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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 Chapter 36. 거인의 궤적 - 4 >

강신혁은 미로토즈를 지키기 위해, 미로토즈를 행성 통째로 가라앉히려 발악하는 거인을 붙들 족쇄를 마련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시로 새로운 차원 퀘스트를 받았다.

그 세상의 이름은 바로 사이제논.

지구와의 시간비율이 무려 1대20으로, 세상에 회생 가능성이 아예 남지 않아 멸망해가는 곳.

다행히도 히어로 유니버스에서 접촉할 수는 있지만, 세상이 완전히 멸망해버리면 그것도 불가능해지니 이곳에서 수십 년쯤 수련하며 힘을 기른다는 계획은 써먹을 수 없을 것 같다.

- 그런데…… 세상에 진입하고 보니 관리자의 예상보다도 상황이 심각하군요. 사실상 이 세상의 차원 퀘스트는 포기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 참 여기 오자마자 기운 빠지게 관리자 님도…… 와, 밤거리 분위기 죽이네.”

“정말, 서울하고 조금 닮은 것도 같고.”

그곳은 마치 현대 서울이 반쯤 무너진 상태에서 50년 정도 방치되어, 발전할 토대를 잃고 무너진 폐허 위에 얼기설기 문명을 쌓아올리고 빈틈을 마나로 채워 넣은 듯한 세상이었다.

네온사인이 가득한 밤거리, 높은 빌딩 벽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스크린에 비추어지는 사람들의 얼굴, 도시의 상공에 조성된 빛의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

하지만 빛의 도로는 군데군데 불안하게 점멸하고 있었고, 건물 중 3분의 1 가까이는 무너져 있었으며, 네온사인 사이로 드러나는 도로에는 기계부품이나 쓰레기 따위가 버려져 있었고, 빌딩에 걸린 스크린은 주기적으로 같은 영상을 송출하고 있었다.

강신혁이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그나마 이것과 가장 비슷한 것을 찾자면, 그러니까…… 사이버펑크라고 할 수 있었다.

“어라, 뭐가 오는데?”

“온다니 뭐가…… 뭐야, 로봇?”

“와우.”

강신혁과 클레어가 차원의 벽을 넘어 도착한 곳은 도시의 인적 드문 골목.

고개를 들면 골목 너머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건물들이 보였다.

[불법활동개체를 2체 발견.]

그러나 서울과 닮은, 하지만 어딘가 다른 밤거리의 분위기에 그들이 반쯤 취해 있던 그때.

도로 위를 부자연스럽게 나아가고 있던 잿빛 둔탁한 금속 재질의 인간형 로봇 세 개가 그들을 발견하곤 빠르게 다가와 골목의 출구를 막아섰다.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관리대상 ‘인간’ 종족의 소수민족으로 확인, 즉시 체포합니다.]

[순순히 체포에 응하지 않을 경우 발포할 수 있습니다.]

강신혁과 클레어는 그 순간 서로를 마주보았다.

둘은 서로를 제법 잘 알았다. 지금 그들은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일이 아주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상의 스테이터스를 강제열람…… 열람할 수 없습니다. 가이아 시스템에 저항 수단을 지닌 것으로 확인.]

[경계도를 높입니다.]

“가이아 시스템이라…… 흐응. 이것들 어떻게 할까? 능력 자체는 별로인 것 같긴 한데.”

클레어도 로봇형 몬스터는 별로 상대해본 적이 없는지, 권총 하나를 꺼내 손가락에 걸고는 빙글빙글 돌리며 흥미로운 눈으로 로봇들을 살폈다.

강신혁은 서두르지 않았다.

상황이 급했다면 일단 저것들과 싸우고 봤겠지만, 영력으로 놈들을 살핀 결과 그 안에 품은 마력이나 기계구조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한계는 A랭크 정도라는 계산이 나왔으니까.

‘하지만 저런 것들은 으레 하나 해치우면 백 마리 정도 기어 나오는 게 문제란 말이지…….'

잠시 생각해본 강신혁은 일단 평소처럼 쓰레기 창고에서 포식을 하고 있던 오닉스를 바깥으로 불러냈다.

- 뀨우?

[몬스터 발생을 확인.]

[발포 허가 요청 중.]

