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 Chapter 41. 균형의 논리 - 4 >
“아."
블랙우드 훈련소 앞에서 강신혁을 기다리고 있던 엘레노어는 그를 보자마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검…… 어디가쏘?”
“잃어버렸어요.”
그의 담백한 대꾸에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의 검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검의 성능 이상으로 그가 검을 아낀다는 사실은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체 어디서 잃어버렸느냐고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할 수가 없었다.
“그, 그으……."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선배. 하지만 괜찮아요. 언젠간 다시 찾겠죠."
강신혁은 쓰게 웃으며 대꾸하곤 인벤토리에서 이번에 만든 무구, 포식의 흑염창을 꺼내들었다.
“당분간 창술이나 수련하려고요.”
“나랑 같네.”
“그렇네요.”
곤혹스러워하던 엘레노어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창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창은 내가 더 강해.”
“많이 배울게요.”
"응."
둘은 다짜고짜 격돌했다.
애초에 엘레노어와는 대화보다 대련을 할 때가 더욱 많았다.
엘레노어의 창은 하루하루 더 날카로워지고, 빨라지고 있었다.
특히 마스크드 바커스 활동을 시작하고 그녀의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다.
굳이 짊어질 필요도 없는 짐을 짊어지고 다니던 때에 비하면 훨씬 보기가 좋았다.
“후우……."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물러난 강신혁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새 또 늘었네요, 선배. 이만하면 전대 투왕이라는 타이틀에 합당한 실력은 되겠어요."
“전대?”
“그야 올해는 제가 할 테니까.”
“누구 맘대로.”
장난스런 도발에 엘레노어 역시 씩 웃으며 재차 덤벼들었다.
그녀의 급가속은 놀랄 만큼 빠르다.
더욱이 속도와 기세를 오롯이 담고 내찔러오는 창은 더더욱 위협적이다.
강신혁은 그녀의 모든 움직임을 눈에 담으며 그것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려 애썼다.
오고 가는 공격과 방어 사이로 영력을 쏘아내, 그녀의 근원과 접촉하며 움직임의 원리를 분석했다.
그러나 아직 완벽하지 못한 데다 그녀의 움직임을 읽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반응이 느려져(적들과 격전을 치를 때마다 일일이 영력으로 상대를 분석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강신혁은 허를 찔려 한 판을 내주고 말았다.
“한 번 더?”
“네, 오늘은 나가떨어질 때까지 대련하는 걸로 하죠.”
제아무리 태연한 척 해도, 제대로 저항도 못 해보고 신살검을 빼앗긴 울분을 아직 해소하지 못한 강신혁이다.
이번 차원 퀘스트에선 사실 그의 활약은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기에(그럼에도 보상으로 마이룸의 가구가 늘어났다.), 그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쌓여있었는데, 자신의 공격을 기술적으로 받아내며 반격해오는 엘레노어와 대련을 하고 있자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 도움 돼?”
“네? 그야 당연하죠.”
"......후."
엘레노어의 얼굴에 떠오르는 뿌듯함을 보며 강신혁은 괜히 죄 짓는 기분을 느꼈다.
더욱이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숲에 난 오솔길을 따라 이나희가 통통 뛰는 듯한 걸음으로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아, 역시 여깄었네!”
“나희 선배는 왜 왔어요?”
“너 보고 싶어서 왔는데.”
이나희는 누가 보면 사귀는 사이인가 의심 갈 만큼 당당하게 선언하고는 근처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엘레노어가 코웃음을 치는 것을 보며, 강신혁은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고 확신하고 입을 열었다.
“선배들, 저 클레어랑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이들은 그래서 뭐? 같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알아."
“웅, 들었오.”
“벌써 들었어!?”
이 여자들 역시 톡방이 있는 게 확실하다!
그것도 신은아는 포함되지 않은 톡방이!
“들었으면 앞으로 함부로 꼬시지 마세요. 안 넘어가니까.”
“꼬신 적 없는데?”
“응, 안 꼬셔.”
두 여자는 역시나 약속이나 한 듯이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널 싫어할 수도 없잖아.”
“신혁은, 내가 가장 믿는 남자야. 떨어지기 시로.”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티를 낸다고?
이 이상 없을 만큼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는데도 이런 반응을 보이면 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강신혁이 어이없어하고 있자니 두 사람이 말을 이었다.
