고, 둘은 곧장 협회 본부로 향했다.

신은아의 곁에 가면을 쓰고 나타난 신은혁의 모습을 확인하자 본부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나 초인들은 물론이고 일이 있어 본부를 찾은 사람들도 술렁였다.

“신은혁이다.”

“그럼 이번 원정에 혹시 신은혁도?”

“이렇게 되면 랭킹 1위와 4위는 확보인가, 심지어 7위까지 온다며. 잘하면 정말 가능성이 있겠어.”

“회의에 참석할 모양인가본데.”

“정말 협회 소속이긴 한가보구만.”

원정? 가면 속 강신혁의 눈썹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원정을 어디로 나간다는 얘기지?

게다가 7위라? 레드 슈즈 브리짓 폴센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신은아가 그녀에게 직접 요청했을 가능성이 컸다.

- 왜 미리 말 안 했어?

귓속말 기능을 이용해 바로 옆에 있는 신은아에게 소리 없이 말했다.

그러자 신은아 역시 귓속말 기능으로 답해왔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내키지 않는 일이라서.

- 그러니까 더더욱 얘기해야지.

- 은아 님의 귓속말 : 아직 후배 참가가 확정된 것도 아니니까. 후배는 그냥 이번 회의에서 자기 생각대로 말해주기만 하면 돼.

- 어디 원정인지나 말해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대신 하아, 하고 옆에서 신은아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묘한 색기가 어린 그 소리에 강신혁은 정말 생뚱맞게도 얘가 벌써 이렇게 컸나, 하는 감회를 느꼈다.

- 정말로 할아버지 같으니 그만두세요, 회원님.

‘동화율이 높아질수록 본능적인 영역에서 그런 감상이 드는 걸 어떡해요. 그래도 밖으로는 티 안 내고 있으니까 괜찮잖아요.’

- 장성한 손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문제입니다. 오해받기 딱 좋은 시선이죠.

그때였다. 회의가 열리는 4층 소회의실로 가는 엘레베이터 앞에 선 둘의 근처로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 한 명이 다가온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

오늘 믿기지 않는 일을 많이 겪는구나.

설마 실제로 이런 말투를 쓰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신은아에게 정중히 인사하고는 힐끗, 강신혁에게 시선을 주었다.

강신혁은 아가씨라는 표현에 놀란 것을 들켰나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죽음의 인형사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신은혁입니다. 이름으로 불러주시죠.”

“이강율입니다. 용병 길드 제우스의 서브 마스터 겸 기획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아, 제우스.

강신혁은 남자가 내민 손을 가볍게 잡으며, 순간 신은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용병 길드 제우스는 현 용병 업계의 압도적인 탑, 1위.

바로 그녀의 부모가 세웠다는 용병 길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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