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 Chapter 36. 거인의 궤적 - 6 >
강신혁은 총구를 겨누고 클레어는 출구를 막는 완벽한 콤비네이션.
빈틈없는 포위망에 갇혀 탈출이 불가능해진 늑대남자가 얌전히 두 손을 들고 투항하자, 둘은 본격적으로 그에게서 정보를 캐냈다.
이쪽의 정보는 단지 얼마 전 이 도시 안에 들어온 외지인이라는 정도로만 설명했다.
“외지인이라고? 운이 좋았군.”
늑대남자, 모코우드는 세 번째 다리를 의자 삼아 몸을 지탱하고 앉으며(유난히 굵고 튼튼했는데 저렇듯 막 다루는 것을 보면 생식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들어온 게 이곳이라니. 다른 건물의 지붕을 뚫고 떨어졌더라면 친절한 친구들의 환영인사로 몸이 벌집이 되었을 거야.”
“우리도 무의미한 살상을 저지르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그거 거시기야?”
강신혁은 모코우드를 관찰하고 알아서 납득했지만 클레어는 그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냐! 고대 선조로부터 물려져 내려오던 꼬리가 변형된 거다!”
“꼬리구나! 과연, 동물은 원래 꼬리로 균형을 잡지.”
“클레어, 저게 거시기일 리가 없잖아. 만약 그렇다면 저 종족의 여성은……."
“그렇겠네. 와……."
"오우......."
“아니라니까!”
사이좋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강신혁과 클레어의 모습에 모코우드가 버럭 화를 냈다.
아무래도 그의 세 번째 다리를 보고 오해에 빠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쳇, 소음이 나는 것을 보고 헤리치가 돌아온 줄 알았는데. 이런 난봉꾼들일줄 알았으면 들어오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이미 늦었다. 미안하지만 모코우드는 두 사람의 소중한 가이드가 되어주어야 했다.
“헤리치라면 이 집의 전 주인 말이지. 뭐 하러 나갔는데?”
“칵테일 재료 구하러. 수시로 날아드는 세뇌 전파로부터 몸을 보호하게 해주는 성분을 지닌 칵테일을 만드는 게 녀석의 특기였지. 하지만 오늘까지 돌아오지 못했으니 아마 죽었을 거야. 이젠 대체 어디서 그걸 구해야 하나.”
“세뇌 전파?”
“하, 너희 이 세상 사람은 맞는 거냐?”
강신혁의 반문에 모코우드는 기가 막혀 말했다.
그러나 클레어가 어깨를 으쓱이며 강신혁의 말을 보충해주었다.
“우린 그걸 다르게 부르거든. 저 영상 얘기 하는 거 맞지?”
“완전히 외딴 곳에서 생존해 왔나보군. 그래, 저 영상이 쏘아내는 세뇌 전파 말이다. 거기 당하면 로봇 놈들의 부하가 되잖아.”
로봇 놈들의 부하.
강신혁이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번화가를 걷고 있던 인간들이었다.
과아연, 이제 납득했다.
“그래서 우린 세뇌 전파라고 불렀던 거다.”
“우린 마기라고 불러.”
“그것도 제법 적절한 표현이군! 하.”
그녀의 말에 모코우드도 납득하고 강신혁도 납득했다.
과연, 저 영상의 목적이 지속적으로 마기를 쏘아내 인간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러모로 이치가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그런 마기를 보호할 수 있는 칵테일이라…… 강신혁이 클레어를 바라보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둘을 좌우로 한 번씩 살피던 모코우드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봐, 그래서 난 언제 풀려날 수 있는 거지?”
“아직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아, 친구. 적절한 사례는 해줄 테니까.”
“사례? 말린 쥐꼬리라면 됐어. 우리 집에도 많아.”
“나도 마기를 막는 칵테일을 만들 줄 알거든.”
“뭐?”
모코우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클레어는 그 앞에서 자랑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봐, 우린 여태까지 둘이서 움직이면서도 오염되지 않고 있었어. 무슨 뜻인지 알지?”
