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 Chapter 38. 첫눈 - 3 >
[대지의 보주]
[SSS-랭크]
[특수능력 - 금강(金剛), 지령(地靈), 거신(巨神)]
*금강(金剛) -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자. 보주를 품은 자에게 절대적인 방어력을 부여하며, 공격력 또한 상승한다.
*지령(地靈) - 땅의 정령의 힘을 얻는다. 땅을 딛고 서 있을 때 모든 능력이 상승하며, 대지에 친화력을 얻는다.
*거신(巨神) - 땅에서 태어나 땅에 몸을 누이는 태초의 거인의 힘을 얻는다.
"오우......."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말이 있다.
이 구슬이야말로 그 말에 합당한 것이 아닌가 강신혁은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 방어력과 공격력을 뻥튀기 시켜주는 보물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범용성이 터무니없이 높네.”
- 땅에 발을 딛고 있을 땐 거기에 추가로 능력치 상승을 기대할 수 있죠. 하나의 강력한 특성을 얻은 셈이로군요.
관리자의 표현이 정확했다.
물론 신풍의 보주나 극천신주, 흑영신주, 물의 보주도 각각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대지의 보주처럼 노골적으로 물리전에 특화된 구슬을 얻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냥 들고 싸워도 능력이 발군이지만, 이건 신살검에 끼워도 그 성능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보물들이 하나같이 이런 구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조금 의외로운 점이기는 했지만.
[재밌구만. 나무뿌리에 응축된 거인의 힘이 거기에 남아있던 나의 힘과 버무려져 이런 결실을 낳다니.]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본 헤일로 역시 놀라워했다.
“이건 나무뿌리가 기운을 정제한 덕에 만들어진 거겠죠.”
[거인의 힘과 나의 힘이 뿌리를 같이 하고 있었기에 조화를 이룬 덕도 있었지. 흠, 거기에 모루 영감처럼 뛰어난 장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보물이 나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의 합작품이군.]
“그런 걸 제가 가져도 되는 거예요?”
[물론이지. 사실 그 보주를 제외한 나머지 기운은 모두 내가 이 땅으로 환원시켜버렸으니 나도 얻은 것은 있는 셈이네.]
거인은 X2 랭크의 괴물. 정상적으로 사냥했더라면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은 가히 가공할 수준이었을 터다.
그런데 그런 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모두 헤일로가 족쇄를 활용해 놈의 육신을 이 세상에 비료로 뿌렸기 때문.
그러니 그 끝에 남은 대지의 보주만이라도 강신혁이 가지는 게 옳다는 것이 헤일로의 생각이었다.
[오히려 미안할 정도야. 그래도 X랭크에 발을 걸치는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아니, 이 보주 역시 랭크에 어울리지 않는 흉악한 가능성을 띠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헤일로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강신혁은 더 권하지 않고 구슬을 챙겼다. 다른 구슬들도 그렇지만 여차할 때 그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는 강력한 카드가 생긴 셈이었으니 사양할 수가 없다.
그는 보주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다른 보주들과 마찬가지로 대지의 보주 역시 저장된 기운을 모두 소모하고 나면 그것을 다시 보충하기까지 효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전투 상황에만 꺼내 장비할 생각이었다.
“거인한테서 빼앗은 기운으로 세상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무리네. 그놈이 그래봤자 몬스터지, 세상을 멸할 수는 있어도 살리는 건 불가능해. 다만 저 아이들이 남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은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챙겨줄 수 있을 거야. 영감이 만들어준 밭도 있고 하니.]
“그런가요……."
멸망이 확정된 세상이란 실로 암울하다.
자신이 다녀온 네오러스트를 떠올린 강신혁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영감, 영감의 생명력과 영력이라면 이 땅에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을지도 몰라.]
“아직 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남았다고요?”
거인이 죽은 자리를 꼼꼼히 뒤져 대지의 보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 강신혁이 바이크에 오르며 헤일로에게 확인했다.
[물론이지. 이 세상의 모든 씨앗은 죽었지만 아직 영감의 씨앗은 팔팔하니, 다 죽어가는 밭이라 한들 그 씨앗을 틔워내는 것은 가능할 터.]
