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 Chapter 36. 거인의 궤적 — 1 >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새로운 탑 랭커가 발표된 다음날, 방과 후 동아리방에 가니 이만우가 그에게 서류를 들이밀며 말했다.
“아마츠키에서 의뢰가 들어왔구나. B랭크의 전투용 아티팩트 열 개를 원한다고 한다. 자세한 목록은 여기 있다.”
“B랭크요.”
강신혁은 그가 내미는 자료를 받아들어 쓱 훑어보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츠키는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전투 길드다.
백양이 그렇듯 여러 기업체를 문어발식으로 경영하고 있기도 했는데, 한국에는 천월(天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참고로 인류의 배신자인 미즈시마 엘라 유키가 한때나마 소속되어 있던 길드이기도 했다.
“그래도 B랭크라니 마냥 이쪽을 우습게보지는 않는 것 같네요.”
“그렇지. 네 실적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어느덧 히어로 유니버스의 기준에 더 익숙해지고만 강신혁에게 B랭크 아티팩트는 키엘론의 기사들이나 착용할 법한 수준이었지만 지구에서는 아니다.
아니, 이전엔 강신혁도 B랭크 아티팩트를 상급 초인들이나 사용할 수 있는 명품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이니.
“하지만 B랭크라, 일부러 낮은 랭크로 만드는 것도 힘든데.”
“B+나 A-로 맞춰주면 되지 않겠어? 재료비에 크게 영향 안 가는 선에서.”
“B랭크 일곱 개에 B+랭크 두 개, A-랭크 한 개로 하자꾸나.”
강신혁의 배부른 투정을 이나희가 거들고, 이만우가 정리했다.
“그게 이쪽이 우습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능력을 어필하기에 좋을 것 같다.”
“그럼 그렇게 해보죠. 뜻대로 안 될 수도 있지만.”
“열 개 만들려면 당분간 또 바쁘겠네. 클레어 언니한테 말해둬야지.”
바빠질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며 어째선지 실실 웃는 이나희.
스틱을 꺼내 클레어에게 연락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강신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만우를 돌아보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
“네? 아뇨, 제가 직접 나설 것 없이 매번 이렇게 좋은 의뢰를 가져와주시는 선생님이야말로.”
“이것도 몇 번 하다 보면 저쪽에서 먼저 찾아오는 순간이 올 거다. 아마 네 졸업 때까지는 가능해지겠지.”
이만우의 말마따나 아티팩트 장인으로서의 강신혁의 이름도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다.
물론 이쪽은 이나희와 세트 취급이기는 했지만…… 한때 대장장이의 정점을 찍었던 이만우의 프로듀스 덕분인지 고작 몇 달 만에 각종 유명한 기업이나 길드로부터 의뢰를 수주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해내며 야금야금 명성을 키울 수 있었다.
"신은혁의 유명세보단 못하겠지만.”
“선배도 제법 유명하잖아요, 마스크드 바커스의 일원으로서.”
“레드슈즈 실제로 보니 예쁘든? 응?”
“선배도 파리에서 직접 봤으면서.”
레드슈즈.
이번에 새로이 7위의 탑 랭커로 합류한 여성 랭커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브리짓 폴센.
신은아와 비슷하게 젊은 나이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이인데, 자신의 능력을 키우거나 게이트에 들어가 싸우는 것보단 자신의 본업을 더 중요시해서 초인 사회에서의 이미지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다만 일반 사회에서의 이미지는 정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매우 유명한 슈퍼모델 겸 배우였으니까.
“그래서 어떤데, 탑 랭커로 합류했으니까 코앞에서 봤을 것 아냐.”
“우리 클레어가 훨씬 예쁘던데.”
"......."
이나희의 표정이 한순간 얼어붙었다가 풀어졌다.
그녀는 괜히 입고 있던 셔츠의 윗단추를 두어 개 풀고는(이만우가 “할애비 보는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하고 혀를 찼다.) 괜히 강신혁에게로 상체를 들이밀며 눈을 깜박거렸다.
“나보다 예뻐?”
“선배가 더 예쁘죠, 당연히.”
