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 Chapter 42. 게이트 합숙 - 4 >
“다들 준비됐어?”
이나희의 선언에 백인하가 투덜거렸다.
“꼭 낮에 해야 돼요? 밤에는 귀찮게 구는 모래 늪도 없고 좋은데.”
“밤에는 코어가 모습을 감추잖아.”
그녀의 말에 강신혁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게이트의 공략자들은 밤에 힌트를 찾아 돌아다녔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함정이었던 거지.”
“맞아. 그래봤자 룬을 모르면 다 뻘짓인데 말이야.”
“잘나쏘 아주.”
이 게이트에서 강신혁과 즐겁게 지낼 시간을 빼앗긴 엘레노어는 여전히 이나희에게 이를 갈고 있다.
이나희는 그녀를 애써 무시하고 짤막하니 설명했다.
“원래 우리가 직접 저 태양까지 돌진할까도 생각해봤는데 높아질수록 모래바람이 거세지는 구조인 것 같아. 후배라면 가능하겠지만 굳이 개고생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그녀는 품에서 스크래치가 나 있는 탄환을 하나 꺼냈다.
“룬을 새긴 탄환을 쏘기로 했어. 후배가 총을 쓸 거고, 그러면 온갖 방해가 들어올 테니까 백인하 너는 궤도가 안 비틀리게 바람을 통제해.”
“말은 쉽네요.”
“그리고 엘리는 골렘 요격 준비.”
“웅."
이나희가 가리킨 곳은 사막의 모래태풍의 중심.
다들 골렘이 나타난다면 저기서 나타나겠지, 하는 공통된 확신을 하고 있었다.
“빠르게 끝내버리고 나가자. 후배, 쏴버려.”
강신혁은 순순히 그녀가 건넨 탄환을 장전하고 윈드 마스터리와 라이트 마스터리의 능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포이보스가 에레보스에 비해 뛰어난 점이 있다면 하나, 바로 빛과 바람에 의해 모두 위력이 증폭된다는 점이다.
“좋아, 명중했어.”
그리고 속도는 비교도 안 되게 빨라진다!
"엥? 뭐야, 쐈어?”
“맞았어요.”
“역시 시뇨기, 나 바보 만드는 데는 일가견이 있지.”
모래폭풍이 방해를 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쏘는 그 순간 명중했으니까.
백인하가 뻘쭘해져 한숨을 내쉬는데, 돌연 세상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모래바람이 거세게 불며, 한 알 한 알 치명적인 파괴력을 가진 모래알들이 일행을 향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선배!”
“난 괜찮으니까 엘리한테 가! 곧 골렘 나타날 거야!”
이나희는 이 사태를 대비하고 있던 것처럼 드론을 띄웠다.
총 다섯 대의 드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마나의 보호막을 구성했다.
아마도 그녀의 룬 인챈트로 일시적인 강화작업을 한 것이겠지, 산탄처럼 쏟아지는 모래알들이 허무하게 튕겨나고 있었다.
‘언제 저렇게 강해졌지.’
- 회원님과 관련된 이들은 모두 빠르게 성장하니까요.
관리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엘레노어에게로 달렸다.
오혜나는 이미 백인하가 보호하고 있는 모양.
엘레노어는 창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버티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전방위에서 쏟아지는 공격에는 취약한 면모가 있었다.
“괜찮아요, 선배!?”
“괜찮아. 나 단단해.”
늦지 않게 그녀 곁에 도달한 그는 사방에 영사를 쏘아날려 일대에 복잡한 실의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곳곳에 거미줄처럼 쳐진 영사가 뿜어내는 영혼독이 날아드는 모래알들을 녹여내는 광경에 엘레노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강력해.”
“영혼을 녹이는 독이라, 영혼이 없는 적에게는 더 강해요. ……알아들어요?”
“영혼을 녹이는 독. 쿠후.”
아무래도 너무 중2병스러웠나보다. 일체의 과장도 없는 진실인데!
탄식하며 고개를 드는데, 탄환에 명중된 붉은 태양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엘레노어의 눈이 그의 시선 끝을 따라가더니, 이지러지는 태양을 보며 덩달아 흔들렸다.
“저렇게, 간단한 걸.”