갑작스럽게 불려나온 오닉스는 어리둥절해하다가는 자신에게 총구(정확히는 손가락을 겨누고 있었는데, 손가락에 구멍이 나 있고 그 안쪽으로 미세하게 총열의 강선이 보였다.)를 겨눈 로봇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본능적으로 은신을 발휘했다.

그리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동화]에 강신혁과 클레어의 모습마저 완벽히 감춰졌다.

[대상의 소실을 확인.]

[마나를 감지. 일대를 탐색합니다.]

[탐색 중…… 대상의 생체반응 로스트.]

[체포대상자 두 명의 생체 반응 로스트.]

[임무 실패. 철수합니다.]

로봇들은 일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행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 것도 감지해내지 못했는지 곧 그곳을 떠나갔다.

클레어는 로봇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네온사인 번쩍이는 도로를 가만히 주시하다가는, 이윽고 헉 소리를 내며 외쳤다.

“뭐야 이거 방금, 정말 은신이야? 게다가 우리까지 완벽히 커버했잖아?”

“훌륭한 은신 셔틀이지. 지금 S랭크던가? 저 정도 수준에는 들키지 않을 정도는 돼.”

덤으로 동화 스킬도 꾸준히 랭크 업한 덕분에 동시에 두 명과 동화하는 것은 물론 동화 상태에서 사용하는 스킬의 능력까지 향상된다.

고슴도치 주제에 무시무시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 뀨!

“자, 이거 먹어.”

- 뀨우.

자신을 부르기만 하면 은신 셔틀로 써먹느냐며 오닉스가 등의 가시를 바짝 세우고 버럭버럭 화를 냈지만 강신혁이 전날 만든 실패작 글러브를 먹여주자 금세 조용해졌다.

- 뀨우뀨우.

“얘 귀엽네.”

- 뀨우…….

가시를 가지런히 눕히고 쇠장갑을 오물거리는 오닉스를 보며 웃음을 터트린 클레어가 녀석의 이마를 살살 쓸어주자 오닉스도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강신혁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가 치유 받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현재 상황을 파악할 때다!

“이 세상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래요, 관리자 님?”

- 알겠습니다.

관리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곧 메시지를 쏟아냈다.

- 이 세상에는 바이러스에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의 분체가 존재합니다. 가이아 시스템은 바이러스가 본체에 침입해오기 전에 이 세상을 폐기했고, 그 후로 이 세계는 독립된 차원구조를 띄게 되었습니다. 요르문간드 또한 그 시점에서 거둘 수 있는 에너지만을 거두고 사이제논에서 손을 뗐습니다.

“정말로 무슨 사이버펑크 게임의 프롤로그 같은 설명인데…… 아니 잠깐만.”

- 이 세상은 병든 시스템과 절반 이상 파 먹힌 에너지의 근원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오기 전부터 말씀드렸지만 이미 희망 따윈 남아있지 않은 곳이지요.

관리자의 메시지를 보는 내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강신혁은 비로소 의문점을 떠올려냈다.

“가이아 시스템이 끊겼는데 우린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거죠?”

여태까지 히어로 유니버스는 가이아 시스템과 밀접히 관계된 무언가라고 생각했던 강신혁의 관념을 박살내버리는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관리자는 강신혁의 의문에 기가 막힌다는 듯 답변해왔다.

- 히어로 유니버스는 가이아 시스템의 상위에 위치한 시스템이라고 회원가입 당시 분명히 설명 드리지 않았습니까. 물론 가이아 시스템이 갖춰진 세상에서 보다 큰 권한을 가집니다만, 가이아 시스템이 퇴거한 세상이라고 접속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가이아 시스템의 관리를 받지 않는 세상이라고 침입을 못할 것 같지는 않아. 요르문간드의 지배를 받는 세상이라도 침입 자체는 가능할걸?”

- 히어로 유니버스보다는 소속된 회원님의 안전과 관계된 문제가 됩니다.

관리자의 메시지를 함께 확인한 클레어가 옆에서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회원가입 당시의 메시지는 그가 모루였던 시절에나 보았던 메시지.

