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 Chapter 40. 성숙해진다는 것 - 5 >
관리자는 강신혁이 다크 마스터리를 샀으면 좋겠다는 눈치였다.
- 정말로 흔치 않은 매물입니다만, 다크 마스터리…….
“정말로 필요해지면 그것보다 더 높은 랭크로 살게요.”
강신혁은 요즘 정기적으로 거래 게시판에 무구를 판매하면서 HP를 제법 번다. 7억 HP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크 마스터리 같은 거 없이도 에레보스는 잘 다루고 있고, 뭣보다 아직 라이트 마스터리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데 다른 마스터리를 욕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파이어 마스터리 덕분에 라이트 마스터리와 윈드 마스터리의 한계가 확장됐는데.’
당분간은 불과 빛, 그리고 바람이 이루는 조화를 연구하기만도 바쁘다.
뭣보다 하필이면 어둠이라는 점이 문제다. 불에 이어 어둠이라니, 둘을 합쳐 다크 플레임 같은 거라도 만들었다간 강신혁도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 그게 아닙니다, 회원님. 다크 마스터리를 익히면 빛과 어둠 양면이 갖춰져 마치 최강으로 보이는…….
“그럼 역시 안 되겠네요.”
[이건, 이럴 수가…… 와…….]
강신혁이 더더욱 냉정하게 거부하는 사이, 콰티는 그가 만들어준 사복검을 살피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는데, 더구나 폭화금의 성질을 이리 간단히 바꾸다니, 역시 저 불꽃은, 그렇다면 모루야말로, 아니 하지만…….]
굉장히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어쩐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듣는 것이 꺼려졌다. 강신혁은 슬금슬금 그녀로부터 물러나, 일단 폭화금 괴를 만드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슈가 돌아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나 왔어 할아방! 아니, 저런 보물을 그냥 막 만들어주면 어떡해!”
능력을 발휘한 것인지 50미터 높이 성벽을 넘지도 않고 바로 그의 눈앞에 나타난 슈는 콰티의 손에 들린 사복검을 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만들어주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렸는데! 저 불덩이한테는 고작 몇 시간만에 뚝딱 만들어주고!”
“너한테 만들어준 거랑은 등급 차이가 많이 나.”
“그건 알지만 그래도…… 대가는 받았어?”
대가.
그러고 보니 딱히 셈을 치르지는 않았다. 그건 앞서 건설한 성벽도 마찬가지지만…… 성벽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콰티를 비롯한 염인들과 슈였으니 그렇다 치고.
“콰티가 화산의 정에 부탁해서 화로를 크게 업그레이드시켜줬거든. 보물도 얻었고, 그러니까 따로 대가는 받을 필요 없어.”
“와, 그러고 보니 엄청 끝내주는 구슬이 하나 더 박혀있네.”
신염의 화로에 박힌 새로운 보주를 그제야 발견한 슈는 그것을 살피며 눈을 반짝였다.
가이아 시스템을 믿지 않는 그녀인 만큼 감으로 아티팩트의 능력치를 측정하는 능력은 수준급인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화산의 정의 본체 일부를 떼어준 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이건 불덩이가 노력한 게 아니라 그냥 화산의 주인이 할아방을 마음에 들어하는 거 아냐?”
눈치가 아주 귀신이었다. 강신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받은 만큼은 못 되어도 할 수 있는 만큼은 베풀고 가야지. 이대로 성벽만 놔두고 가면 앞으로 분명 궁지에 몰릴 테니까.”
“저런 무기가 있으면 불덩이 혼자서도 다 잡아버릴 수 있겠다……. 됐어, 할아방 생각이 그렇다면. 사실상 여기서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기기도 했고.”
역시나. 슈는 처음부터 염인들이 아닌, 화산의 정을 의식하고 이 세상에 강신혁을 데려온 것이 분명했다.
화산이 뿜어내는 미증유의 열기, 그 일부나마 강신혁이 담아갈 수 있다면 앞으로 그의 야금술이 크게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보고서.
“퀘스트는 아직 완료된 게 아니지?”
“응. 우리가 선방하기는 했지만, 사실 불도마뱀 포식자 같은 건 이 프로젝트의 대장이라기엔 많이 약했어.”
