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 Chapter 38. 첫눈 - 4 >
“납품 가능하겠죠?”
“허어.”
강신혁이 내놓은 열 개의 아티팩트를 차례차례 확인한 이만우는 감탄사를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보너스를 받아내야 할 수준이지. 고생 많았다. 또 실력이 늘었구나. 그런데 뭐가 이리 빠른 거냐?”
“얘가 또 어디서 다 만들어왔어. 난 마무리만 했고.”
이나희가 조금 삐진 투로 말했다. 그녀는 명색이 동업자인 자신에게 강신혁이 너무 많은 것을 감춘다는 생각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다음 의뢰도 받아놓죠. 요즘 아티팩트 찾는 사람 많지 않아요?"
“많지. 게이트 발생이 늘어나면서 신규 각성자도 늘어나고 있으니까. 초인 훈련소가 신설된다는 얘기는 들었겠지?”
“네, 들었어요.”
각성이란 인생의 어느 때에 찾아올지 모른다.
유년기, 성장기에 각성한 이들은 신영과 같은 초인학교에 다니며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능력을 쌓아 졸업할 즈음엔 이미 엘리트 취급을 받게 되지만, 멀쩡히 제 삶을 살다가 각성한 이들은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신규 초인 훈련소가 있는 것은 바로 그래서다. 초인에게 가장 급한 상식과 전투법 등을 6개월이라는 단기간에 걸쳐 교육하고 내보내는 것.
그런데 이전 대공습 사태 이후로 게이트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각성자들도 덩달아 늘기 시작했고, 원래 있던 훈련소만으로는 이 사람들을 모두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이 훈련소가 신설되었다.
배우는 사람이 있으면 가르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 교관으로 나서야 하는 초인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신은아가 바쁜 거야 뭐 매일 있는 일이니 그렇다 치고.
“하지만 우리가 상대하는 건 고위길드다. 넌 너무 서두를 것 없다.”
“맞아, 우리 브랜드는 프리미엄으로 갈 거야. 그러니 고급진 로고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나희는 요즘 브랜드의 로고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강신혁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나 졸업까지 이제 1년 남짓이야. 그 안에 우리 브랜드 입지를 확실하게 다져놔야지.”
“제가 사인이라도 할까요?”
“K&L 어때? 정식명칭은 K&L Works라고 하고……."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내 이름을 앞에 두는구나.”
강신혁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이만우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나희, 너 그건……."
“아 뭔데. 할아버지 아직 있었어? 우리 작업하게 빨리 가.”
이나희는 뭔가 켕기는 게 있기라도 한 건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이만우에게 저리 가라며 손짓을 했지만, 그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선 건 이만우가 아닌 강신혁이었다.
“아, 오늘은 저도 일찍 가볼게요. 비룡기사단 쪽 호출이 있어서. 선생님, 같이 나가시죠.”
“……꼭 가야 돼?”
"응."
강신혁의 단호한 대꾸에 이나희가 입술을 삐죽였지만 그는 본 체도 안 하고 가방을 챙겼다. 그러자 이나희도 풀렀던 셔츠 단추를 다시 채우며 재킷을 걸쳤다.
“그럼 나도 엘리 보러 갈래.”
“선배 나랑 대련할 건데?”
“그럼 카렌이라도 가지고 놀지 뭐.”
“방금 가지고 논다고 하지 않았어요?”
“빨리 가자!”
이나희가 강신혁의 손을 잡아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강신혁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가는 것을 보며 혼자 남은 이만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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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오자마자 엘레노어에게 이끌려 대련을 시작하는 흐름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늘은 블랙우드 훈련소의 야외대련장 중앙에 요즘 많이 못 보던 남자가 서 있었다.
압도적인 덩치, 근육질의 몸매. 두 손으로 쥐고 휘두르기도 힘들어 보이는 대검을 땅에 박아넣고 힘껏 폼을 잡고 있는 그 남자의 이름은.......
“더글러스 페인?”
“선배를 붙여라.”
“웬일이에요? 요즘 실습으로 정신없지 않아요?”
