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 Chapter 43. 그녀는 알고 있다. - 1 >
“그래서 은아 선배랑 당분간 같이 움직여야 할 것 같아. 미안.”
바 프론트라인의 영업이 시작되기 10분쯤 전, 강신혁은 클레어에게 며칠간 게이트에 다녀오며 있었던 일과 더불어 신은아에게 함께 다니기로 약속했던 것들을 모두 얘기했다.
클레어는 그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나한테 미안할 짓 할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데 뭐가 미안해? 그냥 초인으로서 활동할 뿐이잖아.”
강신혁은 조금 생각하다가 답했다.
“같이 있어주지 못하니까.”
“흐응, 하지만 내가 보기엔 요즘 일부러 더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아.”
"윽."
사실이었다.
한창 연인과 달라붙어있고 싶은 때인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강신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부러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나, 벌써 싫어진 건 아니지? 그럼 운다?”
“그럴 리가. 오히려 너무……."
“너무? 너무 뭐?”
클레어는 지나치게 편안하다.
영력을 각성한 후부터 줄곧, 아니 그 이전부터 계속 현실에 쫓겨 살아오던 자신이 그녀와 함께 있으면 무더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너무나 훌륭한 파트너지만, 그래서 지나치게 그녀에게 의존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그녀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과하지 않게 조절했다.
‘하지만 그렇게 일을 만든 결과 클레어와 만나지 못하게 되어서 아쉽고 애타는 것도 나란 말이야. 이게 대체 무슨 바보짓이지?’
이것이야말로 청년이 노인의 경험을 얻어 판단했기에 생겨난 부조리한 결과였다.
강신혁은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는 웅얼거리듯이 진심을 토했다.
“너무 좋아서 바보가 될까봐 그래……."
"......."
강신혁의 말을 듣는 순간 그를 조심스레 추궁하던 클레어의 몸에 스턴이 걸리고 말았다.
그 말은 불과 얼마 전 클레어가 바의 단골손님에게 뱉었던 말과 완벽히 일치했다.
설마하니 강신혁이 그때 오갔던 대화를 알 리도 없고, 클레어는 단박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한 점은 강신혁이 고개를 테이블에 박고 있어 그녀의 표정변화를 읽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엄청 창피해졌어……."
여전히 우물거리는 투로 말하는 강신혁.
클레어는 제 뺨을 매만져 어떻게든 정상으로 보이게끔 컨디션을 조절했다.
자신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강신혁을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연상 행세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주 조금 당당해졌다.
“그래? 난 안심했는데.”
클레어는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말하며 테이블에 엎드린 강신혁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난 나만 혼자 좋아하고 애타는 줄 알았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먼저 좋아했, 는데.”
“아하하하하, 완전히 빨개졌어. 귀여워.”
수줍어하는 강신혁의 모습에 클레어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녀는 어떨 땐 의젓했다가 한순간에 또 순수한 모습을 보이는 강신혁의 이런 면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이제 곧 바를 열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울 만큼.
그래서 그만 너무 놀렸다. 강신혁이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이다.
“큭…… 내가 귀여워? 너도 귀엽게 만들어줄게.”
“꺅!"
강신혁이 복수할 겸 그녀를 끌어안고 간질이자,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에게 매달리며 오랜만에 원 없이 애교를 부렸다.
누가 보면 연금술사가 타인에게 풀어진 얼굴로 애교를 부린다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두고 그녀를 도플갱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할 점.”
“뭔데?”
그의 품에 안겨 깔깔거리던 클레어가 갑자기 정색하자 강신혁도 덩달아 긴장했다.
“은아한테 선 확실하게 지켜야 돼.”
“조금 자세히.”
“그러니까, 막 이렇게.”
클레어가 강신혁의 뺨에 쪽쪽 입맞춤을 했다.
말을 핑계로 제 욕심을 채우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봐주기로 했다.
“스킨십 너무 거침없이 하면 안 돼.”
“안 해. ……적어도 나는.”
“은아가 하는 것도 적당히 쳐내야 돼.”
그런 가슴 아픈 짓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강신혁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클레어의 시선을 못 이겨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노력해볼게.”
“응, 지금은 그거면 돼. 당장은 무리지만 언젠가는 정신적으로 독립시켜야 되니까.”
“은아 엄마가고생이 많네.”
“뭐어어어어어?”
방금 강신혁이 던진 농담은 쉽게 용납할 수 없는 말인 듯했다.
