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 Chapter 39. 성 쌓기 - 4 >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들에게 하나같이 특이한 구석이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퀘스트를 다른 차원의 회원들과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강신혁도 처음 알았다.
그것도…….
“우와, 할아방 잘생겼었네……."
“그것 참 고맙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소녀를 앞에 둔 강신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 히어로 유니버스의 VIP 회원이라는 녀석이 겉보기엔 10살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라면 누구나가 난감해할 것이다.
“아, 방금 나이 물어보려 했지. 금지, 그거 안 됨. 절대 노노.”
물어볼 생각도 없었는데 지레 찔려하며 손사래를 치는 소녀는, VIP 회원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지극히 그 나이 대에 어울리게 생긴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우연히도 요즘 안면이 생긴 젊은 초인인 오혜나처럼 푸른 머리카락, 그와는 반대로 새빨간 홍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냥 슈라고 불러줘.”
“슈퍼울트라은하계주먹1짱을 줄여서?”
“응, 그보다 장갑은? 할아방 나 장갑.”
슈는 강신혁이 모루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그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하지만 관리자가 불여우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이것이 아마도 그녀의 컨셉이리라 생각했다.
“여기.”
“우와아, 드디어! 다른 밥벌레들이 그렇게 자랑해대던 모루메이드!”
“오버하기는.”
그가 내민 장갑을 받아든 슈가 눈을 반짝이며 뺨에 그것을 문질렀다.
그녀에게 의뢰받은 물건으로, 완성했다는 보고를 하다가 그녀가 문득 얼굴도 볼 겸 퀘스트를 하나 같이하자는 얘기를 했던 것이다.
아마 그가 활약할 일은 없겠지만 다른 회원의 무력을 두 눈으로 관찰하는 것도 황룡투의 수련에는 큰 도움이 될 테고, 항상 자신을 친근하게 대하는 회원과 친목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대뜸 이 차원으로 날아온 것인데…….
‘확실히 만나보길 잘했네.’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들은 한 명 한 명 그를 놀라게 하는 이들뿐이다.
좋은 경험이 되었다.
한편 슈는 그가 준 장갑을 이리저리 잡아당겨보며 내구성을 실험하고 있었다.
“할아방할아방, 이거 정말 쭉쭉 늘어나? 안 찢어져?”
“글쎄, 아마도 X랭크까지는?”
"오오오오오, 역시 할아방은 기준이 달라! 현계한도 정도는 가뿐히 넘는구나!”
현계한도. 일반적으로 필멸자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 즉 SS랭크를 말하는 것이다.
강신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현계한도라는 표현은 초월자들한테는 별로 안 어울리는 것 아냐? 당장 내 스테이터스도 대부분 현계한도에 이르렀는데.”
“아, 그건 쭉정이들 기준이고. 난 X- 미만을 현계한도라고 불러.”
“과연.”
불과 얼마 전까지 강신혁은 인지도 못하고 있던 영역이었는데 그 이하는 쭉정이라 이거지.
SSS랭크만 해도 지구에선 신은아가 나오기 전까진 다들 감히 상상도 못하던 랭크였는데, 초월자들의 기준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래서 실제론 어때요, 관리자님?’
- 그녀가 VIP 회원이라는 점을 고려해주세요, 회원님. 하지만…… 회원님과 친분이 있는 몇몇 분들에게 있어 현계한도란 실제로 SSS랭크를 가리키는 말이 맞을 겁니다.
‘SSS+랭크가 전환점이군요. VIP 기준 한 번 살벌하네.’
역시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실소하며 그녀를 살피던 강신혁은 문득 그녀의 손에 시선이 가 닿았다.
소녀는 맨손이었는데, 제법 상처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치유가 불가능할 만큼 오래된 상처인 것일까, 하지만 히어로 유니버스에는 분명 엘릭서라는 것도 있다고 들었는데…….
“신경 쓰여? 하지만 괜찮아, 훈장 같은 거니까.”
“여태까진 장갑 없이 싸운 거야?”
“응. 나한테 맞는 게 없더라고.”
소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그가 준 검은 장갑을 양손에 착용했다.
어린 소녀가 끼기에는 조금 컸던 장갑은, 그러나 그녀가 착용을 완료한 순간 작은 손에 딱 맞게 줄어들었다.
“오오, 일단은 착용감 좋아.”
“정보를 확인해봐.”