어쩌면 다들 제대로 된 공략방식을 알고 있지만 보상을 지들만 얻고 싶어서 침묵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엘레노어에게 강신혁이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특정한 마나 패턴에 간섭할 수 없으면 아무리 마력과 공격성이 뛰어나도 부술 수 없는 구조였으니까요. 나희 선배 덕분에 간섭이 가능했던 거죠.”
“그렇구나……. 요즘 나희, 많이 달라졌어.”
그녀가 이나희를 달라졌다고 평하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능력 개화 때문만은 아니겠지.
강신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주시했다.
태양이 있던 자리에 새로이 푸른 태양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룬탄(Rune彈)에 의해 모든 마법적 위장이 파훼되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실체가 드러난 것.
저것이 진짜 이 세상의 태양…… 혹은 이 세상을 이루는 핵이었다.
“저걸 다시 쏘면, 끝나는 거 아냐?”
“그러면 세상이 통째로 무너져서 우리도 죽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이 골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전갈은 골렘의 몸을 파고든 기생충에 불과하다.
사막을 이루고 있는 모래알 하나하나가 골렘의 일부였다.
“그래서…… 저걸.”
“그렇죠.”
세상을 무너트릴 기세로 휘몰아치던 모래폭풍이 멎는다.
골렘이 자신의 힘을 한 점에 응축시키고 있었다.
바로 모래폭풍의 중심점이다.
“차라리 잘된 거죠. 이 게이트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가치가 큰 물건은 골렘의 핵일 테니까. 그걸 온전히 얻기 위해서라도, 더는 골렘이 날뛰지 못할 만큼 부숴서 핵과 다른 신체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어요.”
“굉장히 무식한 방법이네……."
“괜찮아요. 저희도 생각한 게 있으니까. 엘레노어 선배는 일단 저걸 부순다고만 생각해요.”
엘레노어가 활약할 여지가 생겼다는 점에서 그녀는 그것을 반겼다.
그녀의 전공은 좌우지간 전방의 모든 것을 찔러 부수는 것이니까.
양손으로 자신의 창을 힘껏 쥐고, 전방에 쏘아내기 위한 돌격 자세를 취한다.
그 순간 꽃이 만개하듯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원뿔.
강신혁이 만들어준, 그녀의 작은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창의 극점에 그녀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저 창은 또 뭐야?”
“슬슬 너도 깨달았겠지만, 아까 그 권총도 저 창도 시뇩이가 만든 거야.”
“크으으으."
한편 혼자 힘으로는 모래 산탄을 막아낼 능력이 없어 백인하에게 보호를 받고 있던 오혜나는 순식간에 거대화하는 창을 보며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상식으로 재단하면 안 돼!’
친한 오빠인 백인하를 필두로, 연금술사 클레어 보일을 제외하면 모두 신영의 학생으로만 이루어진 이 마스크드 바커스라는 집단이 얼마나 특별한지는 지난 며칠간 뼈저리게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또다시 자신이 모르던 것이 튀어나오니, 오혜나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파사삭 깨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저 사람이 이들의 중심에 있어. 인정하긴 분하지만, 대단한 사람이야.......'
어째서 백인하가 자신을 강신혁에게로 데리고 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은 느낌이다.
전투기술뿐만 아니라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아티팩트 제작 능력까지, 향후 초인사회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무조건 곁에 가까이 둬야만 하는 인재.
백인하는 오혜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이다.
겸사겸사 친구에 대한 호감도를 쌓아보려고 한 것일 수도 있겠고.
‘이대로 한심한 모습으로 끝낼 수는 없어.’
게이트에 들어와 내내 보호받기만 했다.
심지어는 보스를 사냥할 때도 위험하지 않은 곳에 숨어있기만 해야 한다니, 뱅가드의 차기 수장이 될 사람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저 상황에 끼어들어도 방해만 될 뿐, 그렇다면……!’
사막 한가운데서 모래가 뭉쳐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이 공간에 침입해온 침입자들의 얼굴과 체형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평균을 내놓은 듯한 괴상한 모습이었는데, 거기에 모여드는 막대한 양의 마나가 절로 그녀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수십, 아니 백 미터도 넘기는 것처럼 보이는 거인을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덤벼드는 작은 소녀의 모습을 보며 오혜나는 눈을 빛냈다.