강신혁은 원할 때마다 키스하기 이용권 10장을 주고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정말…… 그런데 있잖아, 클레어.”
“왜? 이제 곧 영업시간이니까 빨리 말해.”
여태까지 쪽쪽거려놓고 이제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바텐더 무드를 잡기 시작하는 클레어를 보며 강신혁은 역시, 하고 감탄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은아 선배의 진짜 부모님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은퇴한 초인들이야. 둘 다 한국에서는 짱짱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가문의 도움을 받아 세운 초인 기업을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초인사회는 물론이고 정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어.”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네.”
클레어의 말만 들어도 벌써 부정적인 분위기가 쫙 깔렸다.
그야 그녀의 부모가 그리 좋은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은 모루로서 은아와 교류하던 그때 그 시절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초인협회에 들어간 것도 부모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건 반항이었지. 그들의 부모는 은아를 기업의 대표로 내세우려고 했거든."
"음?"
그러나 클레어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강신혁의 상상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지금 신은아가 부모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 것 정도는 강신혁도 대충 눈치 채고 있었지만, 설마 부모와 그렇게 확실하게 엇나가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기업? 무슨 기업?
“아마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영업 끝나고 남아있을 수 있지?”
“물론이지.”
클레어는 숨길 수 없는 기쁨에 강신혁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쿨한 바텐더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오랜만에 치킨이나 뜯자. 그때 얘기해줄게.”
“처음 만난 날 생각나네.”
강신혁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클레어가 가게 문 앞에 걸린 팻말을 Close에서 Open으로 바꾸고 돌아오며 말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그날 내가 했던 말이나 행동들은 다 잊어줘.”
“부끄러워?”
“응, 부끄러워. 그때 난 맘에 든 애 앞에서 허세 부리고 싶어서 쓸데없이 오버한 바보였어……."
“둘이 무슨 얘기해요? 저도 좀 듣고 싶어요!”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들어오는 단골손님 임하연을 보며 클레어는 차갑게 말했다.
“넌 술이나 마셔.”
@@@
무사히 영업이 끝났다.
임하연은 놀랍게도 가게가 오픈할 때부터 닫을 때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 사이 두 사람 진도가 얼마나 어떻게 나갔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강신혁과 둘만 남을 수 있는 시간을 1초라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클레어의 강제집행에 의해 쫓겨났다.
그러면서도 바의 영업시간만은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또 클레어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문 잠갔어?”
“응, 여긴 은아도 못 들어와.”
두 사람은 지하의 바를 닫고 2층, 클레어가 숙소로 쓰는 방으로 향했다.
저번에 한 번 왔었는데, 그때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땐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어 몰랐는데, 지금 보니 거의 36평 아파트 수준은 되어보였다.
“여기, 여기.”
“그럼 꺼낼게.”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치킨은 이미 사왔다.
강신혁이 인벤토리에서 바삭함을 잃지 않고 보관되어 있던 치킨 박스를 꺼내어놓고 있자니 클레어가 옆에서 소주병을 따는 것이 보였다.
변하지 않는 그녀의 취향에 웃음이 나왔다.
“뭘 위해 건배해?”
“날 위해서 해줘.”
“그래, 그럼 우리 낭군의 멋진 신학기를 위하여.”
“하지만 여자한테 인기는 없어도 될 것 같아.”
사실 바로 얼마 전에도 이나희와 엘레노어 덕분에 피곤하기도 했고, 클레어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어필이었으나 통하지 않았다.
“너무 잘나서 재수 없는 우리 낭군이 신학기에는 부디 남자들에게만 인기 있기를, 위하여!”
“그것도 싫은데……."
강신혁의 콜라잔과 클레어의 소주잔이 부딪혔다.
클레어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황금색 비단옷을 입은 닭다리를 강신혁의 손에 들려주고 자신은 가슴살을 집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용병 기업이야, 은아 부모라는 사람들이 만든 거.”
강신혁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클레어의 손에 들린 가슴살을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었다.
“딸을 용병으로 굴리려고 했다고? 길드도 아니고?”
바삭. 초인상가에서 제일 맛있는 닭집의 프라이드치킨 닭다리가 강신혁의 입에서 바삭함과 고소함과 느끼함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녹아내렸다.
하지만 지금 둘 사이에선 치킨의 맛을 순수하게 즐기기에 영 꺼림칙한 화제가 나오고 있었다.
“평범한 전투 길드로는 이미 한국 땅에 자리 잡고 있는 뱅가드와 백양을 넘을 수 없었거든. 그래서 용병 길드로 선회한 거야.”
