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 Chapter 36. 거인의 궤적 - 3 >
영력 접착제는 이전 히어로 유니버스의 로그인 보너스로 처음 얻은 상품으로, 그가 사마귀굴에 빠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몬스터들을 대량으로 붙잡아두는 끈끈이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톡톡히 활약했던 물건이기도 하다.
자신의 영력을 기반으로 발동하며, 자신의 영력과 불일치하는 모든 대상을 초월적인 접착력으로 연결시키는 기물.
다만 문제점이 있다면 그 효력이 수 분 후에는 고갈되어 접착력도 모두 사라진다는 것인데…….
‘이미 그 한계를 뛰어넘은 적이 있으니까.’
영력 접착제는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성능이 달라질 수 있는 물건이다.
이전 신풍의 보주를 복원할 때도, 일단 영력 접착제로 틀을 맞춘 후 자신의 영력을 불어넣어 완전히 복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지금 강신혁의 영력은 SS-랭크. 그때와는 격이 다르다.
“……만들어야 하는 물건도 격이 다르긴 한데.”
강신혁은 헤일로의 도움을 받아 7할쯤 완성된 나무뿌리 족쇄를, 아직 작업이 되지 않은 부분만 따로 뚝 떼어내 수십 조각으로 분쇄하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헤일로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듯이 그에게 물어왔다.
[허어, 일단 뿌리를 쪼개어 족쇄를 만들고 다시 붙이는 건가. 한 번 쪼개졌던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원본 이상으로 만들어내야죠. 이미 경험은 있으니 맡겨주세요. 아, 대신 이 녀석한테 마나 좀 부어줘요.”
원래 이런 건 히어로 유니버스의 강한 친구들에게는 잘 하지 않는 부탁이기는 한데, 이건 헤일로의 몸의 일부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지.
강신혁은 품에서 극천신주를 꺼내어 헤일로가 뻗어낸 나뭇가지에 내밀었다.
그는 나뭇가지로 그것을 둘둘 감싸 확인하더니 흠칫 놀랐다.
[자네가 만든 보물이군. 이것은 연금술의 영역에 이른 업적이지 않은가?]
“뭘 만드는데 굳이 기술의 형태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요?”
[이거 내가 한 방 먹었구만. 하지만 정말로 신기한 물건이야. 요르문간드 놈들을 상대로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겠는데.]
극천신주를 만든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자면 그로마스의 스왈로잉 펑거스와 그것이 형성된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어야 하니 과감하게 생략했다.
[허어, 이런 귀물이 고작 SS랭크라니? 이건 말도 안 돼.]
“고작 SS랭크 말이죠……."
이래서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지구의 기준이 하찮아보인다니까.
하지만 그런 강신혁도 이제 작정하고 물건을 만들면 SS랭크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니, 마냥 그들을 탓할 것도 없었다.
사실 이제 강신혁은 그 너머의 영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이전 라이트 바실리스크에게서 얻은 SSS등급의 재료들이 활약하게 되리라.
[자, 담을 수 있을 만큼은 담았네.]
생각에 빠져 있던 그에게 헤일로가 다시 극천신주를 되돌려주었다.
돌려받은 극천신주에는 헤일로의 생기 넘치는 기운이 그득 담겨 있었다.
생기 넘치는 기운이라고 해도 사실 그 용처는 제한되어 있다.
헤일로의 특성이 너무 짙게 묻어나는 기운이다 보니 헤일로의 신체에 적용하는 것 외에는, 그러니까 다시 말해 이 족쇄에 불어넣는 것 외에는 딱히 활용할 기운이 없는 것.
‘물론 극천신주의 진정한 능력은 이 에너지를 다른 에너지로 전환해 증폭시키는 것. 따라서 내가 원한다면 이것으로 이 세상의 생명력을 북돋울 수도, 파괴적인 에너지로 전환해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전 키엘론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요르문간드로 인한 문제가 추가로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강신혁이 괜히 극천신주를 활용한 꼼수를 여태까지 쓰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급할 땐 어쩔 수 없다. 이런 방법도 있다는 것만은 염두에 둬야겠지.
[정말로 훌륭한 물건이네만 용량이 부족하군. 부족한 것을 덧대어 업그레이드를 해보는 것은 어떻겠나?]