잔뜩 폼을 잡고 서 있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데, 그가 잘 말했다는 듯이 대꾸했다.
“은퇴식이다.”
“한참 전에 했잖아요.”
“단장 은퇴가 아니라, 기사단 은퇴.”
더글러스 페인이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뒤를 가리켜보였다. 그곳에 3학년 단원들이 일제히 정렬해있는 것이 보였다.
“어라, 설마.”
“3학년생은 모두 오늘을 기점으로 비룡기사단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그래도 선배, 아직 2학기 끝나려면……."
“벌써 12월이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헤일로의 의뢰를 완수한 이후로도 몇 개인가의 자잘한 차원 퀘스트를 하면서, 지구와 다른 세상을 왔다 갔다 하며 수련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의 흐름마저 잊고 있었다.
“사실 2학기가 되기 전에 은퇴식을 하는 동아리도 제법 많다. 우리는 특별한 의식 때문에 은퇴식을 이 시기로 늦춘 거지.”
“특별한 의식……."
그 말을 듣고 보니 대련장에 3학년생을 제외하고도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것이, 은퇴식이라고 단순히 옷만 벗고 끝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뭐 하는 건데요?”
“대련.”
“하긴 쌈박질하는 동아리가 그렇지 뭐.”
강신혁이 심드렁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더글러스 페인이 당장에라도 그를 한 대 패고 싶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우리가 빠지고 나면 이제 너희가 기사단의 주축이 된다. 신영의 기사학과를 대표하는 우리 비룡기사단을 맡길 자격이 있는지 마지막으로 테스트하는 거다. 쌈박질이 아니다.”
“그래서 저도 싸워야 돼요?”
“네 차례는 나중이다. 단장부터 순서대로……."
“준비, 됐어요.”
그때 맞은편에서 엘레노어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손에 창이 들린 것이, 아마 단장과 단장이 맞붙는 게 관례인 모양이다.
그녀는 강신혁을 발견하곤 반갑게 손을 들어 올리다가, 그 뒤로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있는 이나희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나희?”
“아, 심심해서 따라왔어. 구경해도 되지?”
이나희의 말에 뒤에 대기하고 있던 단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흘러나왔다.
“와 이젠 대놓고 같이 다니네. 진짜 저 둘 사귀나 봐.”
“나희 선배는 부정 안 한다잖아. 신인왕이랑 미스 신영이면 잘 어울리지 않냐?”
“단장이 미스 신영 됐으면 지금 부단장이랑……."
“아, 단장 열 받음.”
“쉿. 쉿."
엘레노어는 단원들을 홱 돌아보더니, 작게 콧김을 뿜고 자신의 창을 들었다.
“빨리 끝내죠. 한 번에 다 덤뵤."
“그래도 부단장 정도는 끼워서 하지.”
“다 덤뵤, 빨리.”
그러자 이번엔 더글러스 페인의 눈이 빛났다.
아무리 그녀가 자신을 이겼다지만 열 명도 넘는 3학년 단원들을 동시에 상대하겠다는 것은 만용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 편으론 그녀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자신이 직접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그녀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겼으니까.
“좋아, 그럼 다들 준비해라.”
“아니 진짜 싸워?”
“어린애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엘레노어의 신장으로만 따지면 정말 다 큰 어른들이 애 한 명을 빙 둘러싸고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 모양새가 좋지 않기는 했지만.
그 말을 들은 엘레노어의 눈에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녀의 역린까지 깔끔하게 건드렸으니 오늘 저 자식들은 죽었다고 보면 되었다.
그 순간 매치가 성립되었다. 강신혁은 이나희와 따로 자리를 잡으며 피식 웃었다.
“엘레노어 선배를 상대로 도발을 하네.”
“우리 엘리가 많이 세긴 하지.”
“그냥 센 게 아니라 하이랭커 수준인데요.”
“쟤넨 모르잖아.”
마스크드 바커스 활동을 같이 하며 이나희도 엘레노어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대충 감을 잡고 있었다.
원래 초인은 등급 하나가 올라갈 때마다 극적인 전투력 상승을 겪는다. 스테이터스 랭크 하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하나씩 있다고 보면 된다.