“씨앗? 아, 정확히 무슨 씨앗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거래 게시판에서 좀 알아볼게요.”
- 회원님.
[모루, 내가 말하는 씨앗은 그 씨앗이 아니라…….]
- 회원님, 퀘스트도 끝났으니 지금 바로 돌아가죠.
관리자의 메시지가 기분 탓인지 싸늘하게 보였다.
그러나 기껏 거인을 잡았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엘프들하고 축하 파티도 하고, 요즘 거듭된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시설도 좀 정비해주고, 밭도 좀 확장시켜주고.......
[내가 말한 씨앗이란 자네의 정…….]
- 퀘스트 완료! 마이 룸으로 귀환합니다!
다음 순간 강신혁은 마이 룸 안에 있었다.
- 죄송합니다, 회원님. 관리자의 독단으로 회원님을 귀환시켰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저도 헤일로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뒤늦게 알아들었으니까.”
그대로 귀환했으면 엘프들에게 무슨 짓을 당했을지 모른다.
강신혁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위를 살폈다.
어둑한 조명, 제법 고급스러운 침대, 한쪽에서 활활 타오르는 화로. 그 앞에 놓인 근사한 모루.
“모루랑 화로는 원래 없었는데.”
- 퀘스트 보상입니다. 성능도 메르바에 있던 것과 동일합니다.
강신혁이 가지고 다니던 간이 화덕과 모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하이 퀄리티의 설비.
강신혁은 멍하니 모루 위를 쓰다듬어보다가는, 문득 자신의 가슴팍이 불룩이 솟아있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이건…… 가지?”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의 손바닥만 한 길이의 나뭇가지였다.
원래 여기 뭐가 있었더라? 그렇지, 헤일로와의 통신수단이었던 나뭇잎이 들어있었다.
- 그러고 보면 퀘스트를 마칠 경우 가장 훌륭한 가지를 떼어준다고 하셨었죠.
“하, 미리 넣어뒀던 거구나…… 이런 마술은 누구나 부릴 수 있는 거예요?”
- 불가능합니다. 한 번 정보를 확인해보시겠습니까?
강신혁은 순순히 자신의 감정으로 나뭇가지를 살폈다.
[태초의 나뭇가지 ]
[????]
[시작과 함께 돋아난 나무의 제일 순수한 가지. 방대한 기운을 축적하고 보다 맑은 기운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걸 내가 뭐 하러 살펴봤나 싶네.”
- 극천신주와의 궁합이 좋겠군요. ……지금 가공을 시도하기엔 조금 이른 느낌이 있습니다만.
“한참 멀었어요.”
그래도 이 나뭇가지가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변화시키는 것을 영력으로 살피다 보면 뭔가 얻는 것이 있겠지.
강신혁은 여태껏 자신이 얻었던 귀물들 가운데 가장 귀한 그 가지를 인벤토리에 소중히 모시고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침대도 원래 이것보다 조금 구렸는데.”
- 회원님께서 이번에 해결하신 차원 퀘스트는 상당히 많은 고위 존재가 관련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차원 퀘스트의 보상도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지요.
“네오러스트 쪽의 퀘스트는 어때요?”
- 그건 세상의 이름이 아닙니다만……. 아마, 이번 퀘스트보다 더 얻는 게 많으실 겁니다. 성공만 하신다면요.
어째서 ?
그 세상에는 다른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이 연관된 흔적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강신혁이 모루 시절 만든 아티팩트 뿐인데.......
“……그만큼 중요한 아티팩트예요?”
- 그건 아마도 스스로 깨닫게 되실 겁니다.
하여간 전부 다 말해줄 것처럼 굴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뒤로 물러선다니까.
강신혁은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지구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뇨, 기왕 구슬 얻은 김에 예전부터 생각하던 걸 만들어두려고요. 사실 족쇄는 대부분 나무뿌리를 다듬는 일이기도 했고......."
- 무엇을 만드십니까?
“벨트요."
- .......
“구슬 끼워넣는 벨트."
