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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화. < Chapter 38. 첫눈 - 8 >

벌레를 죽인 순간, 게이트의 폐쇄가 진행되었다.

어째설까 강신혁은 곰곰이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벌레의 시체에 이것저것 다른 몬스터의 부위가 섞여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이 벌레의 능력은 다른 몬스터들과 스스로를 합성하는 것.

즉 게이트의 보스를 벌레가 흡수한 탓에, 벌레를 죽이지 않고선 게이트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

그래서 눈앞의 소녀가 게이트 안에 갇혀 벌레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이고…….

‘좋아, 도망치자.’

강해지고 싶다는 중2병 마인드로 인류를 배신해버린 오주영을 참살한 것은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 일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죽인 사람의 딸을 마주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넬 정도로 강신혁의 맛이 가진 않았다.

그래서 잽싸게 다음 벌레가 있는 게이트의 공간 흔적을 더듬어 스킬을 발동하려는데.

돌아선 강신혁의 어깨에 오혜나의 손이 얹어졌다.

“기다려.”

“긴급상황이니, 할 말이 있거든 나중에.”

“잠……."

강신혁은 성공적으로 탈출했다.

공간이동을 하자 순식간에 다른 게이트로 이동할 수 있었고…… 물론 황룡투기와 영력을 순간적으로 대폭 소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눈앞에 새로이 나타난 벌레를 찔러 죽이기에는 충분한 기력이 있었다.

- 회원님.

다행히도 주위에 사람은 물론 시체도 없다. 아직 생존자와의 조우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애초에 게이트에 사람이 없었던 모양.

그런데 강신혁이 한결 안심하고 눈앞의 벌레를 향해 달려드는 그때 관리자의 메시지가 그의 눈앞을 가렸다.

- 저 불여우가 따라왔습니다.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신혁은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잽싸게 신살검을 인벤토리로 넣어버렸다.

한 번이면 몰라도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검을 계속 휘두르는 것은 ‘강신혁’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양손의 소울 커넥터로 영사를 뿜어내 벌레를 칭칭 감아 포박하고, 인벤토리에서 뽑은 낫에 영혼독을 잔뜩 담아 휘둘러 적을 베어냈다.

그러고 시체를 회수하며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시리도록 푸른 눈에 푸른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는 소녀, 오혜나의 모습이 있었다.

"......."

"잠깐, 이건 어떻게……."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당신 어깨에 손을 댔더니 한순간 눈앞 풍경이 바뀌었어."

강신혁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어쩐지 에너지 소모량이 너무 많더라니, 사람을 하나 데리고 이동해서 그런 거였나.’

아무래도 아직 스킬을 운용하는 데 미숙해서, 그와 신체를 접촉하고 있던 대상까지 자신의 일부로 판정하여 스킬 범위에 집어넣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발가벗은 채 몸만 이동할수도 있었으므로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스킬에 숙련되면 이런 오류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게이트는 별로 위험하지 않으니까, 알아서 나가라. 나는 다음 게이트로 이동한다.”

“뭐!?”

어차피 두 게이트 사이 거리도 얼마 되지 않았고, 난이도 차이도 별로 없는 곳이니 게이트에서 나가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강신혁은 자신을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오혜나를 매몰차게 떨쳐내고는 재차 공간이동을 실시하며 은아에게 통신을 넣었다.

“선배, 벌레 좌표를 잡아냈어요. 한 군데씩 뒤질 필요 없어요.”

[바로 말해줘.]

“XXXX, 다음은 YYYY로 가면 돼요.”

이어서 몇 개인가의 좌표를 연달아 말해주고 있자니 신은아가 문득 물어왔다.

[공간이동 계열 특성이라도 각성했어? 어떻게 마법 좌표를 그렇게 정확히 읽어낸 거야?]

“비슷해요. 조금 있다 얘기해요.”

[응!]

벌레가 있는 곳만 추적해 온 탓에 바로 근방에 벌레가 있었다.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영사로 적을 포박하며 쯧, 혀를 찼다.

“왜 하필 그 애랑.”

- 신경 쓰이십니까?

“신영에 들어온다잖아요. 병신같이, 그때 검을 들고 있었으면 안 됐는데.”