“업그레이드.”
[그렇지…… 이번에 족쇄를 만족스럽게 만들어준다면 이 나무에서 가장 훌륭한 가지를 내어줌세. 모루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나무는 에너지를 저장하고 또 변화시키는 데 있어 가장 훌륭한 매개라네.]
그것은 강신혁도 잘 알고 있었다.
뿌리로는 물을 빨아들여 저장하고, 잎사귀로는 햇빛을 받아들여 광합성하는 나무는 순환하는 에너지의 상징과도 같은 것.
나아가 그 충만한 에너지는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니, 세계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에너지를 상징하는 그 나무의 가지로 뭘 어떻게 하면 극천신주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지는 아직 강신혁도 감이 잡히질 않았지만 말이다.
“혹시 헤일로는 세계수예요?”
[나의 본체는 나무가 아니라네.]
“진짜!?”
[자네는 때로 곤란한 농담을 즐기는군. 난감해.]
- 속으시면 안 됩니다, 회원님. 헤일로 회원님은.
[그만하게, 관리자.]
- .......
관리자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헤일로에 의해 가로막혔다.
이런 점을 보면 역시 헤일로는 관리자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특별한 회원임에 분명했다.
“후, 좋아. 어쨌든 다 잘랐다.”
[고생했네. 이제 이것들을 들고 작업을 하러 갈 참인가?]
“네. 시간이 촉박해졌으니 어쩔 수 없죠.”
실은 이 세상에서 헤일로와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며, 엘프들의 모습을 보며 느긋이 작업을 하는 것도 강신혁은 그리 싫어하지 않았는데.
[요르문간드 놈들이 원망스럽구만.]
“빨리 저놈을 치우고, 그 다음엔 그냥 놀러오면 되죠.”
- 회원님. 마이 룸에 가는 것보다, 관리자가 새로운 차원 퀘스트를 소개시켜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오?"
그때 관리자가 끼어들어 제안했다.
- 최대한 요르문간드의 개입이 적은 세상으로, 하지만 충실하게 망해가고 있어 지구와의 시간비율은 1대20인 곳입니다. 사실상 회생 가능성이 없는 세상으로, 요르문간드는 이미 세상의 에너지를 대부분 흡수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 세상에 대체 무슨 차원 퀘스트가 발생한다는 거죠?”
- 전생에 만드신 물건을 회수하는 퀘스트입니다.
강신혁이 몇 종류의 차원 퀘스트를 해결하며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차원 퀘스트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지금 그가 수행하는 것처럼 다른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에 의한 요청을 받아들여 생성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생의 모루가 만든 아티팩트를 회수하는 퀘스트로,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것들을 관리자가 적절한 시기에 하나씩 풀어주는 것.
참고로 키엘론에서 두 번째로 발생한 차원 퀘스트는, 관리자는 전혀 다르게 말했었고 지금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어쩌면 밀리아라는 새로운 히어로 유니버스 회원을 보호하기 위해 발생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급한 일은 아니니 일단 그곳에서 이 족쇄를 완성시키는 것을 우선하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회수 퀘스트는 방치해두고 빨리 흐르는 시간만 이용하자는 거네요.”
- VIP 회원의 권한입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해야겠지요.
그냥 관리자가 지나치게 강신혁의 편의를 봐주고 있는 것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관리자를 누가 자를 것도 아니라면 강신혁은 기꺼이 관리자의 호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 감사히 가도록 하죠. 아, 혹시 위험한 곳은 아니죠?”
- 글쎄요, 난이도가 낮은 곳이었다면 진즉 회원님께 추천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 명쯤 회원님을 보조해주는 이가 있어도 좋을 것 같군요.
관리자의 그 말을 듣고 강신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 함께 가는 이가 강신혁이 생각한 그녀가 맞다면, 그렇다면 강신혁은 아마도 이전까지 줄곧 생각해오던 의문점에 결론을 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내 분신을 보내지!]
- 헤일로 회원님은 이미 충분히 바쁘신 분이니 이쪽에서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아니 괜찮네, 우리 세상의 일을 해결해주는데 내가 돕지 않고 그 누가 돕겠는가!]
