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그인하자마자 VIP-196화 (196/345)

196화. < Chapter 36. 거인의 궤적 - 2 >

- 제한된 재료만을 가지고 근원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낸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장인의 명성에는 보탬이 되지 않겠지만, 같은 장인이라면 이 물건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력이 미약하게 증가합니다.

- 동기화가 아주 조금 가속합니다. 현재 동화율 65.8%

강신혁도 요즘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다.

동화율이 높아질수록, 모루의 밑바닥에 꽉꽉 눌려 담겨져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빠져나와 그의 뇌리로 흘러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어떤 때엔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

또 어떤 때엔 좌절의 순간의 기억이.

어떤 때엔, 한없이 고통스러운 순간의 기억이.

그 모두가 자신이었기에 거부할 수도 없어, 모두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나마 매일 그러지 않는 것만은 다행이었지만, 특히 망치를 붙잡고 있을 땐 제법 심했다.

‘놔두고 어디 이상한 데 가지 말라고. 하.’

그 타이밍에 이나희가 했던 그 말은 어떤 의미에서든 뜨끔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동시에 고맙기도 했다. 그가 혼란을 떨쳐내고 중심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으니까.

……아니, 그래도 멋대로 입술을 빼앗는 건 좀 아니지만.

얼마나 그가 심각해보였으면 그랬을까 싶은 생각도 조금 들었다.

“신혁, 괜찮아?”

“웬일로 제대로 부르네요.”

가까이서 들려온 목소리에 강신혁은 다급히 생각을 정리하고 대꾸했다.

엘레노어가 그의 눈앞에서 창을 거두며 자랑스럽게 제 가슴을 두드렸다.

“호칭, 열심히 연습하고 있오.”

“마지막에 흐트러졌는데.”

"윽."

강신혁은 피식 웃곤 자신도 검을 거두었다.

강신혁이 비룡기사단 부단장이 되고부터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일과, 대련이 끝난 순간이다.

“오늘 계속, 정신이 다른 데에…… 있는 것 같아.”

“미안해요. 좀 그럴 일이 있었네요.”

“나희 혼내줄까?”

엘레노어가 대뜸 말하자 강신혁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

“우리, 생각보다 친해.”

“아냐, 친하다는 말만으로 납득할 수 없네요.”

역시 이나희는 지나치게 개방적인 것이 맞았다.

“그리고 또 올해 미스 신영 됐다고 자랑했어.”

“미스 신영? 아…… 인기투표?”

“웅."

강신혁은 한 번 겪어보지도 못한 학교축제가 이 빌어먹을 게이트 사태 때문에 깔끔하게 취소되고.

그래도 축제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던 학생들이 어떻게든 축제를 즐기기 위해 자체적으로 추진한 행사가 몇 가지 있었으니, 미스&미스터 신영 선발이 이 일환이었다.

참고로 미스터 신영은 너무 많은 후보가 나오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엘레노어 선배도 표 많이 받았잖아요. 제법 아슬아슬했다고 들었는데.”

“기사학과 학생이 마법학과보다 훨씬 더 많은데 왜……."

급격히 쭈그러드는 엘레노어의 모습에 강신혁은 난감해하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원래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하잖아요.”

“아냐, 그냥 내가 많이 작아서 그런 고야……."

까놓고 말하면 그렇긴 하다.

강신혁은 엘레노어의 매력도 결코 이나희에게 꿇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프로포션에 있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전 선배한테 투표했어요.”

“정말?”

강신혁이 그 말을 한 순간 엘레노어의 안색이 급격히 밝아졌다.

그는 방긋 웃으며 재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하지만 나희 선배가 알게 되면 귀찮아지니까 말해주지 마요.”

“알았오!"

엘레노어가 씩씩하게 대꾸하곤 콧노래를 부르며 대련 장비를 정리했다.

그녀 본인에게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지만, 저렇게 움직이는 모습이 작은 다람쥐가 꼬물거리는 것 같아 귀엽다는 점이 그가 그녀에게 투표한 가장 큰 이유였다.

