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 Chapter 38. 첫눈 - 1 >
[늦지 않았군, 모루.]
“아니, 늦은 것 같은데요……?”
미로토즈의 풍경은 실로 처참했다.
대지 곳곳에 금이 가 갈라져 그 사이로 용암이 흐르고 있었고,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으며, 원래부터 적었던 물은 바짝 말라 있었다.
강신혁은 물론 최대한 빠르게 족쇄를 만들었다고 자부했지만, 멸망한 다른 세상들보다도 심각한 미로토즈의 자연훼손현장을 보며 어째서 더 서두르지 않았나 후회가 들 정도였다.
-쿵!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맞추어 거인이 또 한 발을 내딛었다.
이전에 비해 보다 뚜렷이 울리는, 커다란 진동을 일으키는 발걸음.
착각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거인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더욱 강해지기라도 하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의 에너지와 관계가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기껏 만든 밭이……."
강신혁이 두 개의 낫을 휘둘러 진두지휘해가며 만들었던 밭 또한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거인이 직접 와서 헤집고 다닌 것이 아니라, 빠른 발걸음으로 대지에 연속해서 충격을 준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모루 님, 와주셨군요.”
“저흰 다시는 모루 님이 오시지 않는 줄 알고. 흑흑.”
“아직 늦지 않았어요,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모루 님의 은총을……."
“달라붙지 마요, 지금부터 거인 잡을 거니까.”
피골이 상접한 엘프들은(그럼에도 아름다웠다.) 강신혁을 보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다가와 그를 붙잡고 매달렸다.
나날이 빨라지고 강해지는 거인의 파괴 행위를 나서서 막지도 못하고, 세상이 시시각각 멸망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강신혁으로선 감히 그 속내를 짐작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엉덩이를 몰래 만지려 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늦지 않은 것이네, 모루. 벌써부터 느껴지는군. 영감이 내 의뢰를 아주 훌륭히 완수했다는 것이.]
“꺼내놓을까요?”
[아니, 여기선 됐네. 내가 어느 특정한 장소를 지정해줄 테니, 그곳에 그걸 설치해주게.]
헤일로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잎사귀를 강신혁에게 떨어트렸다.
그것을 잡아챈 순간, 강신혁의 뇌리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듯했다.
자신의 시야가 어마어마하게 넓어지는 듯했다. 아니, 무척 높은 곳에서 이 세상 전체를 내려다보는 듯한 감각이었다.
아마도 이 세상에 한정되는 일이겠지만, 수백, 수천 킬로미터 너머의 모습까지도 생생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넓어진 인식범위 위를 내달리는 한 줄기 붉은 선……
“거인의 이동경로로군요.”
[이제 어디에 설치해야 할지 감이 오는가?]
“네."
강신혁은 곧장 바이크를 꺼내어 올라탔다.
족쇄는 아직 결합되지 않은 채, 그의 인벤토리에 수납되어 있다.
그는 족쇄의 모든 부품이 제대로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을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엘프들에게 믿음직스레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곧장 출발했다.
- 우우우우웅
빠르게, 더 빠르게. 푸른 소가 희미하게 울며 그에게 보조를 맞춰주었다.
제아무리 거인이 거대하다 해도 감히 지금의 강신혁을 따라잡을 엄두는 내지 못하리라.
- 이제 조금 지나면 거인의 권역에 진입합니다. 부디 기세에 눌리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권역?’’
- 영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케이.”
지나치게 직관적인 설명에 이쪽이 보너스 HP를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관리자의 경고가 정말 우습게 볼만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 딱 2분 후 증명되었다.
- 우우우……!
갑자기 잘 나아가던 푸른 소의 움직임이 주춤한다. 그와 동시에 강신혁 역시 그의 몸을 짓누르는 무형의 기세를 느끼고 눈썹을 찌푸렸다.
아직 거인의 그림자도 드리워지지 않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놈의 기세가 그를 압박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영력.”
- 그렇습니다. 격에 안 맞게 비대한 영력은 본체를 빠져나와 이렇듯 외부에 압력을 행사합니다. 저급한 것이 과분한 힘을 지니고 있을 때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물론 격이 높은 이도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이러한 압력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저 에너지 낭비일 뿐이라고.