강신혁이 뚜렷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바이러스라는 건 괜찮아요? 가이아 시스템의 구조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스템의 본체가 연결을 끊어낼 정도로 위험한 곳이라면 히어로 유니버스도……."

- 히어로 유니버스는 가이아 시스템의 본체도 아닌 바이러스에 오염된 분체 따위에 접촉을 허용할 만큼 나약하지 않습니다.

언제는 가이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츠쿠요를 저주하더니 이젠 또 잔뜩 잘난 체하는 것이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가이아 시스템이 바이러스에 오염될 수 있다는 얘기 자체는 굉장히 흥미로운 정보였다.

실제로 클레어 역시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다른 회원들에게 조금씩 얘기를 들어서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설마 컴퓨터 소프트웨어처럼 바이러스에 오염이 되는 게 가능할 정도라는 건 몰랐어. 그거 원래 나한테는 열람이 허락되지 않은 정보 같은데.”

- 회원님께서 초대하셨으니 관리자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정말 신혁이만 노골적으로 편애하네. 나야 잘된 일이지만……."

클레어의 얼굴은 시종 반짝이고 있었다.

인류는 가이아 시스템의 축복을 받아 초인이 될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가이아 시스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그 가이아 시스템의 일부가 바이러스로 오염되고, 심지어는 가이아 시스템의 본체와 접점이 끊긴 채 단독으로 유지되어온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녀가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들어오기 전에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세계라고 했잖아요. 이건 제가 와본 세계 중 역대급으로 특별한데요.”

- 조금도 특별할 것 없습니다. 이미 발전 가능성을 잃고 퇴화한 무수한 세상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관리자는 조금 생각하는 것 같더니 덧붙였다.

- 다만 가이아 시스템의 차단 이후로 이 세상의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았기에, 설마 이렇게까지 변질되었으리라고는 관리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이!”

어쩐지 세상에 진입한 이후로 뚜렷이 당황한 것 같더라니!

하지만 어쨌든 관리자가 강신혁을 이 세상에 밀어 넣었다는 것은 그간 이곳의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다는 얘기다.

설령 조금 위험하다 해도 지구와의 시간비율이 1대20인 곳에 들어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헤일로는 강신혁에게 소중한 친구였고, 엘프들과도 정이 들어버렸으니까. ……육체적인 관계는 조금도 없지만!

- 방금 회원님의 대처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저들은 오염된 가이아 시스템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는 만큼, 저들을 파괴했을 경우 이 도시, 나라, 혹은 세상의 모든 로봇의 추적을 받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 정도 수준이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지만…… 정보가 업데이트되었다고 했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로봇이 어느 정도 수준 인지 알 수 있나요?”

- 정확한 랭크 측정은 어렵습니다만, 아마 SSS+랭크 수준은 될 듯합니다.

즉 함부로 저놈들한테 개기지 말라는 뜻이렷다.

하지만 지금 강신혁과 클레어의 경지라면 이곳에서 숨어서 행동하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과연, 어째서 관리자가 여태까지 강신혁을 이런 좋은 환경에 보내주지 않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은신 얼마나 유지할 수 있어?”

“지나치게 마력을 발산하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어.”

“진짜?”

클레어는 시험 삼아 강신혁의 뺨을 제 손가락으로 찔렀다.

타인에 대한 공격 행위가 은신의 해제에 영향을 주나 궁금했던 모양인데 지금은 강신혁과 클레어가 오닉스를 매개로 동화하고 있는 만큼 자기자신을 만지는 행위로 인정되어 은신이 풀리지 않았다.

그가 부러 퉁명스러운 체하며 그것을 설명해주자 클레어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자기자신을 만지는 행위…… 뭐야 그거 좀 야하게 들려.”

“대체 어디가?”

“봐봐.”

클레어가 자신의 두 눈을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녀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녀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어느덧 그와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잠시간 그대로 있다가 입술을 떼어낸 클레어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이럼 내가 나 자신한테 키스를 한 것처럼 되잖아.”

“미안하지만 그런 부분까지는 동화가 안 돼.”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해봐도 돼?”

“키스광.”

하지만 강신혁은 거절하기는커녕 두 팔을 벌려 클레어를 끌어안았다.

쇠장갑을 다 먹은 오닉스가 그 둘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이 안전한 장소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5분이 흘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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