“안 볼래, 난 직접 써보기 전까진 믿을 수 없어. 아! 할아방을 못 믿는다는 건 아냐! 가이아를 못 믿는다는 거야, 알지? 할아방 내 맘 알지?”
“그, 그래.”
가이아 시스템을 못 믿는다는 발상도 존재할 수 있었는가?
더구나 시스템을 쏙 빼버리고 가이아라고만 부르는 것도, 강신혁에겐 굉장히 독특하게 들렸다.
이래저래 신선한 충격으로 가득해 점점 그녀에게 묘한 거리감을 느끼는 와중, 슈가 강신혁의 허리 즈음을 붙잡았다.
“그럼 이제 가자, 여긴 좀 안전한 곳이구, 퀘스트 받은 곳은 쫌 안쪽이야.”
“그래, 따라갈 테니까 이것 좀 놓……!?”
슈가 바닥을 박찼다.
그 순간 강신혁은 자신의 몸이 산산이 분해되는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눈앞의 풍경이 워낙에 빠르게 바뀌고 있어 지금 자신이 슈에게 붙들려 이동 중이란 사실만은 간신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 이것이 슈의 속도가 너무 빨라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인데…….
그 와중에도 슈가 자신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충격과는 별개로 몸에는 바람이 긁고 지나간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도착!”
슈가 활기차게 말하며 그를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곳은 아주 넓은 분지였는데, 언덕 아래로는 울창한 산이었다.
강신혁은 자신의 반고리관이 어째서 무사한 것인지 고찰하고 싶은 심정을 일단 접어두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했다.
매우 넓고 아주 약간 움쭉하게 파인 대지. 그 아래 웅장하게 펼쳐지는 산세…….
비록 그가 알고 있는 것과 규모 면에서 매우매우 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곳의 사이즈를 대략 100분의 1로 줄인다고 가정하면, 이곳은.
“화산의 분화구?”
“였던 곳이야. 여기서 저 애들이 살아.”
분지에는 둘 말고도 제법 많은 숫자의 인간들이 있었다.
아니, 그들을 인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주 사소한 차이점이 있었다.
바로 피부색이 붉고, 머리카락이 실시간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염인(炎人)들이야. 할아방 맨날 그랬잖아, 좋은 무구를 만들려면 좋은 쇠랑 좋은 불이 있어야 된다고. 얘네 좋은 불 만들어, 그래서 데려왔어.”
“차원 퀘스트 보상으로 받아볼만하다는 거지?”
“하지만 그 전에 저것들을 막아내야 돼. 할아방 보이지?”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진다.
슈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듯했다.
이 매우 넓은 분지를 목적지로 삼은 듯, 산 아래에서 꾸준히 기어 올라오고 있는 무수한 존재의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응, 대충은 느껴지네.”
“와, 보이는 게 아니라 느껴진다고? 난 눈으로 보기 전에는 잘 모르는데, 역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감각이 다른가봐. 헤. 아, 일단 쟤네 소개시켜줄게. 야, 불덩이!”
“으앗!"
슈는 또 강신혁을 붙들고 우다다 달렸다.
그나마 분지 내에서의 이동이라 아까처럼 큰 충격이 닥쳐오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눈앞 풍경이 바뀌니 공간이동 계열 스킬을 얻은 강신혁이라 해도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다가 조금 괜찮아졌다 싶더니 어김없이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나타났다.
- 공간조율(SSS) 스킬의 숙련도가 D-랭크로 성장합니다!
- 공간이동에 관련된 깨달음이라도 얻으셨나요?
‘안 깨달으면 죽겠다 싶어서 몸이 적응한 것 아닐까요?’
요즘 초인업계에서 하도 마법사가 희귀해지니 일단 몸으로 때워놓고 마법이라고 주장하며 뒤에 (물리)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유행하던데, 설마 히어로 유니버스에도 이런 녀석이 있었을 줄이야.
더욱이 정말로 공간조율이 성장했으니 슈에게 감사를 해야 할 지경이다.
강신혁은 그 사실이 무척 분했다.
“불덩이, 인사해! 내 목숨보다 소중한 우리 할아방이야!”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눈앞에 염인이라 불리는 여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불타고 있을 뿐 그 외에는 특이한 점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슴과 국부를 비롯한 급소를 피부보다 더욱 짙은 기운이 도는 붉은 암석이 얇게 뒤덮어 옷을 대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만 그 점을 제외하고 본다면, 인간의 기준으로 쳐도 상당히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할아방? 인간은 겉보기로 나이를 쉽게 알 수 있다고 들었는데 네년으로 보나 이 할아방으로 보나 영 아닌 모양이군.]