강신혁은 처절하리만치 납득했다. 그나마 푸른 소에 자신의 영력을 집중시키고 있어 버티고 달릴 수 있는 것인지, 그 외의 행동은 그 에게도 힘들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과 어찌 맞상대를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가 준비한 족쇄가 놈을 잠시라도 묶어놓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될 따름이었다.
“더구나 영력으로 나와 접촉하고 있는 거라면…… 놈은 지금 나를 분석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 그런 정교한 영력의 컨트롤이 가능한 존재는 회원님 정도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놈은 영력을 일부러 방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컨트롤하지 못해 질질 흘리고 있을 뿐입니다.
“거인을 랭크로 말한다면……."
- 그렇군요, X2 정도 되겠습니다.
금세 또 모르는 단위가 튀어나왔다. 설마 록맨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 이전 회원님께서 궁금해 하셨던, SSS+랭크 이후의 랭크 체계를 이르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인류는 이르는 것이 불가능한 경지이며, 다른 필멸자들 또한 쉬이 꿈꾸지 못합니다.
“X, X2, 이런 식으로 높아지는 거예요?”
- X-부터 시작하겠군요.
……그러니까 지금 SSS+랭크 이후에 X-, X, X+, X2-, 이런 식으로 또 랭크가 높아진다는 말이지.
강신혁은 문득 옛날 즐겨보던 만화를 떠올렸다. 조금 강해졌다 싶으면 금세 또 저런 아득한 경지의 괴물이 나타나니 대체 강해졌다는 실감이 들지를 않는다.
“어디 보자, 제가 지금 SS-랭크니까……."
- 소울 커넥터가 적용되면 SS랭크의 평균은 충분히 넘으십니다. 여덟아홉 단계 정도가 차이나는 상대로군요. 하지만 그렇게 계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X라는 단어부터가 필멸자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임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X2를 대체 어떻게 잡아……."
[그야 물론 영감이 만들어온 족쇄를 이용해서지.]
관리자와 나누던 대화에 어느덧 헤일로가 끼어들어 말했다.
[당연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모루 영감. 그 족쇄의 등급은 어떻게 되는가?]
“아직 조립이 끝나지 않아 확인은 못했어요. 단…… 이미 완성된 세부 부품의 랭크는 열람할 수 있었는데, 랭크 대신에 확인불가라는 메시지가 뜨더라고요.”
[음, 자신이 만든 무구임에도 그렇다는 것은 확실히 한계를 초월했다는 얘기로군.]
즉 이번에 강신혁이 만든 족쇄가 최소한 X-랭크에 달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어쩐지 부품 하나 완성시킬 때마다 야금술과 감정 스킬에 숙련도가 엄청 주어지더라니.
강신혁은 헤일로의 말에 아주 조금 안심하면서도,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족쇄와 적의 수준에 압도적인 차이가 나리라는 사실에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자네가 만든 물건은 언제나 랭크보다 우수했지. 걱정 마시게. 그나저나 이제 적절한 위치에 도착한 것이 아닌가?]
거인이 주는 압박감은 그 사이 더욱 크게 늘어나 있었다.
강신혁은 고개를 들어 지금 자신이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의 뇌리에 새겨진 붉은 선의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슬 숨 쉬는 것도 조금씩 힘드네.”
[조립해주게. 그것만 하면 모든 게 끝날 게야.]
“후…… 알겠어요.”
그는 일단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거인이 주는 압력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푸른 소를 황급히 인벤토리 안으로 대피시키고는,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운 상황에서 전신에 황룡투기를 돌려 안정시켰다.
모든 전투 상황을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바꾸는 수호황룡의 힘이 지금도 어김없이 발현되어 그의 몸을 지켜주고 있었다.
“시작해볼까.”
모든 부품을 차례차례 꺼낸다.
부품은 모두 크기가 제각각이었지만 가장 작은 것도 수 미터 크기에 달하는 초대형 작품이었다.
그런 것이 수백 개. 하지만 강신혁은 그것들을 어떤 순서로 조립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외우고 있었다.
부품들을 나란히 정렬해놓고 영력접착제를 꺼낸다. 족히 열 통 이상을 준비해두었으니 접착제가 부족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인이 또 헤이스트를 썼군.]
- 저 거대한 덩치로 뒤뚱뒤뚱 빠르게 걷는 꼴을 보고 있자니 우습기 짝이 없군요.