그러니까 할아방이 쉽게 잡을 수도 있었던 거고, 하고 말을 잇던 슈가 괜히 말했다 싶은 표정으로 머쓱하게 웃었다.
“할아방이 약하다는 게 아니라, 보통 이런 규모가 큰 세상을 공략하는 놈들은 그것보다 더 강하거든. 그러니까……."
“난 아직 약한 게 맞으니까 굳이 그렇게 실드쳐줄 필요 없어. 그보다 다른 종족들은?”
“확실하게 짓밟고 왔어. 적어도 우리가 퀘스트를 끝내는 동안은 더는 날뛰지 못할 거야. 게다가 이미 우두머리들을 할아방이 죽여 놨으니까.”
불도마뱀 무리와는 달리 폭풍거북이나 암석늑대, 늪돼지들은 확실히 우두머리가 당한 모양이었다. 그 덕에 모두 혼란스러워하고 있어, 그 틈을 노리고 외부의 이종족들이 쳐들어와 오히려 놈들과 싸우느라 바쁠 지경이라고.
“개판이 따로 없겠네.”
“그 덕분에 불도마뱀들이 움직이기도 힘들어졌어. 아마 산에 올라오기까지 그 전쟁통에 휘둘릴 테니까.”
슈의 눈망울은 벌써부터 반짝이고 있었다. 강신혁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대번에 알아챘다.
“이제 시작하자, 어른놀이.”
- 듣는 사람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드는 약칭이로군요.
관리자는 여전히 툴툴거렸지만 더 간섭하려 들지는 않았다. 강신혁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누누이 말했지만 도움은 아마 안 될 거야.”
“아니야, 이미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괜찮아.”
슈는 환한 웃음과 함께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신혁은 그 손을 맞잡았다.
@@@
그로부터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강신혁은 성벽에 발리스타를 수십 개 이상 설치했다.
무려 통짜 폭화금으로, 화살도 물론 폭화금.
정형화된 틀을 이용해 대량으로 만들었기에 높은 등급의 아티팩트로는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것을 성벽에 설치하는 순간 얘기가 달라졌다.
놀랍게도 염왕벽이 지니고 있는 특수능력이 부분적으로 발리스타에도 적용되며, 발리스타와 화살의 내구성, 공격력이 증폭된 것이다.
[무속성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어.]
콰티는 발리스타를 직접 쏴보고는 강신혁을 안아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슈가 적당히 훼방을 놓지만 않았으면 이미 진즉 끌어안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우리가 지닌 불의 힘으로 온전히 공격력만 강화된다는 점이 특히 대단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염왕벽의 특수능력이 공유되고 있어서 그래. 같은 소재라서 통하는 게 있나보네.”
[특수능력이 공유된다니…….]
어쩌면 이것도 신염의 힘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화로가 이 세상에서 극한의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할아방, 어때!?”
생산품을 확인하는 둘의 옆에서는 슈가 있는 힘껏 몸을 늘이고 있었다.
“좀 커진 것 같아?”
“아니, 완전 똑같아.”
“이상하다, 할아방하고 접촉할 때마다 혼의 근원이 크기를 불리는 기분이 들었는데.”
강신혁은 발리스타를 만들고 남는 시간 틈틈이 슈의 근원과 접촉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종족의 능력이나 제한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슈는 느끼는 바가 큰 모양이었다. 한 번 근원을 탐색할 때마다 몸의 묵은 때를 벗겨낸 것처럼 개운한 표정을 짓곤 했다.
[혼의 근원이라, 근원이 커지면 더 곤란한 것 아냐? 수명이 긴 종족은 유아기도 기니까.]
“뭐, 유아기!? 불덩이 너 죽었어어!”
여전히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강신혁은 슈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콰티를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올렸다.
‘부작용을 대신 받아내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 무슨 말씀입니까, 회원님?
‘아, 그냥 얼토당토않은 발상에 불과해요. 염왕벽을 보면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저급 아티팩트에 제 능력을 공유시켜주고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떠오른 발상은 두 가지가 있었다.
슈의 능력을 대신해서 발동하고 대가 또한 슈 대신 받는 무구를 만드는 것.
슈의 능력의 페널티만을 대신해서 받는 일종의 액막이 부적을 만드는 것.
- 어느 쪽이든 대장장이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군요.
‘굉장히 새삼스러운 말이네요. 전 슈한테 부탁을 받으면서부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전자는 불가능할 듯했다.