강신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다가 문득 흠칫했다.

아니, 지금 자신이 다른 사람을 케어해주고 있을 때가 아닌데.

“선배는 실습 쪽은 문제없어요?”

“웅. 우리한테는 상대적으로 낮은 난이도의 게이트가 배정되니까.”

“그건 선배가 실력을 숨기고 있으니까.”

“대, 대신 밤에는 활약하고 있잖아.”

그 말을 하면서 말을 더듬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엘레노어는 아직 마스크드 바커스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는 데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가면을 쓰고 움직일 때는 제법 텐션이 높았던 것 같은데.

“게다가, 이제 조금씩 안정화되고 있으니까. 태세가 안정되고 나면, 이 실습도 끝이 날 거야.”

그건 사실이지.

강신혁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게이트 발생빈도가 이전에 비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몇 달 전처럼 폭발적인 증가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이야 갑작스레 늘어난 게이트에 대처하느라 학생들의 힘까지 빌리고 있기야 하지만, 초인들의 태세가 정비되고 나면 이 대대적인 실습이 취소되거나 최소한의 범위로 축소되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이다.

‘대신 지구에 나타나는 게이트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진 게 문제지만.’

아마 초인협회도, 정부도 이것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수준이 낮은 초인이 활동하기엔 힘들어졌고, 수준이 높은 초인들에게도 부담이 커졌다.

히어로 유니버스의 다른 회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구의 격이 점차 높아지면서 요르문간드 측에서도 보다 쉽게 침공해올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마스크드 바커스로서 활동할 기회는 더 늘어날 거예요.”

“가, 각오하고 있오.”

강신혁이 놀리듯 하는 말에 엘레노어가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대꾸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물었다.

“선배는 졸업 후에는 어떻게 하실 거죠?”

"......."

갑자기 그가 그런 것을 물어와 놀란 것일까, 엘레노어는 잠시 스턴에 걸린 것처럼 굳어있었다.

그러나 곧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마주보고 대꾸했다.

“한 번은 돌아갈 거야.”

“한 번은.”

"응."

그 부분에서 다시 조금 망설이던 엘레노어가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때 같이 가줄래?”

“영국에?”

"응."

그야 확실히, 자신을 싫어하는 친가에 홀로 돌아가기는(물론 카렌이 함께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강신혁도 엘레노어도 그녀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꺼려지겠지.

그런 곳에 같이 가달라고 강신혁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에게 부담을 지우려한다기보다는 아마도 그녀가 그만큼 강신혁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일 터였다.

그녀를 마스크드 바커스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데 일조한 입장에서, 그는 그녀의 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같이 가죠. ……클레어가 허락하면요.”

"응."

그녀는 무척이나 안도한 기색으로 자신의 양손을 맞잡았다.

그리곤 볼을 살짝 붉히며 강신혁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면…… 아마도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을 고야.”

“영국에 같이 살자는 건 아니죠?”

“난 나희가 아냐.”

“안심이 되긴 하는데 그 말, 나희 선배한테도 조금 실례되는 거 아녜요?”

@@@

[그런 고민이 있었군, 모루.]

헤일로의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차분하고 평안했다.

강신혁은 망치를 두들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헤일로가 보기엔 우스워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전혀 그렇지 않아. 환생이라는 경험은 나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뭣보다 지금 자네는 두 삶의 중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아닌가.]

“제법 그럴싸한 표현이네요.”

강신혁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헤일로와의 대화는 이래저래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곤 했다.

“헤일로,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요?”

[그 이상 없는 수준이지. 자네가 만들고 있는 그 족쇄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네.]

“이것만 보고 알 수 있어요?”

[물론. 나의 일부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 않나. 그런데 내가 모르고 어떻게 하겠어.]

헤일로의 분체에서 뽑아낸 나무뿌리로 제작중인 족쇄는 이제 7할을 조금 넘은 수준까지 완성되어 있었다.

거인은 아직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미로토즈의 대지를 진동시키고 있다.