‘저것 , 그대로라면…… 위험할지도 몰라!’
소녀가 뛰어올랐다.
묵직한 창격이 골렘의 육신을 꿰뚫는 순간, 오혜나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대상을 얼려 둔하게 만드는 그녀의 능력.
저 거대한 골렘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순간적으로 [정지]시키는 정도는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이젠 저들이 빨리 대피하기를 빌어줄 뿐……?
- 탕!
직후, 엘레노어의 창이 꿰뚫었던 바로 그 자리에 검은 그림자의 탄환이 파고들었다.
골렘의 몸에 수천, 수만 개의 균열이 일었으나 놈의 몸속으로 파고든 그림자는 그 균열 사이를 촘촘하게 이으며 놈이 파괴되지 못하게 붙들었다.
- 타당탕탕!
이어서 날아드는 수십 발의 그림자 탄환이, 골렘의 몸통 전체를 붙들고 놈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마치 어둠으로 상대를 가두어 농락한다는 세계랭킹 3위 다크 커튼의 능력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게 본인이 만든 아티팩트의 능력에 불과할 뿐이라니. 이젠 그저 감탄밖에는 할 수가 없다.
“치, 뭐야. 헛힘 썼잖아.”
그러니까 저 얄미운 남자는 골렘이 피격 후 산산조각으로 폭발한다는 사실을 미리 예측하고, 대책을 준비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탄환을 연달아 쏘아낸 직후 그의 시선이 오혜나에게로 날아든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녀가 힘을 발휘한 것도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도 보여줄 수 있는 만큼은 보여줬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 분하지만, 지금은 이게 한계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는 사이, 비룡기사단장 엘레노어가 거대한 창을 연신 내쏘아 단단히 굳어버린 골렘의 몸통에 구멍을 내놓는 것이 보였다.
자폭 시퀀스가 강제 스킵당한 골렘은 그것을 포기하고 대신 몸으로 엘레노어를 깔아뭉개려 들었으나, 그때마다 강신혁이 추가로 쏘아내는 어둠의 탄환이 놈을 구속하고 데미지를 입혔다.
종국에는 늪에 빠진 처량한 다람쥐처럼 허우적거리며 바닥으로 천천히, 천천히 녹아내리는 골렘의 모습에, 오혜나는 허무감마저 느끼고 말았다.
“여태껏 감춰져왔던 게이트의 히든 보스…… 말도 안 돼. 저런 건 그냥 일반 몹 취급도 안 되잖아.”
“익숙해져, 익숙해지면 너도 강해질 거야.”
전투를 치르는 내내 모래폭풍을 통제하며 일행을 보호하고 있던 백인하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끝난 고야?”
“모르겠어요, 일단 이쪽으로 마나를 전부 유도해 소멸시키기는 했는데…… 아, 끝난 모양이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방금 전투에는 굉장히 심오한 수법이 숨어있었다.
골렘의 핵에서 일단 에너지를 모조리 한 번 뽑아내기 위해선 강신혁이 엘레노어에게 말한 것처럼 골렘이 더는 날뛰지 못할 때까지 상대해야 하는데, 강신혁과 이나희는 그 노가다를 피하기 위해 아까 태양을 향해 쏘아냈던 룬탄에 약간의 추가적인 조치를 가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골렘의 핵에 담겨있는 에너지가 일정한 지점에 모조리 집중되었고, 에레보스의 암탄으로 그 형체를 고정, 신나게 타격해 에너지를 깔끔하게 소진시킬 수 있었다.
“아, 어두워진다.”
“시뇩아, 저거!”
“오케이.”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푸른 태양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 작은 세상 하나를 감당했던 만큼 굉장히 커다란 구체였는데, 그는 하늘로 영사를 쏘아내 그것을 충격이 가지 않게 받아내고는 바로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대체 당신 아공간 팔찌 넓이가 얼마나 큰 거야!?”
“내가 만들었어.”
“공간 계열까지 다룬다고!?”
실은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구입한 기능이지만, 공간조율 스킬을 익혔으니 언젠가는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강신혁은 자랑해줄 겸 스킬을 발동, 오혜나의 등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 아아아아……!"
지나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오혜나는 결국 백인하의 품에서 기절했다.
어이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인하의 시선을 강신혁은 살짝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