지나친 긴장감에 숨을 몰아쉬는데 헤일로와 관리자는 다소 느슨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걱정도 안 되나 싶지만, 어쩌면 그들의 가벼운 태도야말로 강신혁을 믿고 있다는 강한 의사표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거인 녀석의 속도가 갑자기 더욱 빨라졌어.]
- 이중 헤이스트!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 스킬을 진화시킨 걸까요. 이미 헤이스트라고 부를 수 없군요.
[허어, 앞으로 5분이면 끝장나겠군.]
아니, 역시 머리가 맛이 갔을 뿐인지도 모른다.
강신혁은 헤일로와 관리자를 속으로만 씹으며 본격적인 조립 작업에 돌입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는 이 모든 부품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이가 아닌가.
영력접착제를 듬뿍 짜내어 부품의 단면에 바르고, 차례차례 그것을 맞추어 접착시켰다.
과감하면서도 낭비가 없는 손동작은 유려했으며, 진지하게 번뜩이는 두 눈은 황금색으로 빛나며 그 짧은 순간에도 족쇄의 부품들을 진화시키고 있었다.
- 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아주 먼 곳 어딘가에서 거인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강신혁의 전신을 옥죄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폐부를 쥐어짜내 터트리려는 듯한 압력.
그럼에도 강신혁의 움직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신체 내부를 황룡투기가, 신체 외부를 영력이 감싸며 일종의 방어막을 형성했다.
거기에 더해 영력접착제까지 다루고 있으려니 기운의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비축해둔 영력 포션을 마시며 버텼다. 영력 포션은 모두 로그인 보너스로 나온 것을 모아둔 것이었다.
- 구오어어어어어어어!
놈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힐끗 들면 태산처럼 거대한 놈의 다리 한 짝이 이쪽으로 뻗어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접합부위를 틀리는 참사를 일으키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하나씩 이어붙이는 쪽이 좋았다.
결국 거인의 그림자가 강신혁의 몸 위를 짙게 드리울 시점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모든 부품의 접착을 완료할 수 있었다.
완성된 것은, 의외롭게도, 처음 그가 건네 받은 헤일로의 나무 뿌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 완벽하군.]
하지만 헤일로는 그것을 보며 정말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영력이, 얼마나 대단한 의지가 깃들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아직 안 끝났어요.”
고개를 힐끗 들어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하게 솟은 거인의 접근을 확인하며 강신혁이 말했다.
“제가 완성하는 순간 헤일로가 나서야 해요. 알겠죠?”
[맡겨두시게.]
그는 마지막으로 극천신주를 꺼냈다.
극천신주 안에 담긴 헤일로의 기운은 그동안도 계속해서 부품에 쏟아부어지며 부품의 능력과 생기를 유지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절반 가량의 기운이 남아있었는데, 강신혁은 이것을 미련없이 쏟아내 온전해진 나무 뿌리에 쏟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영력으로 이 거대한 나무 뿌리를 감쌌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헤일로가 준비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이 족쇄가 저 거인을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묶어버리는 것.
뿌리로 떨어져 나온 시점부터 이미 뚜렷한 목적성을 띠고 있었고, 거기에 자신이 계속해서 더한 의지를 부여하기까지 했다. 이쯤 했으면 이 나무 뿌리가 스스로 일어나서 거인을 묶으러 달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지겨웠다, 이제 끝내자……!”
강신혁은 자신에게 남은 영력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어차피 자신이 저 거인에게 생채기만한 흠집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머지는 이 족쇄와 그리고 헤일로에게 모조리 맡겨버리는 것이다.
헤일로가 전생의 자신에게 원했던,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실력으로 이제 와서야 간신히 완성하는 것이 가능했던 족쇄.
헤일로의 기운과 강신혁의 영력이 동시에 나무뿌리를 채우며, 영력접착제로 이어져있던 부분을 빈틈없이 메우고 보다 깊이, 근본적으로 연결시켰다.
-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인이 다시 한 발 내딛는다.
아직 강신혁을 눈치 채지는 못했지만, 발치에 웬 이상한 나무뿌리가 삐죽 솟은 것은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놈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이 족쇄를 얕보아서? 아니, 놈은 지정된 식으로밖에 움직일 수 없도록 제약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놈이 재차 들어올린 발이, 정확히 족쇄 위로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
주위 모든 에너지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인 나무뿌리가, 찬란한 황금빛을 토해내며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