강신혁이 두 개의 낫으로 생산물을 수확할 수 있는 밭을 확보한 덕에 엘프들이 살아가기에 문제는 없지만, 계속되는 진동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자네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 물론 때로는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면, 뒤돌아보며 결코 후회하지 않게 될 거야.]

“……그럴까요.”

[적어도 나는 그런 자네를 무척 좋아하네.]

“하하, 그것 참 고맙네요.”

헤일로는, 강신혁이 자신의 전생의 기억을 모두 되찾아도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기나긴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와의 대화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몰랐다.

“고마워요, 헤일로.”

[나야말로 늘 고맙네, 모루.]

- ……헤일로 님도 예의주시하지 않으면.

두 사람의 기분 좋은 대화에 관리자가 초를 치던 그때였다.

쿠우우우우웅! 거인이 발을 내딛으며 나는 소리가 재차 미로토즈를 진동시켰다.

“......?”

강신혁은 거인의 진동 주기를 기록해놓은 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거인의 발걸음은 그 사이에 이틀의 간격을 둔다. 하지만 지금은…….

“방금 그거, 너무 이르지 않아요?”

[이르군. 아무래도 놈을 살펴봐야겠어.]

헤일로가 제법 긴장된 목소리로 말하며 스스로의 의식을 나무의 가장 높은 곳으로 뻗어냈다.

강신혁 역시 아득히 먼 안개 너머,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발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다시.

쿠우우우우우웅!

거인의 발이 대지를 밟았다.

"......."

[아무래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한 것 같군.]

강신혁이 긴장하면서도 몸의 균형을 잡고 충격을 받아내는 사이 헤일로의 의식이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거인이 성장했어. 아무래도 빠르게 움직이는 방법을 배운 것 같네. 요르문간드 놈들, 제법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느 틈에 거인에게 접촉했단 말인가.]

“빠르게 움직이는 거라면…… 헤이스트?”

[오, 그 마법을 알고 있다니 얘기가 빠르겠군. 그래, 맞네. 그 종류의 마법이네.]

쿠우우우우웅!

그때 재차 거인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악!”

“거인이 폭주한다!”

“며, 멸망할 거야. 드디어 이 세상이 멸망한다!”

“에이잇,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죽을 거라면 마지막으로 모루님께 어택을……!”

이틀에 한 번 간격으로 발생하던 진동이 짧은 시간 안에 무려 세 번씩이나 발생한 것이다.

당연히 본래 이 세상에서 살고 있던 엘프들은 패닉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모루 니이이이이이이임!”

“부디 제 마지막을 받아주세요!”

"......."

강신혁은 주거구역에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소음을 듣곤 눈살을 찌푸리며 헤일로에게 물었다.

“마법이라면 지속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겠네요?”

[아마도 그렇네. 길어봐야 앞으로 몇 분이 아닐까 싶네만…… 오, 다시 느려졌군.]

문제는 이게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강신혁은 아직 미완성인 나무뿌리 족쇄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헤일로에게 질문했다.

“처음엔 백 년을 논했었죠? 지금은 몇 년 남았나요, 헤일로?”

[으으음…… 아마도 석 달이네.]

“상당히 급해졌네.”

[미안하네, 모루. 이 의뢰로 자네를 괴롭힐 생각 따윈 없었는데.]

“괜찮아요.”

강신혁은 양팔을 걷어 부치며 그에게 대꾸했다.

“대신 좀 도와줘야겠어요, 헤일로. 작업을 마이 룸에서 해야겠으니까.”

마이 룸의 시간비율은 1대3. 고작 1.5배에 불과한 미로토즈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작업할 수 있었다.

그 정도라면 승산이 있다.

문제가 있다면 이 거대한 작업물을 마이 룸으로 가져갈 방법이 없어 여태까지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어떻게 하려는 건가?]

“조립식 설계를 해야 한다는 얘기죠.”

강신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히어로 유니버스의 거래 게시판을 열어 영력 접착제를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