“무슨 아티팩트라도 가진 줄 알았지. 하긴 헤리치도 유일한 바텐더는 아니었으니까. 오, 이건 운명인가?”
하필이면 오늘 외부에서 들어온, 칵테일을 만들 줄 아는 인간들이 헤리치의 빈 집 지붕 위로 떨어지다니.
물론 모코우드도 여태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만큼 순진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자신을 구멍이 뻥뻥 뚫린 치즈처럼 만들어놓을 수 있는 인간들이 굳이 자신에게 바텐더라는 거짓말을 칠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했다.
“잠시 이 집을 쓸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 시비 걸리지 않도록 도와줬으면 해.”
“칵테일을 줄 건가?”
“그렇지, 일단…… 받아.”
클레어는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치어팩 형태로 보관해놓은 칵테일 포션 하나를 꺼내 모코우드에게 던졌다.
모코우드는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곤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으나,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직후 늑대의 얼굴에 꽃이 활짝 피었다.
“헤리치가 만든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잖아! 머리가 아주 말끔해졌어!”
“후, 그거야 당연하지.”
자랑스레 어깨를 펴며 뽐내는 클레어.
강신혁은 그녀가 방금 그에게 건넨 것이 딱히 추가적인 처리를 하지 않은 스테이터스 버프용 칵테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그녀의 칵테일에는 기본적으로 마기를 방어하는 효과가 붙는다는 얘기인데, 이것은 그녀가 영력을 다루는 바텐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하는 건 뭐든지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와주지!”
“뭐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한 얘기나 더 들어볼까.”
클레어가 강신혁을 힐끔하며 그렇게 말하자,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곤 바 테이블 앞에 놓인 먼지 묻은 의자를 두 개 끌어냈다.
비로소 자신에게서 총구가 치워지자 모코우드는 한결 안도한 기색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멸망한 세계에서는 흔히 나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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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코우드를 돌려보낸 후, 강신혁이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집 청소였다.
신풍의 보주와 물의 보주의 권능을 최대한 섬세하게 활용해, 무려 3층에 달하는 건물을 샅샅이 훑어냈다.
쓰레기는 치우고 쓸 만한 물건은 일단 닦아내 한 곳에 쌓아둔다.
보주의 마력에서 비롯된 물과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먼지 한 톨 남지 않았다.
“아, 이 구멍은…… 지금 메워둘까.”
구멍 뚫린 천장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매연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에 가치는 없었으니 막아버리기로 했다.
강신혁은 부서진 나무판들에 자신이 갖고 있던 재료를 덧대어 천장을 땜질했다.
불과 20분도 안 되어 물샐틈없이 완벽한 지붕이 완성되자 클레어는 입을 헤 벌리고 박수를 쳤다.
“와, 뭘 이렇게 깔끔하게 했어?”
“이래봬도 내가 별빛 고아원의 멕가이버였어.”
그의 손재주가 좋다는 이유로 말만 멕가이버라고 추켜세워 주고 온갖 귀찮은 일들을 해내야 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강신혁은 멕가이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의 말을 듣고 깔깔 웃던 클레어가 문득 그의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고아원, 나중에 같이 가도 돼?”
강신혁은 그 말을 듣고 새삼스럽다는 투로 대꾸했다.
“마음대로 개수까지 해놓고?”
“그래도 같이 가는 건 얘기가 좀 다르잖아.”
“나한텐 그때부터 완전 오케이였어.”
“……그래? 그래, 그럼 같이 가.”
클레어는 만족스럽게 웃곤 강신혁의 어깨를 탁 기분 좋게 두드리며 말했다.
“멕가이버, 나 목욕하고 싶어요.”
“에스델 수녀님한테 배워왔네 이거.”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한숨을 내쉬며 대꾸하면서도 결국 킥킥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집에 화장실은 있어도 욕조는 없었는데, 그는 아예 화장실 옆 빈 방에 욕조를 하나 들였다.
덤으로 샤워기도 하나 만들어 탕에 들어가거나 나올 때 몸을 씻을 수 있게 하고, 바닥과 벽을 일부 뜯어내고 배수로를 만들어 화장실로 연결했다.