자신의 손에 가장 익은 무기는 신살검이고, 루인 드러머를 죽이려면 사실상 신살검을 들어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것인데…… 하다못해 공간이동을 하기 전에 신살검을 수납하기라도 했어야 했다.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 없이 그저 빠르게 움직였을 뿐인데, 하필이면 가장 보이기 싫은 사람에게 보여 버렸다.

- 히어로 유니버스 기준으로는 버러지지만, 그래도 일반 초인 중에서는 등급이 제법 높은 편입니다. 아마도 신살검을 포착했을 겁니다.

"역시......."

앞으로 학교에서 신살검을 다루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신살검을 아는 이들의 입까지 막아야 하게 생겼다.

하필이면 신인왕전에서 신살검을 들고 날뛰었으니, 그때 기록을 완벽히 없애는 것이 가능할지…….

“들키면 들키는 거긴 한데. 그래도 일단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우겨야겠다.”

- 앞으로 학교에서 신살검을 쓰는 건 자제해야겠네요.

“뭐 잘 됐어요. 마침 제가 쓸 검을 만드는 데 도전하고 싶던 참이거든요.”

강신혁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낫을 휘둘러 벌레의 목숨을 거두었다.

애초에 이미 한 방씩 데미지를 입고 넘어간 놈들이라, 회복 계열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은 쉽게 죽일 수 있었다.

그렇게 여섯 개째의 게이트를 정리했을 때, 그보다 늦게 움직이기 시작해 그보다 훨씬 빠르게 게이트를 순회한 신은아가 그에게 통신을 걸었다.

[끝났어! 이게 전부 후배 덕분이야!]

“애초에 저희가 저지른 일인데요 뭐.”

[마스크드 바커스의 탓은 조금도 없어. 오히려 이렇게 특수한 사태를 적은 희생자로 끝낼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마스크드 바커스가 이번 건을 담당했기 때문이야.]

신은아는 무척 강력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는, 만약 따지는 이가 있거든 자신이 다 번개로 구워버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일단 게이트가 발생했던 위치로 모이자.]

“그렇게 하죠.”

굳이 모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사태 종결 선언을 위해서는 게이트 발생지를 꼼꼼히 점검할 필요가 있으리라.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마지막 남은 황룡투기를 짜내 공간을 더듬었다.

공간조율(SSS)은 자신이 알고 있는 장소라면 공간이동에 보다 적은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점에서 특히 훌륭했다.

- 공간이동은 마법으로 익히는 게 대부분인데, 그것을 스킬로 익혔으니 회원님의 운에 그저 경악할 따름입니다. 400,000HP 보너스!

“이젠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주네요.”

일반인은 결코 인식할 수 없는 시공의 장막을 살짝 들춰, 조심스레 몸을 끼워 넣었다.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과거의 발걸음을 쫓아, 황룡투기를 대가로 바쳐 순리를 아주 살짝 거슬렀다.

실제 시간의 흐름은 순간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강신혁은 그 사이 자신이 거슬러온 흔적을 인식할 수 있었다.

적당한 위치에서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그곳은 원래 게이트가 나타났던 장소였다.

“와, 깜짝이야.”

눈앞에 클레어가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발견하곤 놀라워하더니, 이윽고 가면 아래로 드러난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그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내가 가?”

“빨리 왕.”

“알았어.”

그런데 두 사람이 장난스레 포옹하는 그 순간 옆에 신은아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달라붙었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 두사람 뭐했어?”

“뭐가?”

"......."

클레어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신은아는 무척 찜찜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살폈으나 두 사람 다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표정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옆에 있던 이나희는 주먹을 불끈 쥐며 뭔가를 무척이나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으나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성대한 자폭대회가 펼쳐질 것이 뻔했기에 필사적으로 그것을 참았다.

“어, 시뇨기!”

뒤늦게 바이크를 탄 백인하가 합류했다. 강신혁은 착지한 백인하에게서 바이크를 압수하며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신은혁이라고.”

“그랬지, 그런데 어차피 뇌제 누님은 다 알고 계시니까 그냥.”

“우리가 모르는 데서 누가 듣고 있을지 모르니까 조심해라.”

“으뇩!”