슈의 능력이 발동하는 구조를 완벽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슈의 능력은 명백하게 그녀의 신체를 매개로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염왕벽을 완성시켰을 때처럼 기운만을 유동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때도 분명 슈 본인과 염인들의 신체에 영향을 준다는 명백한 페널티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액막이는 어떨까.’
이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염왕벽이 실제로 그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같은 소재로 이루어진 발리스타에 자연스럽게 특수능력을 공유해주었다.
그렇다면, 슈의 신체부위를 일부 떼어낼 수 있다면, 거기에 슈의 능력의 페널티만을 옮기도록…….
“음, 상상도 안 가네.”
하지만 도전해볼 가치는 있다고 여겼다.
강신혁은 우선 염왕벽과, 그것과 이어진 발리스타를 영력으로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이것들은 어차피 본인이 만든 것이었기에 근원을 파악하고 소통하는 일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살펴본 결과 역시 신염의 화로로 만든 덕이 맞는 듯했다. 폭화금이라는 금속도 특이하다.
그래도 특수능력을 공유하는 메커니즘 자체는, 따로 재현하는 것이 마냥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 과연, 그렇군요. 이렇게 해서…….
“응? 왜요?”
-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 바로 작업에 돌입하실 겁니까?
“아뇨. 그 전에 슈의 신체 일부를 받아야죠.”
굉장히 무섭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말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머리카락 내놔봐.”
“으으…… 할아방, 알아? 머리카락을 늘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렇게 능력을 쓸 때마다 내가 어린 모습으로 있는 시간도 길어지는 거.”
[역시 유아기가 맞…… 쿠학!]
어쩌면 이 녀석들은 굉장히 절친한 관계가 아닐까. 강신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사이, 갑자기 슈의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만큼 길어졌다.
슈는 자신의 머리를 모아 쥐고는 어깨 즈음에서 손날을 날카롭게 휘둘러 그것을 잘라냈다.
“이 정도면 되는 거지?”
“한 번 시도로 안 될 가능성까지 고려해도 충분해. 맡겨봐.”
“그럴 거야. 이래놓고 안 된다고 하면 할아방한테 책임져달라고 할 거니까.”
- 잘못된 접근입니다!
관리자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강신혁은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작업에 바로 돌입할 수는 없었다. 그 즈음해서 다른 염인들도 드디어 눈을 떴고, 이들에게는 개인용 병기를 만들어줘야 했으니까.
“딱 둘로 나눈다. 활과 창.”
[하지만 ****는 저런 멋진 무기를 받았는데.]
“꼬우면 네가 콰티 이기고 새로운 우두머리 해.”
한 명 한 명 주문제작을 해줄 여유가 없다. 그는 이미 활과 창, 화살을 대량생산할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고, 염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우리가 가진 광염기를 활용할 수 있는 병기도 만들면 안 될까?]
[맞아. 앞으로도 우리의 적이 불도마뱀에 한정되리라는 법도 없으니까.]
“그건 이미 준비해놨어.”
강신혁이 내민 것은 발리스타용 화살이었다. 바로 그것에 광염기를 담아 증폭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화살촉도 많이 준비해놓을 거야. 창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원했던 건 이런 방향성이 아닌데…….]
“그 이상은 히어로 유니버스를 통한 정식 의뢰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대량의 생산작업이 이루어지며 분지 높이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콰티를 비롯해 병장기를 챙긴 염인들은 분지에 흙을 보충하겠다며 산 밑으로 내려가 대량의 흙을 가져왔다.
“와 이게 보충도 되네.”
[기존의 흙과 섞어 오랫동안 놔둬야 해. 화산의 정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선 인내심이 중요하지.]
불도마뱀의 습격도 몇 번인가 더 일어났다.
강신혁은 일부러 슈를 쉬게 놔두고 염인들이 어떻게 놈들을 잡는지 지켜봤는데, 불의 힘을 절삭력과 내구도로 치환하는 병기를 들게 된 염인들은 다소 어설프게나마, 상처없이 불도마뱀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저놈들 뒤에 도사리고 있을 ‘우두머리 급 존재’를 제외하고 염인들을 이길 수 있는 놈들은 나타나지 않겠다 싶은 시점에.
비로소 슈를 위한 액막이 부적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