- 괜찮습니다.
그때 어째선지 헤일로와 관리자가 싸움을 시작했다.
강신혁은 둘이 그러라고 놔두고 여러 조각으로 잘라낸 족쇄에 파츠별로 작게 표식을 새긴 후 모조리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자, 끝났어요. 그러면 전 후딱 다녀올게요. 그동안 헤일로는 어째서 갑자기 저 거인이 달라진 건지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큭, 모루…….]
- 헤일로 님께선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갖추고 계십니다. 어떤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관리자, 많이 늘었구만.]
- 누구 덕분입니다.
강신혁은 미로토즈를 떠나기 전 엘프들에게 인사를 마쳤다.
엘프들은 미로토즈를 지키기 위해 강신혁이 다이나믹한 모험을 한다는 말에 무척 깊은 감명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엘프들에 한해서는 그 감정의 발산이 실로 유감스러운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 위험한 길을 떠나시는 분께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그렇다면 하다못해 저의 이 보잘것없는 육신이라도."
“전혀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요, 일단 그렇게 과감하게 옷을 벗어 제끼는 건 그만두지 않을래요?”
이 망할 노출증 엘프들 탓에 매력적인 여성의 나신을 보아도 쉽게 흥분하지 않는 특성이 생겨버리고 말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망할 놈의 엘프들은 심지어 남자여자도 가리지 않고 덤벼오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위험한 길을 떠나시는 모루 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요! 제 작은 성의를!”
“아니 제가!”
“보답이라는 말 뒤에 숨어 당신들 욕망을 발산하려는 것뿐 아냐!?”
그는 마지막까지 유감스럽게 구는 엘프들을 피해 후딱 차원이동을 개시, 일단 지구로 돌아왔다.
오늘 날짜는 화요일 저녁. 내일부터는 실습이긴 한데…….
[나:저 당분간 자리 비워도 되죠?]
[안형주 : 당당하게 공문서 위조를 부탁하는구나. 너희 실습은 일단 학교 수업 시간에 들어가는데…….]
[나 : 저번에 받은 장갑은 좀 쓰시기에 어때요. 다음에 만들 부츠에 참고하려고 하는데.]
[안형주 : ……설마 한 주 통째로 비울 거냐?]
안형주는 간단히 넘어갔다.
[나 : 일단 이번 주만요. 부탁할게요.]
[안형주 : 어린놈이 벌써부터 권력을 휘두르는 방법을 배워서 말이야. 나 때는 말이야…….]
[나 : 그럼 수고하세요.]
실습을 빼먹는 건 조금 위험부담이 있는 일이지만 안형주와 백인하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구라를 쳐주면 학교 측에 들킬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백인하에게도 적당히 문자를 보냈다. 이쪽도 신풍의 보주를 인질로 잡고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배신할 걱정은 없다.
[백인하 : 너 혹시 아프리카 이런 데 가는 거 아니지?]
[나 : ㅋㅋㅋㅋㅋㅋㅋ]
아프리카는 대륙 전체가 게이트에 집어삼켜진 최악의 금지다.
이전 파리에서 일어났던 게이트 침식 사태가 대륙을 통째로 뒤덮고 있다고 보면 편했다.
간간이 발생하는 SS급 게이트 정도로는 아프리카에는 명함도 내밀 수 없다.
당장 뇌제 신은아도 아프리카를 가만 놔두고 있는 것만 봐도 이 지역의 심각함을 알 수 있었다.
[백인하 : 진짜 궁금하네, 어디서 뭐 하는지.]
[나 : 클레어랑 숙박여행.]
[백인하 : 캡쳐했습니다.]
캡쳐하라고 놔두고, 이번에야말로 클레어에게 연락을 했다.
[나 : 은아 선배 몰래 나랑 단둘이 차원 퀘스트 가능?]
[클레어 : 콜, 콜!]
그는 클레어의 문자를 받은 후 관리자의 반응을 살폈다.
- 역시 이 범죄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참을 수 없군요. 감동한 관리자의 250,000HP 보너스!
응, 역시 이걸로 확실해졌다.
관리자는 강신혁과 클레어의 사이를 밀어주고 있는 것임에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