그때 다른 방향에서 달려온 엘레노어도 일행에게 합류했다.

어쨌든 그의 정체를 감추기는 했기에 이번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고생하셨어요.”

“빠져나간 몬스터는 모두 잡은 것 같아. 하지만 일단 게이트가 있던 장소의 마력 흔적을 모두 조사할게.”

“도와줄게요. 좋은 스킬을 얻었거든요.”

강신혁은 일행에게 자신이 루인 드러머로부터 공간이동 계열 스킬을 얻었음을 솔직히 말하고 신은아의 작업을 도왔다.

마법 계열 특성을 가진 것도 아닌 강신혁이 공간이동의 힘을 얻었다는 말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럼 이제 블리치에서 나오는 뒤잡기도 되는 거냐?”

“아직 랭크가 낮아서 전투에서 써먹기는 조금 힘들어.”

그리고 설령 그게 가능해져도 뒤잡기 놀이는 할 생각이 없다.

그런데 강신혁이 신은아를 도와 작업을 완료하는데, 돌연 허공에서 짝짝- 구두굽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저 다녀왔어요!”

“어라?”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싶더니 레드슈즈, 브리짓 폴센의 것이었다.

고개를 드니 그녀는 짧은 드레스를 입은 주제에 허공에 떠 있었다. 신은아가 다급히 그의 가면 위를 손으로 덮었다.

“저 사람은 여기 왜 왔어요?”

“지원해주겠다고 왔어. ……후배가 다 해결할 줄 알았으면 끝까지 거절하는 건데.”

신은아가 혀를 차며 강신혁의 등 뒤로 숨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은 놓지 않고 있었다.

“아이, 인형사도 있네. 어쩔 수 없죠.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는 다 같이 마셔요.”

“차는 또 무슨 소리야?”

“도와줄 테니까 차 한 잔 같이 마셔달라고.”

“어머……."

클레어가 그 말에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곤 앞으로 나섰다.

“차 좋지. 같이 마시자. 그런데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자면 우리 은아는 노멀이야.”

“네에!?”

클레어의 말에 브리짓 폴센이 경악하여 외쳤다.

“여태까지 연금술사 님이랑 사귀던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

클레어까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슬쩍 강신혁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설마 그가 오해할까 봐 걱정하는 듯했지만 애초에 그가 그런 오해를 할 이유가 없었다.

“여태 둘이 계속 붙어다녔잖아요! 그러다 연금술사 님이 인형사를 새로 연인으로 삼아 정착하는 바람에 뇌제 님이 질투심을 품고 둘 사이를 훼방 놓으려고 인형사를 유혹하려던 것 아닌가요?”

“우리 둘 다 이성애자야!”

"......."

졸지에 아침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클레어가 화를 버럭 냈다.

신은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강신혁의 등 뒤에 매달려 달달 떨고 있을 뿐.

강신혁은 그녀의 유아화가 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한데 우리 선배님 꼬시지 말아줄래요? 조금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우……. 좀 많이 충격인데……."

“충격은 우리가 받았는데?”

“죄송해요, 진짜 철석같이 믿었는데.”

브리짓 폴센이 하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처에 그녀가 착지하자 신은아는 움찔하며 강신혁에게 더 바싹 다가붙었다.

그 모습을 본 브리짓 폴센은 에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럼 그냥 평범한 사각관계네요.”

"사각?”

“저기 쟤.”

브리짓 폴센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게이트 너머 골목을 가리켰다.

그곳에 푸른 눈의 소녀가 벽에 달라붙어 강신혁이 있는 쪽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그녀는 오혜나였다. 설마 여기까지 따라올 줄이야, 생각한 강신혁이 뜨악하는데 옆에서 브리짓 폴센이 우쭐해하며 어깨를 폈다.

"맞죠? 인형사 씨 인기 엄청 좋네요.”

“당신은 어디 가서 눈치 좋다는 말은 하지 마요.”

“넹?”

강신혁은 브리짓 폴센에게 핀잔을 주며 돌아섰다.

머리로 차가운 무언가가 닿는 것 같아 고개를 드니,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 첫눈의 추억이 이런 거라면 차라리 아까 내리던 잿빛 눈이 더 나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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