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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화. < Chapter 36. 거인의 궤적 - 5 >

도시의 이름은 네오러스트(Neorust)라는 모양이다.

다 뜯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기둥에 달린 녹슨 철간판에 적힌 ‘네오러스트의 모든 시민은 새로운 지도자를 환영해요!’라는 문구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나 이거 가져가도 돼?”

“오염된 게 아니라면.”

영력으로 철간판의 근원을 훑어본 강신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주위에 사람이나 로봇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기둥에서 그것을 조심스레 뜯어냈다.

오닉스의 은신 능력이 향상된 덕분에 어지간한 행동으로는 은신이 해제되지 않지만, 그래도 큰 소리를 내는 것까지 완벽하게 막아줄 수는 없었으니 조심해야 했다.

“와, 이거 우리 바에 걸어두면 분위기 대박이겠지.”

“글쎄, 네오러스트가 뭔지 묻는 사람이 나오지 않길 바라야지. ……특히 은아 선배가 물어보면 남대문 시장에서 샀다고 잡아떼.”

“있을 것 같아.”

클레어는 깔깔 웃으며 강신혁에게 받아든 녹슨 철간판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그동안 강신혁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밤거리는 고철 더미가 조금 많이 널려 있고, 행인의 숫자가 적고, 조금 위에 하늘을 나는 자동차들이 달리는 빛의 도로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을 제하면 서울의 번화가와 비슷했다.

조금 네온사인이 과했지만 그거야 서울도 마찬가지.

다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면면이 조금 많이 특수했다.

“저쪽은 굉장히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로봇, 저쪽은 고양이 귀가 달린 인간…… 오, 문어처럼 촉수가 난 녀석도 제법인데.”

그 정도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몸이 점액질에 덮인, 수시로 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인간도 있었으니까.

특히나 로봇과 결합한 인간의 경우 바리에이션이 굉장히 많았는데, 강신혁은 청소기 같은 흡입구를 발바닥에 달고 걸어가는 여자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기껏 몸에 청소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길거리에 널린 쓰레기는 깔끔하게 무시한다는 점에서.

“반신이 기계인 놈도 있어. 와……."

“……몸에 기계 심겠다고 하지는 마?”

“스읍.”

아까 강신혁과 클레어가 마주했던 로봇들은 아무래도 순찰용으로 제작된 놈들인지, 도로에 제법 주기적으로 출몰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 중에는 그놈들을 질겁하며 몸을 슬쩍 피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놈들도 있었고, 놀랍게도 로봇을 붙잡고 무언가를 요구해 받아내는 이도 보였다.

“혹시 신분구조가 있나?”

“속단은 이르지만 그럴듯하네. 아무래도 밖을 계속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겠지?”

“응. 인기척이 없는 건물을 찾아보자.”

누누이 말하건대 이 세상에 찾아온 목적은 긴 시간비율을 활용해 헤일로의 족쇄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 세상이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롭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깊이 파고들어가다 얼마나 시간을 날리게 될지 알 수 없었다.

- 정찰 로봇들의 도시 순찰 루트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위험이 없는 지역으로 이동하시죠.

강신혁은 모처럼 활약하는 관리자의 네비게이션을 따라 클레어와 함께 이동했다.

도로는 로봇들이 자주 나타나니 위험하다.

따라서 건물의 옥상을 발판 삼아 건물을 하나, 둘씩 뛰어넘었다.

“저 화면, 마력이 담겼어.”

반쯤 무너진 건물 윗부분에 착지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클레어가 그런 말을 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 벽에 걸린 모니터. 그 안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영상을 보며 한 말이었다.

“그것도 무척 불길한 마나야. 마기.”

“아, 마기.”

바로 얼마 전에 그걸 들은 적이 있다.

영력을 다루는 강신혁에게는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사악하고 무서운 힘.

“그건 네가 상대했던 놈들이 너에게 영향을 줄 수 없을 만큼 약했기 때문이야. 혹은 그들이 자제했거나.”