그녀가 말했다.
강신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복잡한 사정이 있어. 신체 나이는 보이는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돼. 모루라고 불러.”
[그럼, 알겠다. 모루. 미안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바빠. 보아하니 전력이 되지 않을 만큼 약해 보이는데, 어째서 내가 너와 대화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알 수 있을까?]
“불덩이, 너 할아방 무시하면 내 손에 죽어.”
[그러니까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는 거다.]
아무래도 퀘스트를 발주한 것은 이 염인인 것으로 보이는데, 둘 사이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더욱이 강신혁의 스테이터스가 이 염인에게 있어선 얕볼 만한 수치라는 것도 알았다.
‘조금은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 영력은 쉬이 드러나지 않는 힘이니까요, 저 여자가 무식해서 몰라봤을 뿐입니다. 회원님도 전력을 발휘하신다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염인들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수준이십니다.
‘그래도 이 여자는 못 이기죠?’
-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분함이 회원님의 성장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500,000HP 보너스!
아니 그럼 이 여자는 대체 왜 히어로 유니버스의 회원이 아닌 거지?
그야 물론 강신혁이 강해서 히어로 유니버스에 속하게 된 것도 아니지만서도!
“어차피 이대론 안 끝나잖아. 할아방은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성벽을 쌓으러 왔어.”
[저것들을 성벽 따위로 막는다고?]
“정말, 할아방 실력을 안 보여주면 끝까지 그렇게 툴툴거리겠네. 좋아, 봐. 이거 할아방이 만든 거야.”
[뭐?]
슈가 장갑을 낀 손을 앞으로 내밀자, 염인은 대번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의외였다. 강신혁의 영력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 아티팩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거지?
[그걸 착용하고 싸우겠다는 건가? 어제까지 보여준 그 능력으로?]
"응응."
[진심인가? 연약해서 단번에 찢겨나갈 것처럼 보이는데.]
“난 우리 할아방 믿어. 그러니까 너도 잘 봐, 이거 안 찢어지면 할아방한테 맡기는 거다.”
강신혁은 당연히 이곳에 오는 순간부터 퀘스트를 개시하게 될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의 퀘스트에 함께하는 일은 아무래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어디 지켜보지.]
“잘 보이는 곳으로 와. 그래, 저쯤이 좋겠어.”
이번엔 슈가 강신혁과 함께 염인의 허리까지 붙잡았다.
강신혁이 체념하고 눈을 감은 다음 순간엔 이미 분지의 끄트머리, 언덕 아래의 가파른 산세가 보이는 곳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때까진 기감으로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끄트머리에 이르니 비로소 강신혁의 두 눈으로 습격자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분지에 뭐 탐스러운 것이라도 있다고, 아등바등 기어올라오는 저것들은 모두…… 도마뱀이었다.
[불도마뱀.]
염인이 말했다.
[불을 좋아해. 우리랑은 공존할 수 없어.]
“그런데 왜 여태까지 이 세상에서 둘이…… 아, 요르문간드인가.”
[그 빌어먹을 검은 기운을 지닌 녀석들을 요르문간드라고 불러?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뭐, 큰 뱀이라는 뜻으로 알면 돼.”
[뱀, 딱이네. 저 도마뱀들을 부리는 뱀이라 이거지.]
염인이 이를 갈았다.
그때 적들의 모습을 확인한 슈가 흠흠,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왼손을 들어 손목을 붙잡고, 외쳤다.
“은하계1짱 로켓--- 펀치----!”
클레어가 짓는 중2병 네이밍보다도 못한 기술명에 강신혁이 한탄하려던 찰나, 꽉 말아쥐고 있던 그녀의 오른주먹이.
손목 앞부분부터 잘려나간 것처럼 사라졌다.
“엥?”
그리고 돌연 산을 올라오고 있던 도마뱀들의 머리 위로 아주아주 거대한 검은 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끔찍한 굉음과 함께, 주먹에 깔린 수천 마리의 도마뱀들이 모두 곤죽이 되어 소멸했다.
“착탄, 명중! 와, 장갑 튼튼한 거 봐!”
[정말 네 주먹을 견디다니……!]
“에에에엥!?”
강신혁은 그 검은 덩어리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슈의 주먹이었다.
……정말로 로켓 펀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