“까놓고 말해 요즘 연애 좀 한다고 그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아예 헤어지라고 고사를 지내라!”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부분을 과감하게 긁어버리다니!
강신혁이 인상을 쓰자 이나희가 킥킥 웃으며 다가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투정 좀 부려본 거니까 화내지 마잉.”
“애교 부리지 마요, 소름 끼쳐요.”
“하여간 껄렁한 외모랑 다르게 성실한 성격인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강신혁은 그 말에 욱해서 외쳤다.
“내 얼굴이 뭐, 뭐가 어때서!”
“여자애랑 잘 놀 것 같은 얼굴.”
“……여자 친구가 다섯 명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
“엘레노어 선배까지.”
그러나 강신혁도 일정 부분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의사가 둘에게 확실히 전달된 것 같았으니 오늘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대련 언제 끝나? 엘리랑 오늘 남자한테 차인 기념 위로회 할 생각인데 낄래?”
“환영해.”
“안 가!”
결국 강신혁은 엘레노어가 일어날 힘도 안 남을 때까지 밀어붙여, 둘의 위로회를 무산시키는 위업을 달성했다.
자신을 노리는 이나희의 검은 손길을 피해 기숙사로 도망치니 그곳엔 백인하가 있었다.
“너 집 없냐? 방학인데 안 가?”
신영의 기숙사는 방학에도 기숙사가 무료다.
그보다는 사전에 신청을 한 사람들에 한해서 방학 기간 중 자택으로 귀가할 수 있었는데, 백양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백인하가 여전히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것도 강신혁의 방에!
“시뇩아, 내가 일생일대의 부탁이 있는데.”
어째 요즘 백인하의 진지한 얼굴을 많이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인생 몇 번 살길래 일생일대의 부탁이 그렇게 가볍게 나오냐.”
“우리 혜나 검술 스승 좀 해주라.”
강신혁은 백인하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너 걔 보모지? 혹시 업어 키웠냐?”
“아아니, 너도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동생 같은 애가 한여름 마당에 널브러진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있으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을걸.”
게다가 오혜나가 가장 힘들어할 때 보살펴주지 못한 죄책감 탓에 더 신경이 쓰인다고.
“그럼 네가 직접 챙겨야지 왜 자꾸 날 사이에 끼우려 드냐고. 나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사람 많거든?”
“나희 누님이랑 엘레노어 누님이랑 캣파이트하는 사진이라면 아까 학교 자유게시판에 올라오긴 했는데.”
“뭐!?”
다급히 스틱을 꺼내 게시판에 접속했더니 정말로 누군가 오늘 블랙우드 훈련소에서 강신혁이 두 여학생과 얽힌 모습을 찍어 올려놓고 있었다!
타이틀은 무려 [벌써 시작된 신인왕 쟁탈전.jpg].
“아놔 어그로 끄는 수준 장난 아니…… 네……."
무척이나 절묘하게 찍힌 그 사진은, 실제로는 셋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둘이 강신혁 한 명을 놓고 싸우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 글에는 심지어 댓글들까지 엄청 달려 있었다.
[Nahee.Marion - 와, 나 엄청 예쁘게 찍힘. 우리 엄청 잘 어울리지 않음?]
[도우진 - 왜 저렇게 연애질하는 놈보다 내가 약한 걸까]
[rladbwns - 강신혁 죽인다]
[기사학과2학년전우준 - 죽이러 갔다가 네가 죽을 듯]
[영국미녀 - 우리 단장님은 투정부리는 모습도 예뿌다♥ 그리고 신혁이는 주거♥]
[Alger - 내려주세요, 부끄러워요. 그리고 나희는 이미 한 번 부단장한테 고백했다가 차였어요.]
[Nahee.Marion - 야! 나쁜년아!]
[D.PAINE - ……]
“Oh……."
강신혁은 탄식했다.
그 옆에서 백인하가 또 깐족거렸다.
“그런데 사진 진짜 잘 나오지 않았냐.”
“아니, 더글러스 페인 이 사람은 이제 곧 졸업할 거면서 뭐 하러 자유게시판을 보고 있대.”
“그건 모르겠고 나중에 또 한 판 떠야 할 듯."
"후......."
어떤 놈일까, 강신혁은 자신도 클레어처럼 도촬을 방지하기 위해 기계를 탐지하는 드론을 만들기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고뇌했다.