@@@
구슬동자…… 아니, 강신혁은 무사히 작업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왔다. 바에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클레어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왔어?”
“응, 갈아입을게.”
“아냐, 어차피 영업 다 끝났어. 와서 앉아, 맛있는 거 내줄게.”
“지금 당신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요?”
여태까지 가게에 남아있던 초인이 쳇, 혀를 차며 말했다.
TV에서 제법 본 기억이 있는, 국내로 한정하면 상당히 랭킹이 높은 초인이었다.
“이젠 둘이 사귀는 걸 숨길 생각도 없나본데, 뇌제랑은 얘기가 잘 된 건가 모르겠네.”
“아니 무슨 우리 연애사정을 한국 초인들이 다 알아?”
“한국?”
클레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남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한국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 초인들은 모였다 하면 당신들 얘긴 거 몰라? 국제랭킹 1위에 5위, 거기에 생산계 초인 1위인 연금술사가 엮였는데 떠들지 않고 배기나. 그래서, 진짜 둘이 사귀나? 하긴 나도 뇌제보다는 연금술사 쪽이 승률이 높다고 생각했지.”
“궁금하면 뇌제한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때요.”
강신혁이 그 말을 하며 바 테이블에 앉았다.
손님은 질색하며 잔을 비우곤 일어섰다.
“내가 직접? 벌써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럼 원하시는 대로 사라져줄 테니까 연애 열심히들 하시라고.”
“연애?"
그 순간 바 안에 신은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 내부의 모든 것이 얼어붙은 가운데, 신은아는 우선 강신혁과 클레어에게 시선을 한 번씩 준 후 둘이 딱히 수상한 짓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막 왔을 뿐이기에 둘은 아직 손도 잡지 못한 채였고, 신은아는 그것을 깨닫고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이번엔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누가 누구랑 연애를 한다고?”
“아아, 뇌제. 저번 협력 탐색 이후로 오랜만이구만! 나야 나, 바텐더한테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거든.”
“당신 결혼했잖아?”
다시 말하지만 남자는 랭킹이 상당히 높았고, 초인협회 소속 초인인 신은아와 함께 게이트 대처를 하는 일도 가끔씩 있었다.
설마 신은아가 자신의 신상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니까…… 그게......."
"쯧."
남자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신은아가 혀를 찼다.
“바람을 피는 남자는 최악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지 마. 다음에 또 그런 소문이 들리면 내가 초인협회를 대표해 엄중히 처벌하겠어.”
“그, 그럼! 정신차렸어, 물론이지! 그럼 다들 좋은 저녁 되라고!”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불륜남이 되어버린 남자가 눈물 한 방울을 남기곤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강신혁과 클레어는 똑같은 눈빛으로 신은아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의 시선이 돌아오자 홱 시선을 돌렸다.
“……둘 다 요즘 바빴네.”
“난 개인의뢰를 하느라.”
“차원 퀘스트를 했다고 말했었잖아?”
“무슨 내용이었는지 궁금해. 헤일로 아저씨도 제대로 말 안 해주고.”
신은아가 또각또각, 경쾌한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오더니 강신혁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슬쩍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오늘은 계속 같이 있을래. 차원 퀘스트 얘기해줘.”
"......."
"......."
클레어와 강신혁 사이에 시선이 오갔다.
두 사람은 같은 타이밍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일단 한 잔씩 할까? 신혁이는 논 알코올이지만.”
"고마워, 클레어. 그렇지, 차원 퀘스트라고 해봤자 별 것도 없었지만 일단 헤일로가 엘프들을 보호하고 사는 차원에 거인이......."
이건 뭐 연애가 아니라 육아를 하는 것 같은데.
강신혁은 어깨를 으쓱이곤 자신이 만든 족쇄가 거인을 졸라 죽이는 얘기를 해주었다.
마시던 술도 넘어올 그로테스크한 얘기였지만 신은아는 끝까지 눈을 빛내며 얘기를 들었다.
말을 잘못해 그 세상의 엘프들이 강신혁의 정조를 노린다는 얘기까지 해버린 탓에, 헤일로는 다음날 두 여성회원의 노도와 같은 메시지 세례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