즉 평소에 능력을 감추고도 비룡기사단의 단장으로서 활동하는 엘레노어를 상대로 저들이 이길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보면 되는 것.
‘선배도 랭크를 제대로 드러낼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저 선배야말로 랭크 이상의 힘을 내는 능력자니까’
대련이 시작되었다. 엘레노어는 그 순간 앞으로 한 걸음을 성큼 내딛으며 창을 빠르게 튕겨 두 명의 3학년생을 날려버렸다.
대체 어떻게 어디를 때렸는지도 모르겠는데 좌우지간 거세게 밀려난 두 명의 선배가 깔끔하게 기절했다.
“그러게 어린애라는 말을 왜 해가지고.”
“쉿!”
“아, 또 한 명 날아간다.”
순간적으로 검날을 길게 늘여 공격하던 선배의 검이 엘레노어의 창에 튕겨나 아군을 공격했다.
엘레노어는 그 사이 허리를 숙이고 돌진해 자신에게 내리쳐지던 더글러스 페인의 대검을 피하고, 그의 거대한 덩치를 방패삼아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하며 방향을 전환해 창을 빠르게 몇 번인가 내쏘았다.
“컥!"
“케엑!”
“와, 진짜 엑스트라 같다.”
“야, 너도 단장이랑 붙으면 저렇게 돼.”
순식간에 다섯 명이 리타이어하고, 더글러스 페인을 비롯해 일곱 명의 단원만이 남았다.
단원들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더니 짧은 시간에 전투대형을 형성해 엘레노어에게 덤벼들었다.
“무슨 레이드하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레이드였으면 효과적이었을 텐데.”
아예 사방에서 그녀를 포위하고 한꺼번에 돌진했으면 가능성이 조금 늘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탓에 엘레노어에게 가까운 순서대로 한 명씩 명치를 창두로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비룡기사단에 속한 3학년생이면 기사학과에서도 가장 강한 이들인데, 그런 이들이 엘레노어의 창이 그려내는 궤도를 파악하지도 못 하고 무참하게 당하고 있는 것이다.
“쟤네 원래 저렇게 약해?”
“엘레노어 선배가 센 거라고.”
결국 머지않아 더글러스 페인만 그 자리에 남았다.
아마도 그는 여태 그리 전력을 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 외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된 순간, 전신에 강하게 힘을 주어 마력순환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덤뵤."
“나도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물론 넌 그동안 더 강해진 것 같지만……."
“……좋은 상대가 있어서.”
엘레노어는 창을 그에게 겨눈 채 가만히 말했다.
더글러스 페인은 좋은 상대가 누군지는 물어볼 생각도 않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 들린 대검이 지나친 마력의 집중에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저게 그의 특성인가? 강신혁도 흥미로운 눈으로 그것을 살폈다.
“비룡기사단 단장 엘레노어 R. 알제, 1년간 네게 그 자리를 맡기겠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너를 찾아오마.”
“아니, 필요없소요.”
“이건 너에게 바치는 고백이다!”
“필요 없다고!”
있는 힘껏 내리쳐진 대검과 단호히 내쏘아진 창이 충돌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그러나 [게 볼그]를 꿰뚫기에 더글러스 페인의 검은 아직 부족했다.
"후우…… 역시, 멋진 여자다."
"......!"
자신의 일격이 완벽히 막혔음에도 흡족한 미소를 짓는 더글러스 페인을 보며 짜증이 난 것인지 엘레노어가 창을 한 번 더 내질러 더글러스 페인의 면상을 가격했다.
깔끔하게 뒤로 넘어가 기절하는 더글러스 페인의 모습을 보며 단원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아무래도 이것으로 은퇴식인지 뭔지가 끝난 모양이었다.
“진짜 쌈박질이네.”
“아, 부단장도 테스트해야 되는데! 이 사람들 다 깨워!”
“좀 봐주자, 이제……."
비룡기사단은 더없이 믿음직한 단장과 부단장 아래 발전해나갈 것이다.
은퇴하는 3학년생들은 폼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은퇴식을 마친 후 조용히 사라졌다.
12월 초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