“대체 뭐가 하고 싶었던 거지?”
“돈. 그들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싶어 했어. 지금은 몰라도 아마 처음엔 은아한테 고스란히 재투자하려고 했을 거야.”
인공초인 프로젝트.
강신혁은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눈앞에서 마나의 지배자를 구사하던 날, 클레어로부터 간략하게 그것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은아의 탄생으로 막을 내린 줄 알았는데, 아직 그녀의 부모는 프로젝트를 끝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아 선배는 결국 부모의 뜻에 따르지 않았네?”
“맞아. 은아는 부모에게서 벗어나길 원했고, 결국 택한 건 한국 초인협회였어. 국제 초인협회의 관리 하에 있어 한국의 유력가문 따위가 쉽게 건드릴 수 없으면서, 본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전국적으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도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직종이었지.”
그래서 처음엔 부모와 아예 얼굴 맞댈 일이 사라지는 미국으로 오라고 꼬셨는데 신은아가 아예 듣지 않았다고.
“왜 안 왔는지 알아?”
“그 말을 하면서 날 째려보는 걸 보면 알 것 같은데.”
“맞아.”
클레어는 소주를 한 입에 탁 털어 마시곤 입술을 삐죽였다.
“착한 아이로 기다리고 있어야 된다고 안 온 거야. 믿겨 이게?”
“나이 스물다섯 먹은 여자가 나한테 할부지라고 부르는 것도 겪었으니까……."
“정말, 이젠 평범한 애로 만들어주고 싶어…….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버리는 건지."
클레어는 그 부분에서 또다시 강신혁을 째렸다.
그가 또 무슨 잘못이라는 건지 따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후, 왜 은아의 사춘기만 이렇게 혹독한 건지. 덕분에 나까지 고생이야.”
“클레어의 사춘기는 어땠는데?”
“난 엄마아빠 말 잘 듣는 모범소녀였지.”
클레어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순수를 증명했다.
증거를 봤으니 믿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응?"
“우리 엄마아빠가 한 번 보자네.”
"......."
강신혁의 손에서 치킨조각이 툭 떨어졌다.
그는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낚아채며 생각했다.
아니 설마 여기서 이렇게 나온다고?
여기까지가 전부 빌드업은 아니었겠지!?
“부모님이 걱정 많이 했거든. 나도 능력 탓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만 했지 사람들하고 진득하게 사귈 일은 없었으니까. 거의 은아 덕분에 버틴 셈이긴 한데.”
클레어가 신은아를 끔찍이 여기는 것을 보고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과연, 히어로 유니버스로 이어진 신은아와 클레어는 서로가 있었기에 고된 성장기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은아랑 사권다고 데려갈 수는 없잖아?”
“하지만 이젠 당당하게 남친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거네?”
“응. 스캔들로 엮이는 지긋지긋한 새끼들 말고 진짜 제대로 된 남친 말이야.”
그녀가 사람을 제대로 사귀지 못한 것은 아마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강신혁은 오히려 주노 발렌타인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자식이 저질스럽게 껄떡대준 덕분에 오히려 클레어가 자신을 만나기까지 프리할 수 있었던 셈이니까.
“아무튼 그래서 내가 한국에 남기로 했다고 하니까.”
“……나 때문에 남기로 했다고 말한 거야?”
“그땐 반반이었는데 아무튼.”
괜히 강신혁의 가슴이 뛰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클레어가 소주잔을 비우며 또 아무렇지 않게 한 마디 덧붙였다.
“엄마가 아이 만들어서 돌아오라더라.”
“……난 내가 여태까지 미국인에 대해 굉장히 편향적인 시선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내가 상상하는 미국인보다 한술 더 뜬 발언이었어.”
이 화제는 불리하다.
결코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 다룰 화제는 아니었다.
“아…… 그렇지. 그래서 그 용병 기업은 어디야? 은아 선배가 빠졌으니 규모도 그렇게 크진 않겠네?”
“아, 그건 아냐. 수완이 좀 있더라고. 거기 이름이……."
강신혁은 그 용병 길드의 이름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업계 1위 용병 길드였던 탓이다.
아무래도 그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용병 길드에 들어간 친구들도 있으니…….
“다 먹었어?”
어느덧 클레어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신혁은 다급히 칼로리를 보충하곤 조심스레 입을 열어 말했다.
“……일단 묻겠는데, 나 오늘.”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네."
강신혁은 즉답했다.
거절은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