“라인도 내가 낫지?”
?왜 모델 안 하나 싶을 정도지, 암.”
여기서 비위를 맞춰주지 않으면 더 심각한 짓을 저지를 것 같았기에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이나희가 만족한 기색으로 그에게서 떨어지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잘했어.”
“선배는 엎드려 절 받으면 기분 좋아요?”
“응, 최고야. 어떻게든 원하는 것만 얻으면 돼.”
“작업이나 합시다.”
강신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교복 재킷과 셔츠를 벗고 작업복을 입었다.
이만우는 작업 광경을 지켜볼 셈인지 의자에 앉으려 했는데, 이나희가 쉿쉿 소리를 내며 그런 이만우를 쫓아냈다.
“볼 일 다 봤으면 이만 가, 할아버지.”
“나 없는 사이 또 뭘 하려고?”
“하, 진짜 후배 오해할 법한 소리 좀 하지 말고.”
뭘 좀 해볼 생각이었기에 괜히 뜨끔하면서도 이나희는 꿋꿋이 이만우를 쫓아냈다.
이만우는 쫓겨나면서도 강신혁에게 유감스러운 손녀라 미안하다는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강신혁은 속지 않았다.
“우리 담임쌤한테 바람 불어넣은 거 이만우 선생님인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이제 와서 미안해하는 척 하실 필요 없어요."
“쳇, 그 아이가 입이 싸구나.”
“할아버지, 강 빨리 나가.”
역시 이 세상엔 믿을 놈 하나 없다.
강신혁은 이만우가 나가고 이나희가 공방 안으로 들어오자 본격적으로 작업을 개시했다.
의뢰받은 수준에 맞추어 재료를 선정하고, 형태를 갖추고, 망치질을 시작했다.
- 깡! 깡! 깡!
“흠, 역시 너 계속 실력이 느네.”
강신혁이 작업을 하는 사이, 원재료에 마력을 불어넣어 룬의 씨앗을 심으며 이나희가 말했다.
그는 망치질을 계속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야 계속 연습하니까.”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여기 아니면 대체 어디서 해?”
“언젠가 알려줄게요.”
그녀의 특성이 계속 진화해, 그녀도 영력을 다룰 수 있게 되어 히어로 유니버스에 로그인하게 된다면.
그땐 마이 룸에 대해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뭐지, 방금 그거 작업 거는 거야?”
“그렇게 받아들이는 한은 무리겠네.”
“농담이야, 농담.”
이나희가 툴툴거리며 그렇게 대꾸했다.
가슴팍은 아직도 열어젖힌 채다.
외국인의 피가 섞이면 저렇게 개방적인 성격으로 자라나는 것일까.
강신혁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말했다.
“특성은? 발현하고 있어요?”
“이 정돈 어려울 것도 없어. 너만 집중하면 돼.”
강신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작업에 집중했다.
정말로 자신에게 관심을 일절 두지 않고 망치를 두드리는 데에만 몰두하는 강신혁의 모습에 조금 어이없어하면서도, 이것이 언제나의 일이었기에 새삼스레 따질 생각도 들지 않는 이나희였다.
- 깡! 깡! 깡!
분명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작업을 하고 있는데, 홀로 동떨어진 기분이 든다.
이나희는 자신의 마나로 금속에 룬의 기초를 새기면서도, 흘끔흘끔 강신혁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의 시선은 한 점의 흔들림 없이 금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은은한 황금빛을 품고 반짝이는 두 눈. 그의 특성이 발현되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이 그녀는 정말로 멋지다고 생각했다.
강신혁은 장인으로서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한때 이나희가 할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던, 자신의 이상형이 있다면 이런 사람일 것이라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한단 말이지…… 대체 어떻게?’
이나희 역시 백인하와 비슷한 종류의 의문을 강신혁에 대해 품고 있었다.
분명 시간상으로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보면 그 혼자 훌쩍 커버린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성격적으로도 그렇고, 능력적으로는 더더욱 그렇다.
마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다른 세상에 갔다오기라도 한 듯한, 그런 느낌.