“자제."

이전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붙었던 갑주괴인을 떠올려본 강신혁은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놈은 강신혁을 상대하지는 않았었다.

오주영이 아니라 그놈과 맞상대를 했더라면, 놈의 마기에 어쩌면 강신혁도 제법 곤란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나마도 영력이 없으면 불가능하지만. 실은 나도 예전부터 지닌 능력에 비해 마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저항력이 있었거든?"

“영력의 잠재력을 갖고 있어서 그랬나보네.”

“아마도. ……다행이야.”

“다행?”

“응, 그게……."

강신혁이 고개를 갸웃하자 클레어는 잠시 뭔가를 말하려는 듯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그의 어깨를 탁 치며 돌아섰다.

“자, 빨리 가자.”

“무슨 말 하려고 하지 않았어?”

“그럴 땐 안 묻는 거야.”

클레어는 이상하게 부끄러워하며 앞길을 서둘렀다.

강신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뒤를 쫓는데, 관리자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 정말로 마기로군요. 아까 로봇에서는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그 짧은 순간 근원을 완벽하게 탐색할 수는 없었거든요…… 관리자 님은?’

- 관리자는 매 순간순간의 정보처리량이 너무 많아, 그만큼 하찮은 개체에 집중할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아, 그러세요.

- 하지만 회원님께 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되는 대상에는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있습니다. 저 모니터 속 영상에서 정말로 마기가 감지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도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는 다른 로봇들에게도 마기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는 건 실제로는 요르문간드가 이 세상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는 얘긴가요?’

- 무슨 말씀을, 회원님. 마기는 요르문간드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엥?’

얼떨떨해 하는 강신혁에게 관리자는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 요르문간드는 히어로 유니버스의 대척점에 선 조직입니다. 모든 세상을 거울 하나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의 조직이기도 합니다만……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누군가가 그들을 모아 생겨난 조직이라는 얘기입니다.

‘똑같은 얘기 아니에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기초교육을 받는 것처럼.’

- 세상 모든 나라로 관점을 넓혀보시면, 태어난 모든 이가 기초교육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서글픈 얘기였다.

- 보다 정확한 해설을 드리자면, 모든 차원에 걸쳐 탄생하는 몬스터를 쥐라고 쳤을 때 그 쥐들을 조종할 수 있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창설한 것이 바로 요르문간드입니다. 당연하지만 모든 쥐가 요르문간드에 속하지는 않았겠지요.

나아가 요르문간드에 소속한 이들 중에는 쥐라서 몰려온 것이 아니라 단지 순수하게 그와 목적이 같아 동행하고 있을 뿐인 자들도 있다고.

이렇듯 그들은 마냥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그 피리 부는 사나이의 정체는?’

- 300,000HP 보너스!

‘참 이것 또 대담하게 모르는 척을 하네.’

관리자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정말로 모르거나 알고 있어도 지금의 강신혁에게는 절대로 알려줄 수 없다는 얘기.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사고를 전환했다.

마기는 요르문간드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마기의 흔적이 깊이 남아있으며, 그것은 네트워크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강신혁은 문득 성대한 한숨을 토해냈다.

“대체 회수해야 할 물건이 어디 짱박혀 있는지는 몰라도 쉽지는 않겠네.”

- 아뇨, 어디 짱박혀 있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응?"

“오, 저기 어때?”

관리자의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강신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던 그때 클레어가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번화가로부터 갑자기 포장된 도로가 어느 시점에서 뚝 끊어져, 쓰레기의 비율이 보다 높아지고 도로는 도로지만 폭발이나 그 비슷한 파괴의 여파로 무질서하게 파괴된 길이 안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건물은 번화가의 것보다 상대적으로 많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현대식 건물이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보다 낡은 느낌이 심했다.