마지막으로 바닥의 빈 공간을 적절히 메운 후 그 위에 타일을 깔아 완성했다.
클레어는 상당히 그럴 듯한 목욕시설이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아 완성되는 모습에 이번에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진짜 멕가이버 아냐?”
“이건 그냥 배관공이지.”
“좋아, 그럼 마리오네. 으음, 물 온도도 좋아.”
뜨거운 물로 가득 찬 욕조를 손으로 한 번 휘저어본 클레어는 그 자리에서 속옷만 남겨두고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뭣, 클레어, 잠깐만,”
“야호."
강신혁이 기겁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뒤에서 그를 꼭 껴안아왔다.
그를 포근하게 감싸오는 감촉이나 향기 따위로 강신혁의 이성은 순식간에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클레어가 그의 복부에 두른 양손을 곰질곰질 움직이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의 마리오, 우리 같이 탕에 들어갈래요?”
"으으으으으으으."
“푸흐."
강신혁이 무척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을 알아챈 클레어가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강신혁의 뺨에 입맞춤을 하며 그녀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나 참을 수 있어. 어른이니까. 좀 범죄 같기도 하고.”
"그......."
“하지만 아직 어린 네가 참지 못하겠다면 언제든 대환영이야.”
“어째서 그렇게 일일이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말을 덧붙이는 거야?”
“그건…… 에잇!”
다음 순간 둘은 뜨거운 물로 가득한 욕조 안에 풍덩 빠졌다.
물에 들어간 클레어가 위아래의 속옷마저 벗어던지는 것을 감각으로 알아차린 강신혁은 뒤도 안 돌아보고 욕조를 빠져나와 줄행랑을 쳤다.
“아하하하하하하!"
클레어는 도망치는 강신혁의 뒷모습에 오늘 최고로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강신혁은 나중에 반드시 복수해줄 것을 다짐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성인이 되고 나면!
- 회원님의 인내력은 초인적인 수준이군요. 사실 굳이 참을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만. 혹시.
“미리 말해두지만 은아 때문은 아니에요.”
- 그렇다면 전생의 아내 때문입니까?
“설마. ……아니, 조금은 그럴지도.”
전생의 모루는 사람을 인연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한 명 한 명에게 상당히 의미를 부여했고, 그렇기에 그들을 잃었을 때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의 기억을 날로 되찾아가고 있는 강신혁에게도 모루의 그런 마음이 분명하게 깃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노땅답게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 굉장히 보수적이고 또 그런 주제에 집착도 쩐다는 말이었다.
클레어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녀는 강신혁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고, 그렇기에 소중한 경험은 얼렁뚱땅 해치우기보다 서로에게 강한 확신이 있을 때, 보다 소중한 순간에 맞이하고 싶다.
……라고 그녀 앞에서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기에 지금은 나이가 어려서 피하는 것이라는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 그래놓고 다른 여자와 먼저 진도를 나가는 것이 아닐까 관리자는 우려되는군요.
“그게 우려되면 츠쿠요나 좀 막아 봐요.”
강신혁은 괜히 투덜거리며 3층에 있는 다른 방으로 향했다.
이 차원으로 온 목적을 수행하려 만든 공간.
즉 작업실이다.
“그러면 시작해볼까.”
- 그녀는 바를 운영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만.
“좋다고 봐요. 앞으로 계속 이곳에 있으려면 주민들과 원활한 관계를 맺는 게 좋겠죠.”
어쩌면 다음에 정말 차원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때에도 도움이 될지 모르지.
강신혁은 콧노래를 부르며 작업물, 다시 말해 헤일로의 나무뿌리를 꺼냈다.
- 은아 님의 귓속말 : 어디야? 보고 싶어.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 잠깐 차원 퀘스트.
- 은아 님의 귓속말 : 나도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다음에 부탁할게.
- 은아 님의 귓속말 : 응, 난 후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강신혁은 신은아와의 대화를 마치고 가만히 몸을 떨었다.
- 불여우 때문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관리자의 메시지를 애써 무시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손이 조금씩 떨려서 작업을 제대로 시작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