일단은 클레어에게 오늘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철저히 보고해두기로 했다.
“백인하, 잘 생각해봐. 이 와중에 내가 오혜나라는 애 교육까지 맡는다고 생각해보라고. 그러면 장담하는데 신학기부터 너랑 나, 오혜나의 삼각관계 썰이 돌걸.”
“나는 왜?”
백인하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강신혁은 놈의 면상에 창을 찔러줄까 하다가 말았다.
이 녀석은 어쩌면 오혜나가 그에게 심리적으로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아직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오혜나가 앞으로 백인하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할지도 얼추 보이는 듯했다.
“아무튼 오혜나는 네가 케어해, 네가. 가능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뇩아 제발 부탁이다. 난 너보다 검 잘 다루는 애 모른다고.”
“와, 진짜.”
그에 대한 칭찬을 절묘하게 섞어 부탁해오는 것만 봐도 녀석의 수작질이 얼마나 악랄한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강신혁은 그것을 알면서도 쉬이 그것을 쳐낼 수가 없었다.
미약하게나마 오혜나에게 부채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백인하는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웠기에.
“걔 맡으면 뭐 줄 건데. 나 몸값 많이 비싸졌다.”
강신혁은 이번에도 거래를 제시하기로 했다.
“뭐, 뭐 해줄까? 마스크드 바커스 이상 가는 부끄러운 짓이 또 있단 말이야?”
“……당장은 생각나는 거 없는데.”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신살검이지만 그 녀석은 미국에 가서 당분간 귀국할 낌새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검을 달라고 할까?
솔직히 이런 말은 스스로도 되게 건방지다고 생각하지만, 지구에서 그보다 더 성능이 뛰어난 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인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면 소원권 하나 킵해두는 거 어때.”
“그래, 진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 아, 근데 학생회장은 내가 해야 되서 안 돼.”
“할 생각도 없어.”
“대신 부회장은 줄게.”
“필요 없어 꺼져.”
강신혁은 백인하에게 며칠 후, 오혜나를 데리고 자신이 지정한 장소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백인하는 감격한 나머지 강신혁을 껴안으려 들었으나 그는 단호히 녀석을 밀어냈다.
그 날 저녁 클레어와 만나 데이트를 하고, 며칠에 걸쳐 검의 제작에 몰입했다.
그런 가운데 신은아의 귓속말이 왔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보고 싶어. 그런데 너무 바빠. 너무 보고 싶은데…….
- 미안, 당분간 게이트로 합숙훈련 가.
- 은아 님의 귓속말 : 아…… 신영 과제. 응…….
신은아의 메시지가 너무 서글프게 느껴지는 나머지 강신혁은 충동적으로 이런 제안을 했다.
- 다녀와서는 신은혁으로 같이 활동하자. 마스크드 바커스로 활동하는 것 외에, 초인협회 이름으로.
- 은아 님의 귓속말 : 진짜?
- 그럼. 둘이서 같이 움직이자.
- 은아 님의 귓속말 : 아…… 아싸. 히, 아싸.
- 은아 님의 귓속말 : 너무 좋아.
- 그래, 그럼 너무 무리하지 말고.
- 은아 님의 귓속말 : 응. 후배 정말 사랑해!
처음 메시지에 비하면 훨씬 기운이 난 듯했다.
강신혁은 그것을 보며 흐뭇하게 웃다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짓고 있던 미소가, 완전히 손녀딸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미소였다는 사실을.
- 현재 동화율이 67%를 돌파했으니까요. 그녀를 정말 손녀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은아 선배는 아직 날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오히려 잘됐다고 해야 할지, 심경이 복잡하네요.”
- ……글쎄요, 어떨까요. 관리자에게는 파국이 보이는 듯합니다.
들릴 리가 없는 관리자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강신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재차 망치를 들었다.
신살검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정도의 검은 만들어낼 작정이었다.
@@@
며칠이 지나 약속한 날이 되었다.
백인하는 오혜나를 데리고 강신혁과의 약속장소에 집합했다.
“어, 왔네.”
“헐, 쟨 또 뭐야. 쟤도 가? 진짜? 나 빠졌으면 큰일날 뻔.”
“아…… 시뇩, 너무해.”
“글쎄 시뇩 금지라고요.”
그곳엔 강신혁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나희, 그리고 잔뜩 실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엘레노어의 모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