그런 느낌이 한 번 들 때마다 그의 능력이 훌쩍 성장하니, 아무리 제 능력에 자신이 있는 이나희라도 때로 막막한 심정이 될 때가 있었다.
‘클레어 언니 때문인가.’
역시 어른이랑 사귀면 어른스러워지는 건가? 아니,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이나희는 문득 아티팩트가 거의 완성되었음을 깨달았다.
‘아, 룬 인챈트 해야지.’
그래, 처음엔 최소한 몇 시간씩 걸리던 작업이 요즘은 무척 빠르게 끝나게 된 것도 그에게 일어난 변화 중 하나다.
그렇다고 만들어진 작품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인가 하면 결코 아니다.
물론 수십, 수백 시간 공을 들여 만드는 것에 비하면 못할 수밖에 없지만, 다른 아티팩트 장인들이 만들어 내놓는 상품들과 비교하면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훌륭한 작품들을 강신혁은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후우......!'
그렇기에 그 수준에 맞는 인챈트를 해야 하는 자신의 등골이 빠질 지경이다.
강신혁이 빠르게 성장하는 만큼, 그와 함께 작업을 하는 이나희의 능력도 빠르게 성장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그와 호흡을 맞추어 함께 걷고 싶은 이나희에겐, 여간 불만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완성.’
느긋한 듯 보이는 그녀이지만 아티팩트를 대할 때만큼은 전력을 다한다.
강신혁의 능력에 비하면 못해 보이겠지만, 적어도 마이너스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총 동원해 인챈트 작업을 마쳤다.
자신이 봐도 제법 만족스럽게 새겨졌으니 이젠 강신혁이 마무리 작업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강신혁의 손이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후배?”
이나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강신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여전히 꿈쩍하지 않는 강신혁.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는 만들고 있던 물건도, 이나희도 아닌 허공의 어딘가 한 점을 응시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후배……?”
어째설까.
그 얼굴은 이나희가 알고 있는 평소 강신혁과는 다르게 무척 성숙하고, 또 슬퍼 보여서.
쉬고 있지 말고 빨리 마무리나 하라고 윽박지를 생각이었던 이나희가 절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후배, 괜찮아?”
이나희는 강신혁에게 가까이 가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강신혁은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으로, 그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너......."
이나희는 겁이 덜컥 났다.
어쩌면 여태까지 자신이 느꼈던, 종종 그가 자신이 모르는 다른 곳에 다녀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 까 싶어서였다.
혹시 이대로 그곳에 가버려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닐까.
어린애 같은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야, 계속 그렇게 장난치면 뽀뽀한다. 아니지, 인챈트지.”
조금 다급한 어조로 말하며 그녀는 강신혁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황금빛으로 영롱하게 반짝이는 그의 깊은 두 눈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괜히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혀로 입술을 핥았다.
“후배……? 강신혁?”
“아."
그의 입술까지 불과 1센티미터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강신혁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코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나희의 존재를 깨닫고는 식겁했다.
“선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뭐야, 걱정 시키고 진짜. 쪽.”
그가 제정신을 찾은 것처럼 보이자, 이나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홧김에 정말로 그에게 뽀뽀를 해버렸다.
강신혁은 화들짝 놀라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나며 외쳤다.
“보통 이럴 땐 안 하지!”
“아니지, 오히려 이럴 때니까 해야지. 작업 하는 중에 딴 짓하고, 나 걱정시키고. 덤으로 의식도 있으니까 내 죄책감도 없지."
“아 진짜.”
“싫진 않잖아.”
이나희가 히죽대며 하는 말에 강신혁은 어처구니가 없어 대꾸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래도 정신은 확 들지?”
“설마 나 지금 선배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요?”
“야."
정말로 정신이 확 들어버린 강신혁에게, 돌연 이나희가 한 손을 뻗어 그를 가리키며 선언했다.
“좋아해.”
“엉?”
“아. 네가 언니 좋아하는 건 당연히 나도 아는데, 그냥 알아두라고.”
강신혁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줄 몰라 멍하니 있으려니, 이나희가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 놔두고 어디 이상한 데 가지 마.”
그 말에 강신혁은 화를 내는 것도 잊고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