그러나 여기도 네온사인이 덕지덕지 달라붙어있기는 마찬가지. 이 구역 안에서 많은 사람의 생명력을 감지한 강신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생활감이 넘쳐나는 곳이네.”

“그래, 이런 게 진짜지.”

클레어는 또 이 구역의 뭐가 마음에 꽂혔는지 건물의 낮은 지붕 위에서 주위를 슥슥 둘러다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 거리에는 순찰하는 로봇이 없다. 아마 저 번화가는 특급 관리 구역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적당한 건물을 찾으면 되겠어.”

“그래, 나도 슬슬 작업을 개시하고 싶어.”

“생각해보니까 네가 작업하는 걸 내가 독점하는 거네. 와, 이나희 고년이 여태 나 엄청 약올렸었는데.”

이 사람들 모두 강신혁이 모르는 곳에서 굉장히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여자들만 모인 단톡방이 개설되어 있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도 같은데, 정말이라면 너무 무서운 일이다.

“대체 약 올릴 건덕지가 뭐가 있지?”

“지금부터 확인해보려고.”

클레어는 용의자를 심문하는 경찰처럼 괜히 강신혁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는 체했다.

강신혁이 킥킥 웃으며 그녀를 떼어내려는데, 그녀가 그를 붙잡고 귓가에 입김을 후 불었다.

“손님, 귀가 깨끗하시네요.”

"그만...... 어라."

그리고 꼴깝을 떨던 두 명은 건물 지붕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대로 그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꺅.”

“읏차.”

강신혁은 어떻게든 클레어를 받아 안고 착지했으나, 그 위로 먼지가 쏟아져 둘 다 먼지로 샤워를 하는 신세가 되는 것은 면할 수가 없었다.

- 뀨

처음부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오닉스가 둘을 보고 비웃듯이 울었다.

정작 그런 녀석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신세인 데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켁 , 케헥.”

“기다려봐.”

강신혁은 품에서 물의 보주와 신풍의 보주를 꺼냈다. 우선 신풍의 보주로 바람을 만들어내 그들의 몸에서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하는 김에 이 공간에 가득찬 먼지를 전부 걷어내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와, 누가 보면 마법사인 줄 알겠어.”

“그리고 이걸로.”

거기에 물의 보주로 만들어낸 물로 급한 대로 얼굴만이라도 깨끗하게 씻었다.

여전히 옷 아래로는 조금 찝찝한 느낌이 남아있었지만 아까보단 한결 나았다.

“그래서 여긴 어디야?”

“엄청 내구도가 취약한 건물이라는 건 알겠어. 건물 주인한테는 마지막으로 보수 정비를 언제 한 거냐고 따지자.”

하지만 그로부터 3분 정도 건물을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그 건물 안에서 자신들 외의 인기척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며칠 전까지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지금 집을 비우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와, 여기 바잖아.”

클레어는 1층을 둘러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았다. 진열장은 대부분 비어있었고 간혹 보이는 술병도 그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지만, 바 테이블이나 진열장, 좌석들을 보면 분명한 바였다.

“운명적이야.”

“여기 주인이 우리를 집 파괴범이라며 몰아붙이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몰아붙이고 자시고 그게 진실이기에 반박할 도리가 없다.

애초에 사람 두 명분 무게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천장이 잘못했지만.

“이봐, 헤리치! 살아있었나!”

실로 절묘한 타이밍에 1층 문이 열리고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다리는 세 개에, 기묘한 철갑에 뒤덮인 팔을 가지고 얼굴은 늑대의 것인 이를 인간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뭐야, 헤리치가 아니잖아. 네놈들은 뭐지?”

“일단 묻겠는데 너 집 주인 아니지?”

강신혁은 그렇게 물으며 품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우리 잠시 대화하지 않을래?”

“뭣, 그, 그런 정예 무기를 어디서…… 무, 문 닫지 마!”

“안 내보내줄 거지롱.”

어째선지 이곳에서는 그 무기가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렇게 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아주 좋은 선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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